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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칼럼] 영덕의 꽃

1.

봄이 오면 꽃을 구경하러 다닌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인의 말처럼, 잠시 왔다 사라지는 찬란한 계절의 이름을 직접 불러줘야 할 것 같아서.

 

꽃들은 저마다 아름다움이 다르다. 바람에 고요히 흔들리는 목련에는 순백의 기품과 고고함이 있다. 벚꽃은 일시에 피어났다 비처럼 떨어지는 낙화(落花)가 아름답다. 산수유는 봄 햇살 맞으며 소풍 떠나는 아이 웃음을 떠올리게 하고, 개나리는 돌담 아래 미소 짓는 순박한 새악시 같다. 진달래, 배꽃, 철쭉, 등꽃, 연산홍은 또 어떤가. 이 땅의 길섶에 피어나는 이름 없는 들꽃조차 봄에는 모든 것이 눈부시다.

 

주말에 복사꽃을 만나러 갔다. 경상북도 영덕에서 ‘복사꽃 큰 잔치’가 열린다는 뉴스를 봤기 때문이다. 동해안에서 안동으로 넘어가는 34번 국도변의 복사꽃이 그렇게 곱다는 이야기였다. 황장재를 넘어 굽이치는 오십천 물길 옆에 수줍게 두근거리는 꽃의 향연이 펼쳐진다는 소식이었다.

 

두 시간 넘어 차를 몰았다. 하마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도착했다. 그런데 꽃이 벌써 다 떨어져버린 것 아닌가. 가지마다 연두색 어린잎이 무성히 돋아나고 있었다. 초봄부터 시작된 이상 고온 탓에 예년보다 개화가 훨씬 앞당겨졌다는 거다.

 

도로 가에 차를 세우고 복숭아 농장으로 들어갔다. 몇 송이 매달려있는 분홍 꽃잎을 손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아쉽고 서운했지만 또 다른 생각으로 마음을 달랬다. 다시 계절이 오면 꽃들은 어김없이 피어날 것이므로. 보지도 못한 채 져버린 꽃은 그때까지 기다림으로 내 가슴에 피어날 것이므로.

 

 

2.

돌아오는 길에 문득 융의 ‘꼬리를 무는 뱀’이 생각났다. 정신과 무의식의 관계를 통찰하여 인간 자아의 본질을 찾아내려 한 위대한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 서구 정신과학과 동양적 구원의 신비를 통합하려 일생을 바친 그의 사상 체계를 총괄하는 상징이, 자기 꼬리에서 시작되어 다시 꼬리를 무는 원형(圓形)의 우로보로스 뱀이다.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곧 끝이라는 뜻이다. 안과 바깥, 삶과 죽음, 전체와 일부는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순환한다는 말이다.

 

그의 관점을 빌리자면 이렇게 덧없이 사라지는 꽃의 아름다움은 반드시 다시 태어날 꽃들의 출발점이다. 자연 속에 순환하는 원(圓)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근원이 시작되는 그 자리가 거꾸로 돌아가야 할 마지막 비밀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융은 늘 말했다. 존재가 진정 빛나는 자리는 자기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를 듣는 데서 시작된다고. 떨어진 꽃을 보고 돌아오는 내 마음이 이렇게 화답한다.

 

“나무는 꽃을 피워 아름다움을 보여주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기가 뿌리 내린 대지의 바람과 햇빛을 사랑할 뿐이지요. 스스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몸을 맡길 뿐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꽃이 핍니다. 개나리의 소리가 개나리꽃을 피우고, 매화의 소리가 매화꽃을 피우고, 벚나무의 소리가 벚꽃을 피웁니다. 복사꽃, 진달래, 배꽃, 동백, 철쭉, 연산홍들도 그렇게 소리를 피우지요. 꽃들은 바로 생명의 소리 자체인 것입니다”

 

 

3.

꽃은 사라져도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내 인생의 길모퉁이를 돌아서 가버렸다 해도 그가 없어진 게 아닌 것처럼. 꽃이든 사람이든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다시 누군가의 안에 싹으로 심겨진다. 시간이 지나 봄이 오면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차를 몰고 돌아오는 시간 내내 나를 찾아온 인연들을 생각했다. 떠나간 만남들을 떠올렸다. 울고 웃으며 한 시절을 통과했던 그들이 내 인생을 만든 원천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므로 나는 내년 봄에도 영덕으로 꽃구경을 갈 것이다. 하늘 빛깔을 보고, 바람의 흐름을 만질 것이다. 그리고 꿈을 꿀 것이다. 나의 존재의 나무에서 태어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그 연푸른 잎이 마침내 영원한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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