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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소] 일제 탄압 속 피어난 문화독립운동가…인천 중구 ‘미술사학자 고유섭 기념비‧생가 터’

3‧1 운동 당시 만세운동 동참…직접 태극기 그려 동네 아이들에 나눠
문학 관심 有…고교 시절 독립운동가 이길용 등과 ‘제물포’ 잡지 발행
탑‧불상 연구…고려 유물, 신라 공예미술, 고구려 고분 조선인 시각 분석

 

17. 일제 탄압 속 피어난 문화독립운동가…인천 중구 ‘미술사학자 고유섭 기념비‧생가 터’

 

인천이 낳은 문화독립운동가 ‘우현 고유섭’은 중구 용동이 품고 있는 일제강점기 역사의 상징이다.

 

인천 중구 용동 출신인 고유섭은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1905년 태어났다. 걷고 말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일제는 조선의 국권마저 강탈했고, 그는 6살의 나이에 조국을 잃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지만 고유섭은 민족정신이 강했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독립에 대한 그의 열망을 가장 잘 보여준다.

 

만세운동의 열기가 용동까지 닿았던 그때 고유섭은 막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를 졸업한 14세 학생이었다.

 

그는 하얀 천에 직접 태극기를 그려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준 뒤 만세운동에 동참했다. 용동 일대를 돌며 만세운동을 하던 중 일제에 체포돼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시절에는 경인기차통학생회 친목회 문예부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이길용 등과 ‘제물포’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문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그는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한 뒤 미술로 눈길을 돌렸다. 조선의 미술 작품이 일본인들에 의해 해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졸업 후에는 모교 미학연구실에서 조교로 일했고, 28세가 되던 1933년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취임해 15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전국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탑‧불상 등의 연구에 열을 올렸다. 또 수백 권에 이르는 규장각 도서 시문집에서 조선회화에 대한 기록을 모두 발췌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고려 유물, 신라 공예미술, 고구려 고분 등을 최초로 조선인 시각에서 분석해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다.

 

조선미술사를 저술하는 것이 평생의 꿈이던 고유섭은 1944년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간경화로 사망했다.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1년 앞둔 해였다.

 

 

그의 유해는 북한 개성 수철동에 묻혔고, 생가는 철거돼 현재 동인천길병원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용동 곳곳에는 그의 흔적이 가득 묻어있다.

 

인천시는 1999년 그의 생가 터 앞을 지나는 동인천역 대로를 ‘우현로’로 명명했다. 생가 터 앞 용동 큰우물 광장에 기념비도 세웠다.

 

매년 고유섭이 사망한 6월이 되면 이곳에서 추모제도 열린다. 2021년에는 생가 터 근처에 ‘우현문 갤러리’가 문을 열었는데,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곧 설립될 예정이다.

 

 

[ 경기신문 / 인천 = 박지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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