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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기적을 보기엔 너무 비통한 세상이로다

90. 더 원더 - 세바스찬 렐리오

 

극장을 포기하고 넷플릭스로 곧장 직행한 아르헨티나 출신 세계적 감독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의 역작 ‘더 원더’는 몇 가지 키워드를 이해하면 훨씬 더 흥미로울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1860년대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이런 얘기를 왜 지금 하려 했는지 그 현재성이 느껴진다. 더 나아가 기이하게도 우리는 이 영화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보편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키워드는 영국의 산업혁명, 아일랜드 대기근 그리고 크림 전쟁이다. 산업혁명은 대체로 1760년부터 1840년에 이르기까지 진행됐다.

 

방직기계의 발명으로 공장마다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한 분야의 발전이 연관 산업으로 이어져 경제 시스템의 근대화, 자본주의 경제의 초석이 만들어졌다.

 

사회는 혁신되었을지 모르지만 빈부격차는 극단적으로 벌어지고, 10세 미만의 아동들이 공장 노동으로 착취됐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1845년에서 1852년까지 벌어졌고 200만 명이 죽었다. 수백만 명이 굶주림을 피해 아메리카나 호주 같은 신대륙으로 넘어 갔다. 대기근으로 아일랜드의 인구가 800만 명 정도가 줄어들었다.

 

크림전쟁은 1853년 발발해 1856년 종전됐다. 그 유명한 나이팅게일의 이야기가 나오는, 가장 참혹했던 전쟁 중 하나로 꼽히는 역사다.

 

 

영화 ‘더 원더’는 그 같은 세상의 아수라장의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립 라이트(플로렌스 퓨)는 잉글랜드 간호사다. 그녀는 크림전쟁에서 돌아 온 직후 아일랜드의 외진 시골 마을로부터 안나라는 이름의 한 여자아이(킬라 로드 캐시디)를 관찰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아이는 4개월 째 음식을 먹지 않은 채로 생존하고 있다. 아이를 둘러싼 이 ‘기적’이 의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 아니 그보다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종교적 기적임을 입증하라는, 마을 유지들의 명령 아닌 명령을 받는다.

 

때문에 립 간호사는, 아이를 관찰할 수는 있지만 ‘개입’할 수는 없다.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강제로 먹을 것을 주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안나를 둘러싼 하늘의 기적은 아일랜드 전역에서 아니 잉글랜드에까지 그 소식이 퍼져 있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신의 기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철썩 같이 믿으려 한다. 자신들의 영성(靈性)을 아이를 통해 확인하려 애쓴다. 뭔가의 기적을 바라던 시대였던 탓이다.

 

하지만 간호사 립은 당연히, 이 모든 것이 가짜라고 생각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잉글랜드에서 온 기자 윌(톰 버크)도 이 소동의 실체와 진실을 밝히려 한다. 마을 사람의 일부도 이 거짓된 행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은 마을 종교 지도자와 지배층들의 공고한 자기 확신의 벽에 부딪힌다. 4개월간의 금식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살아 있던 안나는 간호사 립의 ‘관찰’이 진행되는 2주간 급격히 쇠약해지고 심지어 점점 죽어가기 시작한다. 죽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립은 결국 단호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전쟁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성(神性)을 상실하게 하는데, 거기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다.

 

립은 안나에게 전쟁에 나가 많은 것을 봤다고 말한다. 특히,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게 많았다고 한다. 립은 아마도 지옥을 봤을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것이다. 신이 과연 존재하느냐는 근본적 의문을 갖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렇게 신을 부정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신, 인간의 이성이라는, 근대적 합리주의를 깨닫게 됐을 것이다. 전쟁과 기근으로 수백만이 죽어 나가는 과정에서 그녀는 신을 믿기 보다는 인간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을 것이다.

 

간호사 립이 어떻게든 안나를 살리려고 하는 것은 그녀의 이성이 전근대성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3주 만에 잃었던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시대가 한 번에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건 인간의 이성이 한 번에 확립되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런 상황은 때로는 과학과 종교의 대립으로 또 때로는 진보와 보수의 대립으로 표면화되기도 한다. 또 때로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같은 지역과 민족의 대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주식(主食)이었던 감자의 흉작이 직접적인 원인처럼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의 착취가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감자를 제외한 다른 곡물을 잉글랜드인 지주들이 철저하게 수탈해 갔으며, 먹을 거라곤 오직 감자밖에 없던 아일랜드 농민들에게 감자 역병으로 흉년까지 들었던 것이다. 당연히 아일랜드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립 간호사가 처음부터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는 이유다. 사람은 4개월 간 아무 것도 안 먹을 수 없다는, 그녀의 이성적 판단은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대기근 때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 잉글랜드 신문사 기자 윌은, 안나에게 소마트로프를 선물한다. 소마트로프는 당시로서는 기이한 장치로 일종의 만화인형이다. 원형의 음반에 각기 다른 그림을 그린 후 양쪽에 실을 달고 엄지와 검지로 잡아당기면 두 그림이 합쳐진 형태로 보여진다.

 

영사(映寫)의 초기 단계, 그 기술적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장치인 셈인데 영화에서는 근대적 물건과 그에 대한 사고(思考)가 출현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은유하는 대목이다.

 

윌이 준 소마트로프에는 새장과 새가 앞뒤에 그려져 있는데, 줄을 잡아 당겨 회전시키면 새가 새장에 가두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안과 밖은 하나이며 신의 영역과 자연=인간의 영역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안나를 새장 안에 가두려는 세상의 무지, 그 종교적 완고함과 이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주의는 늘 역사의 큰 파고를 겪으며 발달한다. 인간은 스스로 그렇게 신의 영역으로 다가서고, 그 과정에서 신 역시 인간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서는 것, 곧 자신처럼 되는 것을 허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1860년에는 대기근과 전쟁, 참혹한 노동 현실이 인간을 보다 이성적으로 만들었다.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의 초고를 완성한 것이 1867년인 것을 보면, 당시의 시대가 어떻게 이성적 결론을 맺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결국 영화 속에서 아이를 의도적으로 굶주리게 하면서 예수의 만나(man hu, 하늘의 양식)로 살아가고 있다는 인간들의 희대의 사기극, 그 종교적 무지몽매함이 왜 벌어졌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1860년대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 벌어졌던 사건이,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크림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놀라운 동일성)과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1860년대의 립과 윌처럼 지금 우리도 이성의 확장을 꾀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앞으로의 시대는 더 밝아질 것인가, 아니면 더 암울해질 것인가. 그 점이야말로 영화 ‘더 원더’가 묻고 있는 대목이다.

 

대영제국 전역에서 / 매일 밤 아이들이 / 도랑과 시궁창에 누워 / 죽어가지 않는가 / 모든 평범한 어린이에게서/ 기적을 보기엔 너무 굶주린 / 비통한 세상의 탓이여.

 

영화 ‘더 원더’는 영화 세트장에서 시작해 영화 세트장으로 끝나는 기이한 형식으로 돼있으며, 중간중간 화자를 배치함으로써 교묘한 소격 효과(疏隔效果, defamiliarization)를 불러일으킨다.

 

비록 영화의 스토리이지만 좀 떨어져서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라는 태도이다. 위 글은 신문기자 윌의 기사를 영화 속 화자가 읽어 내려가는 부분이다. ‘비통한 세상의 탓’이란 말에 영화의 모든 방점이 찍혀져 있다. 실로 비통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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