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27일 새벽,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례적으로 단 15분 만에 승인된 조선왕릉 등재 심의는 전 세계가 조선왕릉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조선왕조가 518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고, 27명의 왕과 왕비의 무덤 44기와 왕실 가족 무덤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역사적 가치다. 둘째, 유교, 풍수지리, 도교, 불교 등 다양한 한국의 전통 사상과 세계관이 반영된 독창적인 건축 양식과 장묘문화는 ‘신(神)의 정원’이라 불릴 만큼 고유의 미학적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셋째, 왕릉 조성의 근간이 된 기록물과 의궤 등 풍부한 자료가 보존된 것도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더했다.
조선은 1392년 7월 16일(음) 개국해 1910년 8월 29일 일제에 의해 문을 닫을 때까지 518년을 이어왔다. 조선왕릉은 9월 9일(음) 태조의 건원릉부터 1966년 2월 13일 순종의 계후인 순정효황후 윤씨가 남양주시 금곡동 유릉에 묻혔으니, 558년의 역사를 안고 있다.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견인차는 구리시
동구릉을 포함한 남한의 40기 조선왕릉이 2009년 6월 30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됨으로써 구리시는 세계유산을 보유한 시(市)가 되었다. 좋은 결과에는 항상 숨은 조력자가 있는 법이다.
2003년 구리시는 세계유산에 주목했다. 대상은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이었다. 당시 동구릉 우백호 지점에 있는 언덕에 골프연습장 인허가 문제로 시끌시끌했고, 동구릉과 구리시의 이미지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당시 민선 3기 이무성 시장(1942~2013)은 실추된 동구릉의 명예를 극복하고자 동구릉을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것을 결심했다. 2004년 9월 말 이를 발표하고, 문화예술과에 세계유산실무팀(TF)을 꾸렸다.
한 달 뒤인 10월 ‘동구릉 세계문화 유산등록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추진위는 전 국사편찬위원회 이성무 위원장과 구리시 이무성 시장이 공동위원장을, 위원은 구리시의회 최고병 의장,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이용규 부이사장, 건국대 김기덕 교수, 중앙대 박경하 교수, 한국체대 심승구 교수, 건국대 신봉룡 교수, (사)한국의재발견 강임산 사무국장, 구리문화원 김원태 사무국장 등 10명이다.
추진위 결성 이틀 전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유홍준 청장이 구리시를 방문해 이무성 시장과 간담회를 마치고 동구릉을 답사했다. 유 청장은 동구릉을 포함 조선왕릉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겠노라 공표했다.
이후 국가유산청은 2004년 학계와 조선왕릉이 소재한 자치단체 담당자 등으로 확대된 새로운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때부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본격적인 작업이 착수됐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위해 발 벗고 나선 구리시
구리시는 문화재청과 별도로 동구릉의 역사·문화적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동구릉 주변에 왕릉테마파크인 ‘조선왕조 역사공원’을 조성하기로 했으며 2004년 제1회 어가 행렬도 재현했다.
조선왕릉은 왕과 왕비의 장례 즉, 국장(國葬)이 관련한 큰 의례이다. 시는 애초 국장을 재현하려 했으나 좀 더 밝은 내용을 찾아 왕릉 행차인 어가(배릉) 행렬로 대체했다. 어가 행렬은 국내외 언론에서 큰 관심을 보였다.
세계문화유산에 대한 논의가 한창 일 때인 2006년 11월 구리시와 구리문화원은 ‘제1회 건원학술제’를 개최해 조선왕릉을 정치·예술·환경적인 측면에서 재조명했으며, 국내 최초로 동구릉의 왕릉 전체 신도비와 능표비의 탁본 전시회도 열었다.
구리시가 차근차근 세계유산을 준비하고 있을 때, 문화재청 유홍준 청장은 동구릉만으로 세계유산 등재는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판단하고, 18개 지역에 분산된 조선왕릉 40기 전체를 신청하기로 결정했다.
2006년 1월16일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고, 2006년부터 2007년 2년간 학술조사, 국제심포지엄을 개최에 이어, 2008년 1월31일 외교통상부를 거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WHC)에 세계유산 등재신청서를 공식 제출했고, WHC는 심사기구이자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전문가가 조선왕릉을 실사(2008년 9월 21~29일)했다.
ICOMOS는 2009년 1월 6일 국가유산청에 헌릉에서 주산을 완충지역에 포함하지 않은 이유, 서삼릉의 지형 및 경관 복원에 관한 추가 정보와 복원 일정 등에 대한 해명과 설명을 요청했고, 태릉 사격장과 선수촌 철거(사격장 2008년, 선수촌 2014년), 의릉 한국예술종합학교 철거(2012년), 서오릉 서쪽 건물 환경 개선(2012년) 등을 요구했으며, 한국정부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한편, ICOMOS는 조선왕릉이 탁월한 인류 보편적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임을 인정하고, 주변 동아시아 다른 지역과 비교 연구해 본 결과 신청 대상물을 연속 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최종 보고서를 WHC에 제출한다. ICOMOS는 관리라는 측면에서도 도시화로 몇몇 능(선릉, 헌릉, 의릉)의 경관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현재 강력한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돼 완충지역에서 개발행위를 금지하고 있음을 인지했다. 긍정적인 면이 더 부각됐다. 그리고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WHC 제33차 회의(6월 22일~30일)의 결과를 기다렸다.
◇유교문화권 타국 왕릉 비교에서 우위를 점하다
ICOMOS의 비교분석에도 조선왕릉은 다른 유교문화권 즉 중국·베트남·일본과 비교했을 때 독자성을 지니고 있음을 판단했다.
먼저, 중국 왕릉과 비교했을 때 조선왕릉이 갖는 가장 큰 차이점은 자연환경을 존중한다는 점과 중국 왕릉은 하나의 산과 평지를 인공적으로 조성하는 데 비해 조선왕릉은 그렇지 않으며, 더구나 중국에서는 더 이상 제례도 행해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을 했다.
일본 왕릉에 비해 조선왕릉은 더 길고 연속적인 역사를 자랑하는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3세기부터 7세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능침이 조성되기는 했지만 이후 왕릉은 눈에 띄게 규모가 작아지고 불교가 성행함에 따라 왕릉 대신 석탑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19세기 후반 이후 1945년까지 지배한 응우옌 왕조의 왕릉이 조선왕릉과 비교될 수 있지만 상당 부분 중국 왕릉을 닮은 점을 지적했다.
이처럼 조선왕릉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올A'에 가까운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리고 2009년 6월 27일 새벽 2시 29분 YTN뉴스 앵커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서울·경기·강원 등 수도권일대에 산재해 있는 조선왕릉 40기가 한꺼번에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600년 동안 온전히 보존돼 온 조선왕릉의 문화적 가치를 세계가 인정한 사건이다.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서 9번째로 당당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결국, 동구릉을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기 위한 한 구리시의 노력이 조선왕릉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탄생시킨 셈이 됐다.
17명의 왕과 왕비가 누운 우리나라 최대 왕릉군으로 가늠되는 동구릉을 보유하고 있다는 자긍심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눈을 돌린 구리시. 동구릉에서 남한의 18개 지역 40개 조선왕릉을 선택한 문화재청. 모두가 신의 한수였기에 등재신청부터 등재권고, 등재선언까지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조선왕릉 세계문화유산 등재 15년, 남은 과제 산적
동구릉을 포함한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지 15년이 지났다. 안으로는 제향의례를 원형으로 복원했고, 밖으로는 소실된 각 능의 수복방과 수라간, 재실 등 부속건물에 대한 복원을 마쳤다. 특히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의 대대적인 복원작업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럼에도 동구릉 입구에 1960~70년대까지 존재했던 외금천교와 건원릉 외택(외연지)은 반드시 복원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또한, 세계문화유산 위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식당 등 시설들이 경관을 해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지정관리지역을 정하고 관리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영국과 일본의 사례처럼 구리시에서는 역사자원과 도시계획을 체계적인 종합관리계획을 세워 정비해 나갈 필요가 있다.
문화재청과 정부 그리고 구리시와 경기도는 마음을 열고 많은 토론과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사진·자료제공 : 한철수 구지옛생활연구소장
[ 경기신문 = 신소형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