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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중요한 것은 얽히고설키는 관계이다

115. 리턴 투 서울 - 데이비 추

 

캄보디아계 프랑스 감독 데이비 추가 만든 ‘리턴 투 서울’은 의도한 건지 오해한 건지, 서울과 한국이라는 공간 그리고 거기에 얽힌 시간을 굴절시킨다. 마치 깨진 거울로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을 보는 느낌을 준다.

 

데이비 추는 코끼리 엉덩이를 만지듯 한국의 일상을 담아낸다. 시작부터 김추자의 ‘꽃잎’ 같은 노래를 흘린다. 영화 내내 김추자나 신중현 같은 한국의 올드 팝이 사용된다. 영화 전체적으로는 다소 뜬금없거나 지나치게 감독 개인 취향으로 보인다. 데이비 추는 자신 스스로가 인상 깊었던, 자신이 알고 있는 내에서만 한국의 공간을 그려내는데, 그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보다 정확하게는 맞지 않지만 맞지 않지만은 않다.

 

아마 사람들 눈에 비친 이방인의 삶은 일정 부분 그렇게 왜곡될 것이다. 이국적이고 이색적일 수 있다. 칸 영화제가 이 작품 ‘리턴 투 서울’을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올려놓은 것은 그 때문일 수 있다.

 

 

‘리턴 투 서울’은 갓난 아기 때 프랑스로 입양된 프레디라는 여성(박지민)이 한국에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엄마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인 척 꼭 그것만은 아니다)다. 어쨌든 프레디는 25살에 2주 일정으로 서울에 왔다가(원래는 도쿄로 가려 했으나 비행기 사정으로) 뜻하지 않게 한국의 입양시설인 ‘하몬드’에서 생부가 사는 곳이 군산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친아버지는 그녀를 보고 싶어 한다. 그녀는 친구인 테나(구카 한)와 군산에 가서 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고모를 만나고 서울로 돌아온다. 첫 ‘리턴 투 서울’이다.

 

복잡한 심경인 프레디는 막무가내로 문자를 보내는 생부 때문이기도 하지만 뭔가를 정리할 요량으로 다시 군산에 가서 사흘을 머무른다. 아버지와 할머니는 끝없이 그녀를 불편하게 만든다.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자신과 살자고 한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와 식구들에게 자신은 프랑스인임을 강조한다. 사흘 후 그녀는 서울로 돌아 온다. 두 번째 리턴 투 서울이다.

 

이후 5년이 흐르고 파리로 돌아갔던 그녀는 서울로 출장을 온다. 이것이 세 번째 리턴 투 서울. 이 남자 저 남자와 스스럼 없이 섹스를 즐기는 프레디는 즉석 만남으로 ‘늙다리’ 유럽 남자 안드레(루이스 도 데 렌쿠에사잉)를 선택한다. 안드레는 무기상이다. 이 인연으로 프레디는 국제무기회사의 로비스트로 일하게 된다.

 

 

2년 후 프레디는 애인인 막심(요안 짐머)과 다시 서울에 온다. 네 번째 리턴 투 서울이다. 그녀는 조금 성숙해진 태도로 서울에 온 아버지를 만난다. 이제 아버지도 술을 줄이고 마구잡이로 그녀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번엔 그녀를 빨리 보내 버리려 한다. 아버지의 마음이 또 변한 것처럼 느껴진다.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막심에게 이렇게 말한다. “언제든지 난 널 지워 버릴 수 있어.” 근데 그건 무기상인 안드레가 언젠가 그녀에게 한 말과 묘하게 겹치는 느낌을 준다. 무기상이란 직업에 대해 안드레는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건 무기가 아냐. 얽히고설킨 관계이지.”

 

프레디는 입양 주선기관인 하몬드의 도움으로 전주에 있는 생모를 만난다. 엄마와 만날 때 프레디는 처음으로 울먹인다. 둘 사이에 대화는 보여지지 않는다. 프레디는 서울로 돌아갔다가(다섯 번째 리턴) 프랑스로 아예 돌아간다. 동유럽의 한 시골 마을을 여행하던 그녀는 엄마에게 서툰 한국말로 이메일을 보내지만 이메일은 반송된다. 그녀는 호텔 로비에 있는 피아노를 살짝 두드리는데 언제가 아버지가 자신이 만들었다며 소개해 준 곡인 것처럼 들린다.

 

문제는 프레디가 아니라 그리고 프레디로 보여 주려는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얽히고설킨 관계일 수 있다. 영화는 수차례나 프레디를 서울로 돌려보내면서 그녀가 변하거나 성장하거나(실제로 프레디는 25살에서 32살의 여성이 된다) 세상이 바뀌고 그 관계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영화는 입양아의 생부 혹은 생모 찾기 프로젝트를 다룬 영화가 아니라 한 여성의 자아 찾기, 성장기, 내면의 성찰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래서 언뜻 여행을 많이 하지만 그게 궁극적으로는 자신 안으로의 여행이기 때문에 가이드가 있는 것처럼 친절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영화가 종종 기이한 느낌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이다.

 

‘지금 한국에는 저런 공간이 메인이 아냐’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한 것도 한국이나 서울의 공간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내는 것이 이 감독에게는 하등의 중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생부의 다소 무지해 보이는 삶, 그런 태도 등을 가리켜 지나치게 한국인의 특정 부분(정이니 한이니 하는 것)만을 부각한 것이라는 비판도 의미가 없다. 진짜로 어색한 것은 대대로 어부 집안이었다는 아버지가 피아노곡을 직접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것도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기가 아니라 얽히고설키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리턴 투 서울’은 현실의 비현실성, 비현실의 현실성을 가득 담아내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종종 진짜 현실을 판타지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담아낸다. 곧 ‘현실의 비현실성’이다.

 

또 영화는 종종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 이야기가 단지 영화일 뿐이라는 그 비현실이 사실 현실 속에서 실제로 무수하게 벌어지고 심지어 반복된다는 점을 불현듯 깨닫게 만든다. 곧 ‘비현실의 현실성’이다. 영화 ‘리턴 투 서울’은 이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느낌을 교차, 교직시키고 더 나아가 변증(辯證)시키며 삶의 본질에 대한 자각과 성찰을 증폭시킨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자신 스스로 영화 주인공인 프레디처럼 한 뼘 더 성장했음을 느끼게 해 준다. 이 영화의 매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 찾아진다.

 

 

영화에서는 두 개의 골목 신이 나오는데, 그게 프레디의 꿈인지 실제인지 불분명하게 처리된다. 프레디는 LP바에서 한바탕 춤을 춘 뒤 그곳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와 팔짱을 낀 채 골목길에 들어 선다. 그녀는 서울에 오자마자 만나 동침했던 동완이라는 남자아이(손승범)의 구애를 막 뿌리친 참이다. 새로운 섹스, 일탈, 그리하여 얻게 될 현실 도피의 달콤한 유혹에 들떠 걸어가던 프레디 앞에 아빠라는 작자가 나타난다. 그는 프레디에게 이런 인간이나 만나고 다니지 말라고 한다. 뒤에서는 친구인 테나가 아버지의 말을 통역해 준다.

 

골목은 어둡고 세 인물 혹은 네 인물(LP바 남자까지 포함해서)은 가로등 불빛 조명을 받아 어둠 속에서도 인물만 강조돼 그려진다. 마치 연극 무대에서 전체는 암전이 된 상태에서 인물들에게만 핀 조명이 떨어지는 효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건 분명히 데이비 추 감독이 의도한 디자인이다. 이때 프레디는 아빠를 거칠게 떠밀며 자신을 잡지 말라고 소리친다. 실제로 프레디가 아버지에게 그렇게 굴었을까 아니면 그건 꿈이거나 자신 내부의 목소리였을까.

 

또 하나의 골목 신은 막심에게 못된 말을 한 후(“난 널 언제든 지워 낼 수 있어”) 눈을 떠 보니 골목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프레디는 진짜 술에 취해 클럽의 후미진 골목길에서 잠이 든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버려져 있는 자신을 꿈속에서 내려다보는 것일까. 그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불친절하지만 중요한 것은 꿈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으며, 꿈이든 아니든 결론은 같다는 것이다. 어릴 때 버려졌던 그녀는 이제 그녀가 버리려고 애쓰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무기가 아니라 얽히고설키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불필요하게 징징대지 않아서 좋다. 오히려 프레디처럼 다소, 늘, 화가 나 있다. 프레디가 처음 진짜 가족을 만날 때도 근접 촬영이 아닌 롱숏으로 멀리서 보여 주는 기교도 좋았다. 구태의연하지 않으려는 그 태도가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턴 투 서울’은 꽤 불균질한 텍스트의 영화이다. 어떤 사람은 그 이색의 성향에 열광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예술적 치기를 폄하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새로움을 시도한 영화이다. 그것만으로도 평가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와 자격이 있다. 늘 그런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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