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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엄마가 가고 있어. 엄마가 가서 구해줄게”

97. 패닉 런 - 필립 노이스

 

아마도 국세청 조세과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은 (그리고 이 사실은 나중에 매우 중요하다) 에이미 커(나오미 왓츠)는 요즘의 삶이 만만치 않다. 그건 순전히 남편이 1년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탓인데, 에이미 커는 아직 초등학생인 딸 그리고 이제 반항기에 들어선 고등학생 아들 노아(칼튼 곱)와 일상을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에이미는 오늘따라 학교를 가지 않겠다는 아들의 이불보를 걷어 내 깨운 후 이런저런 짜증을 가라앉히려 조깅에 나선 참이다. 그런데 조금 뛰기만 하면 전화가 울린다.

 

오늘 나가지 않겠다고 연락한 사무실에서 동료인지 누군가가 서류 파일을 찾는다며 전화가 오고, 다른 주에 살고 있는 친정 엄마는 몇 시간 후면 비행기로 도착할 것이라며 곧 만나자고 연락이 온다. 여느 자식이 그렇듯 에이미 역시 약간 짜증을 덧붙여 상대를 한다.

 

그래도 학교에 간 딸아이가 전화해 자신이 그린 공룡 그림을 갖다 달라고 하자, 이번엔 하등 귀찮을 게 없다는 양, 아이가 다니는 미술학원에 전화를 걸어 그림을 찾아가겠다는 통화를 한다.

 

그 와중에 아들의 친구 엄마, 곧 같은 학부모에게 전화가 오는데 아들 노아가 요즘 학교에서 다른 애들한테 시달린다는 얘기를 전한다(이 얘기도 나중에 꽤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아무튼 에이미 이 여자, 도무지 맘 놓고, 시원하게 달릴 시간이 없다. 엄마는 바쁘다. 엄마는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세상의 엄마란 다 그렇다. 거기까지만 해도 좋다. 그 정도라면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에이미의 휴대전화에 곧 재난 경보가 울린다. 노아가 다니는 학교에서 무슨 사고가 났다는 것. 그리고 곧 그 사고가 총격사고임을 알게 된다. 에이미는 충격에 휩싸인다.

 

에이미는 오늘따라 조깅을 좀 멀리 나왔다. 숲 속 깊이 들어왔다. 집에서 8㎞의 거리다. 걸어서 40분 정도. 에이미는 냅다 달리기 시작하지만 급한 마음에 다리를 접질리고 절뚝절뚝, 비틀비틀 아이의 학교를 향해 간다.

 

그리고 이때부터 911 요원, 경찰과의 빗발치는 전화에서 청천벽력의 얘기를 듣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이, 노아가 총격사건의 용의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정말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일까. 엄마 에이미는 제시간에, 그러니까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사고 현장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극장에 잠깐 걸렸다 곧바로 사라진, IPTV에서 볼 수 있는(현재 1만 1000원) 영화 ‘패닉 런’의 원제는 ‘더 데스퍼레이트 아워(The desperate hour)’이다. 절망의 시간이다. 목숨이 경각의 위기에 처한 아이를 향해 뛰어갈 때 엄마의 마음은, 당연히, 지옥이다. 쇼크와 절망의 시간이다.

 

 

기이하게도 이 외국 영화를 보면서 지난해 우리에게 벌어진 이태원 참사가 자꾸 떠오르는데,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이 영화는 대놓고 소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 현재 ‘숨어 있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매우 절묘하고 영리하게 찍었는데 모든 서사는 엄마 에이미 커의 시선으로만 처리된다. 그러니까 영화의 이야기 전부가 엄마의 조깅 길에서 전해지는데, 바깥에서 펼쳐지는 연옥도는 그녀의 휴대전화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달리면서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속보를 찾아보며 아들에게 끊임없이 통화를 시도하고 급기야는 범인의 윤곽까지 알아내게 된다. 영화의 동선은 단 하나, 그녀가 달리는 길이다.

 

당연히 영화 속 인물 대개가 휴대전화 영상으로 보이거나 목소리로만 출연한다. 오로지 중심인물은 엄마인 에이미 커 뿐이다.

 

이런 설정으로 영화는 급박한 상황의 액션 시퀀스를 구축해 낼 수 있을까. 영화 ‘패닉 런’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듯 러닝 타임 83분 동안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야기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영화는 몇 가지의 상황과 장치를 심어 놓는다.

 

일단 주인공이 뛰는 것이다. 그녀는 과연 잘 달릴 수 있을까. 게다가 그녀는 중간에 길을 잃는다. 급한 마음에 우버 택시를 부르는데 주변 모든 도로가 이미 철저하게 통제가 된 터라 택시와 에이미가 만나는 게 쉽지 않다.

 

 

거기에 경찰과의 전화 통화가 에이미의 상황을 급변한다. 경찰은 그녀에게 집에 총기를 갖고 있는지, 최근 아들에게 심경의 변화 같은 것이 감지됐는지, 아들이 엄마 모르게 총기나 탄약을 구입한 흔적은 없는지 등을 묻는다. 경찰은, 어느 나라 경찰이 모두 그렇듯, 자신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만을 묻고, 정작 부모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절대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건 지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를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에이미는 아들이 아빠의 갑작스러운 사망과 학교에서의 왕따를 당하게 되면서 가공할 일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이때 그녀는 오히려 냅다 달리던 발걸음을 늦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아들 노아를 저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 영화를 만든 필립 노이스 감독은 그때마다 드론 카메라를 이용해 시점을 하늘 위로 올려 보낸다. 익스트림 부감 숏을 구사하는데 에이미가 저 하늘 밑 빽빽한 숲 속 한가운데에 완전히 홀로 고립돼 있음을 보여 준다. 아이를 잃었거나, 잃게 되는 순간에 있는 어미의 마음이 저럴 것이다. 신이 굽어보고 있다 한들 저 여인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저 여인의 마음을 달래고 위로할 도리가 없다. 어쩔 것인가. 세상의 끝에 다다른 느낌일 것이다.

 

액션이 전혀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매우 박진감 넘치게 전개된다. 러닝 타임이 비교적 짧은 것도 군더더기를 쳐냈기 때문이다. 사건은 단 두 시간, 그러니까 대략 9시에 발생해서 11시 정도에 종결된다. 그 앞뒤의 구차한 얘기는 과감히 삭제하고 사건 본체에만 집중했다.

 

가족의 단란했던 삶은 플래시백의 장면 몇 컷으로 처리했다. 다른 일상의 모든 관계는 휴대전화 안, 유선 속에 가둬 놓았다. 주인공 에이미를 이렇게 저렇게 돕는 사람들, 사건 현장에 가까이 있는 카센터 직원, 911 통화 요원, 나중에 에이미를 현장으로 데려다주는 택시 기사들과의 이야기들도 최소화시켰다. 그것 역시 미뤄 짐작하기에 충분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핵심은 엄밀히 보면 아들이 처한 학교 내 총격사건도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을 겪게 되는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속 지옥도이다. 그 휘몰아치는 격랑의 파도와 광풍이 이 영화가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이고 진정한 공포이자 서스펜스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엄마가 알고 보면 시시각각 아이들이 처한 위기, 처할 수 있는 위기 때문에 살얼음판의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아이가 학교에 가는 것조차 위험해진 사회가 됐다. 이것이 정상이냐고 영화는 묻고 있다. 도대체 현대사회의 시스템은 올바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냐고 영화는 항변한다.

 

필립 노이스 감독은 호주 출신이다. 그가 만든 영화 가운데 가장 인기를 모은 것은 ‘솔트’이다. 초창기에는 ‘패트리어트 게임’, ‘긴급명령’ 같은 첩보영화로 유명해졌다. ‘본 콜렉터’ 같은 연쇄살인마 얘기의 영화도 그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대중영화에 앞서 그는 호주 원주민들의 지난한 삶을 그린 ‘토끼 방호 울타리(Rabbit Proof Fence)’ 등의 작품으로 자신의 사회의식이 남다름을 보여준 바 있다. 이번 ‘패닉 런’은 그가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여자 한 명의 이야기로 세상 전체의 상황을 보여 준다. 연출의 힘이 여전히 만만치 않음을 과시해 낸 셈이다.

 

이태원 참사를 예견한 듯한, 이태원 참사에서 희생된 아이들 엄마와 아버지의 심경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영화이다. 주인공 에이미는 아들을 향해, 그녀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되뇐다. ‘엄마가 간다. 엄마가 가고 있어. 엄마가 가서 구해 줄게’ 그 말을 마다 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패닉 런’은 기이한 시기에 나온 기이하면서도 기발한 작품이다. 선뜻 이 영화를 권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것 역시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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