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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바보와 바보네 가게

 

커피에 꿀을 조금 넣고 잘 저었다. 내가 내 몸에 공양한다는 마음으로 잔을 들어 입에 대고 마셨다. 처음 느껴보는 맛이다. 차에는 차의 맛이 있고 말에는 말맛이 있다. 또한 사람에게는 사람 냄새가 있다. 차의 향 같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강원도 시인을 만나면 산속 너와집 냄새가 있고, 김제 시인을 만나면 만경 들녘의 벼이삭 익어가는 훈풍 같은 느낌이 있다.

 

정의감은 생명의 진화를 위해 소중한 것으로써 작가는 목숨을 걸고 실천해야만 되는 줄 알고 살아왔다. 세월의 흐름 따라 그 정신의 날은 무뎌지고 생활의 질서 뒤로 물러서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기 점검의 성찰에서 오는 뼈아픈 후회감과 함께 느껴지는 비굴함 같을 것이기도 하다.

 

이럴 때 거실에 홀로 앉아 낡아진 위장을 생각하여 가벼운 차 한 잔을 마시고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바른 언론관을 생각하며 기본에 충실하겠다는 생각으로 공부하며 살아가는 아들에게 걸려온 전화는 속 쓰림 없는 커피 맛이라 할까. 말맛이 시원시원하고 뒷맛이 개운하다. 아비에게 뭘 원하는 게 아니고, 지나친 원칙주의로서 완벽하게 살려하지 말고 그때그때 기쁨이요 즐거운 쪽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라는 뜻이다. 과거의 상처로 인한 가슴속 쓰레기는 태워버리고 고향을 찾아가는 듯 가볍게 산책하며 지내라는 주문이다.

 

는개(煙雨) 같은 비가 차창을 흐리게 하는 날이었다. 아침 8시 두 달에 한 번씩 들러 약을 지어오기 위해 서둘러 병원으로 가는데 길이 막혔다. 오후에 가면 날씨도 맑고 여유도 있고… 그럴 텐데 왜 이렇게 서두르는가. 조급증 환자 같이. 내가 나를 닦달하듯 자신을 나무라며 피곤하게 하는 것 같았다. 혹시 ‘선 동작, 후 휴식’ 같은 의식이나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명언 명구의 의식적 관습 때문은 아닐까 싶었다.

 

명주실보다 고운 봄비가 내리고 있는 날이었다. 좀 더 바보 같이 살 수는 없을까? 알아도 모른 척하며 뒷일은 신에게 맡기고-. 그때 생각나는 게 1973년 범우사에서 나온 박연구 씨의 『바보네 가게』라는 책이었다. ‘바보네 가게’라는 이름은 그 가게 주인댁에 바보가 있었기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인은 콩나물 같은 것은 이(利)를 보지 않고 다른 가게보다 훨씬 싸게 주어 버려 다른 물건도 싸게 받으려니 싶은 인상을 주어 날로 번성하고 있다고 했다.

 

고인이 된 김수환 추기경이 진지하게 말씀하실 때는 온 세상이 진실해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나는 추기경님이 가톨릭대학의 축제 마당에서 학생들의 청에 의해 노래를 부르시는데 찬송가가 아닌 가수 노사연의 ‘만남’을 부르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떤 경지를 넘나들며 자유스럽게 행동하시면서도 주된 뜻은 결코 잃지 않으신다는 느낌의 충격이었다. 그 뒤 그분이 그린 ‘바보’라는 자화상은 본인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12분 선종하셨을 때는 애도의 인파가 명동 주위를 둘러싸고 끝없이 돌아 장관을 이루었으며 한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고 『우리 곁에 왔던 성자』라는 책은 밝히고 있다. 추기경님 같은 바보 어른들이 우리나라에 몇 분만 더 계신다면 ‘이 나라가 지도자 복이 없다’는 말은 안 나올 것이다. 그런데 나부터 설익은 사람들이 폼 잡고 자기는 절대 바보가 아니라고 설치며 법대로 하겠다는 데 머리가 지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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