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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75 - 대청도 고주동 이야기

이방인의 출입이 드물었던 산속 마을

 

 대청도 남쪽 산속에 위치한 산간 마을 고주동. 한자로는 ‘창고(곳집) 고(庫)’ ‘살 주(住)’를 쓴다. 다른 마을은 대부분 해안이나 포구와 접해 형성됐으나 고주동은 해안에서 떨어져 있으며, 이 섬에서는 가장 오지(奧地)의 마을로 꼽힌다.

 

행정구역은 옹진군 대청면 대청5리이며, 2022년 4월 현재 43세대 79명이 거주하고 있다. 선진동 영감낭뿌리 넘어 ‘논아래’에서 서쪽 삼각산으로 들어가 있는 마을로 서쪽은 삼각산(343m), 북쪽은 뾰족산(228m), 동쪽은 판안구미(板案仇味)산(129m), 남쪽은 숫굿산(180m)으로 둘러싸인 산촌이다.

 

이민족 등 이방인의 출입이 드물었던 산속의 안전한 마을, 대청도의 안전지대로서 학골 밑의 좁은 평지를 따라 길게 펼쳐져 있다.

 

▶ 고주동(庫住洞) 지명유래의 역사

흔히 지명에서 쓰는 ‘고’는 ‘높을 고(高)’ 혹은 ‘옛 고(古)’를 사용하지만 ‘창고 고(庫)’자는 흔치 않는 경우인데, 그렇다면 이 한자어를 택해서 쓰는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이 마을의 역사에서 창고와 관련한 내막을 알아보자.

 

이 마을의 옛 지명을 보면 ‘창고 고(庫)’, ‘집 사(舍)’자의 고사동(庫舍洞)으로 표기한 경우가 있는데, 이 해석은 물자를 저축하기 위한 창고가 있었던 곳을 의미하며 해당 시기부터 사람이 거주했다는 의미다.

 

전언에 의하면 1323년 원 순제가 태자 시절 계모의 모함으로 대청도로 귀양 올 때 함께 따라왔던 사람의 수가 100호가 됐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귀양 와서 먹고 살만한 양식을 비롯, 여러 생활용품을 저장할 만한 창고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 때 이 창고에서 순제와 식솔들이 궁궐을 짓고 살던 내동의 현 대청초등학교까지 소당고개를 넘어 다니면서 운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외에 고사동의 위치나 실정이 외부에 누설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을지 모를 일이긴 하나 지명이 원 순제와 관련된 일이기에 흥미롭다.

 

또 대청도가 17‧18세기에 해적들의 출몰이 심해지자 정조 17년(1793)에 좌참찬 정민시(鄭敏始)는 대청‧소청도에 백성을 모집하고 입주시키며, 대청진을 설치하고 이 곳에 수군 배치를 강력하게 건의했다. 이에 (정조는) 먼저 황해도 수사(水使, 수군절도사)에게 그 타당성 여부를 조사해 보고하게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청도는 동서 30리, 남북 20리이며 내동(內洞), 고사동(庫舍洞), 판안구미(板案仇味, 현재는 늘안구미, 널안구미, 느랑구미), 사언동(沙堰洞) 등 4개의 큰 골짜기로 나누어져 있다. 이 중 고사동은 길이가 3리, 폭은 200여 보(步)에 이르는 지역인데, 그 윗부분은 층암난석(層巖難石)으로 경작할 땅이 없으나 그 아래의 지세는 대체로 평탄하고 토색(土色)은 흑색(黑色)이며, 개간할 만하다.

 

그러나 고사동 골짜기 입구는 해안에 연결되는데 제방은 있지만 돌무더기가 무너져 내려 밀물 때면 짠물이 스며들어 온다”고 지형을 서술해 보고하고 있다. 이로 보아 고주동의 옛 지명은 ‘창고 고(庫)’와 ‘집 사(舍)’로 구성된 ‘고사동’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경작지가 부족하고 더구나 바닷물이 들어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조선시대 대청도는 이웃 섬인 백령도의 부속도서로 광해군 이후 쇄환정책(刷還政策)에 따라 섬이 비워져 있었고, 200여 년이 지난 19세기가 다돼 정민시의 건의로 1799년 대청진이 내동에 설치되면서 정식 대청도를 지키며 보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도 고주동의 경우 경작할 만한 땅이 없었기에 황폐화가 연장됐을 것이며, 따라서 소수의 가구가 거주했을 것이다. 1802년 편찬된 ‘백령진지(白翎鎭誌)’에 의하면 당시 대청도는 26호가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주된 거주지는 고주동보다는 농업 중심의 내동이 더 좋았기 때문이다.

이후 1914년 일제강점기 일제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과 명칭 변경에 의한 개편으로 백령면으로 편입되면서 고사동은 고주동으로 개칭됐다. 생업은 주로 어업을 영위하고 있으며, 포구는 선진동에 두고 있다. 종교는 천주교 공소가 있으며, 개신교를 신봉하는 교우도 다소 있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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