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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29 - 백령도 동키부대 이야기(2)

 한국전쟁 기간 중 동키 유격부대의 활동이 제일 격렬했던 시기는 1951년 1·4 후퇴 이후 교착 상태에서 지역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전투로 보인다. 이 당시 유격부대의 활동이 증가하고 전체에 대한 통합 조정, 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8240부대는 1951년 7월26일 주한극동사령부 연락파견대로 창설됐다.

 

8240부대는 서북해안의 유격부대뿐만 아니라 1948년부터 대북첩보활동을 벌였던 KLO(켈로, Korean Liaision Office, 극동군사령부 한국연락처)부대까지 포함됐다. 그후 보다 치밀한 육군 부대 지휘를 위해 기존의 표(豹)부대는 옹진반도의 서부 및 서북지역의 유격대를, 울프팩(Wolfpack) 사령부는 옹진반도 동부지역의 유격대를 지휘하도록 조정됐다.

 

여기서는 당시 백령도 주민으로서 한국전쟁 당시 동키부대 통신병으로 참전했던 분의 활동을 소개한다.

 

▶ 체크 Point 1. 백령도 정착 및 활동

 

그는 황해도 해주 출신이었다. 조부모께서는 동학농민운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사건으로 소청도로 피신했고, 이후 한학을 하셨던 부친께서는 좀 더 큰 섬에서 살아보겠다는 생각에 대청도 그리고 백령도로 거주지를 옮기셨다.

 

3형제의 막내로 중화동(연화2리)에서 태어났으며, 백령도 토박이로 생활하면서 평생 배를 몰며 어업에 종사하셨다. 그 과정에서 약 40년 전 백령, 대청, 소청 서해 3도에서 가장 먼저 FRP 재질의 신식 선박을 구입, 운행해 이 지역 선박 항해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바 있는 올해 89세의 노병으로 구순이 코앞이시다.

 

▶ 체크 Point 2. 동키 부대 지원 동기

 

한국전쟁이 활발하던 1951년 1·4 후퇴 당시 나이 18세. 사곶(沙串)에 사는 아내의 얼굴은 알지 못한 채 양가 부모에 의해 이뤄진 약혼 사실만 알고 예비 처남에게 군입대 사실을 귀띔한 채 전선으로 향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한국군으로 입대하기에는 나이가 적어 자격 조건이 되지 않았고, 당시 미군의 군복 휘장이 매우 멋졌다는 생각이 들었던 상태에서 어차피 어느 나라 군대를 가긴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동키부대를 지원하게 됐다고 한다.

 

▶ 체크 Point 3. D-10부대의 군 생활 및 전투 여건

 

그래서 시작된 동키부대 생활. 1952년 1월 중순부터 1953년 7월27일 휴전에 이르기까지 사선을 넘나들며 약 1년6개월 동안 통신병을 수행했다. 소속부대는 안악부대, 즉 동키 10연대(Donkey-10)다.

 

당시 이 부대의 최종집결지는 황해도 구월산 꼭대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지점은 알 수 없다. 이 부대의 구성원은 구월산을 중심으로 송화 장연 등 주변지역 사람들이었는데, 아마도 향토지리에 밝은 군사를 통해 매복 등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군사작전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군대의 계급장 표시는 ‘M’자 혹은 ‘역 W’자 형에 가까웠으며, 계급이 올라갈수록 ‘M’가 위로 하나씩 더 겹쳐져 마지막은 3개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당시 아군이 사용한 총은 8연발의 M-1, 북한군은 단발이었다고 하니 무기면에서 미군 장비가 월등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 체크 Point 4

 

다시 통신병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백령도에서 ‘양산호’를 타고 장산곶을 돌아 남포시 초도(椒島) 소사리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치치치 또또또’ 잊혀지지 않는 신호음이다.

 

통신은 유·무선반으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유선반에 배정됐고, 나중에는 인원보충과 능력을 인정받아 무선반에 배치됐다. 지금도 그 때의 무선반 배치와 활동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전장터에서의 무선반 담당 프라이드는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하다.

 

경험이나 능력이 부족하면 유선반, 반대의 경우 즉 고경력자나 암호해독 능력이 우수한 사람은 무선반에 배치됐다고 한다. 통신병은 최소 3명 1조로 제너레이터사, 통신사, 암호사 각 1명으로 구성된다.

 

제너레이터사는 교신을 할 수 있는 전기발전을 담당했는데 주로 체력이 좋은 군인이 맡았다. 통신사는 암호통신을 담당, 상대방의 암호를 듣고 복창하며 받아적었다. 그 이유는 상대방 교신 내용을 정확히 받아 적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매회 교신 시간은 주로 50분 내지 1시간 정도 이어졌고 암호사는 암호해석을 통해 아군이나 적군의 이동 경로, 분포, 전투 성과 등을 현장의 담당 부대에 전달했다.

 

현재 노병이 당시의 전투 상황을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초창기 부서 배치받고 활동했던 일부 사실만 기억하고 있다. 70년 전 기억이 아무리 생생해도 정확도와는 별개의 문제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대피소에 몸을 피하지만 천정에서 떨어지는 돌과 흙더미가 온몸을 덮쳐 한 치 앞을 내다보기가 어려웠다. 1개 중대가 출동해 생환한 사람은 10명 이내였기에 생사 여부는 하늘의 몫이었다.

 

어느덧 1953년 휴전 협정이 맺어졌고, 고향으로 왔을 때 이웃과 일가친척은 외마디 이구동성으로 ‘와’를 외쳤다. 그리고 사곶을 찾아 드디어 가슴에 품고 지냈던 약혼녀를 맞아 결혼을 했다. 지금의 혼인 연령으로 보아 조혼이라 할 수 있기에 자식들의 나이도 60대이시다.

 

슬하에 2남2녀의 자녀를 두셨고, 한국전쟁의 참전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유공자가 되셨다.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을 보내시길 기원한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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