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력이 부족한 중소·벤처기업에게 '기술'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은행권의 기술신용대출 규모가 쪼그라들고 있다.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건전성 관리에 경고등이 켜졌고, 제도 변화로 기술 평가 기준이 엄격해진 영향이다. 은행들이 자본비율 관리에 고삐를 조이면서 앞으로 기술신용대출 시장이 더욱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0일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기준 은행권의 기술신용대출 잔액은 약 301조 7000억 원으로 1년 전(309조 1860억 원)보다 7조 691억 원(2.49%) 줄었다.
기술신용대출은 우수한 기술을 보유했으나 비교적 재무상태가 부실하거나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벤처기업에 자금을 조달하는 제도다. 기술신용평가기관이 발급한 평가서를 기반으로 등급에 따라 대출 한도와 금리가 우대된다.
지난해 말 304조 5000억 원을 기록했던 기술신용대출 잔액은 올해 3월 말 309조원까지 반등한 후 6개월 연속 하락하며 2021년 7월(300조 5187억 원)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기술신용대출의 공급 건수도 같은 기간 74만 4670건에서 68만 2857건으로 8.3%(6만 1813건) 줄었다. 은행이 대출해 준 기술의 가치를 나타내는 평가잔액 또한 지난 3월 말 234조 원에서 9월 말 228조 9000억 원으로 5조 원 넘게 감소했다.
이처럼 은행권의 기술금융 규모가 감소하는 것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기업대출의 연체율이 오르면서 생긴 건전성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8월 중소기업대출 연체율은 0.78%로 전년 동기(0.55%) 대비 0.23%포인트(p) 올랐다. 같은 기간 대기업대출의 연체율 증가 폭(0.08%p)의 3배 수준이다.
금융당국이 '기술금융 제도방안'을 시행하면서 엄격한 잣대가 적용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는 지난 7월부터 일반 병·의원, 소매업 등 비기술기업에 대해 기술평가를 의뢰하지 못하도록 하고, 기술신용평가의 품질심사평가 기준을 정량화하는 내용의 ‘기술금융 제도방안’을 시행했다. 이에 그간 은행들이 기술금융 실적에 반영해 왔던 닥터론과 비기술 기업대출이 제외되면서 잔액이 감소했다.
금융지주들이 밸류업(Value-up·기업가치 제고)에 나서면서 은행권의 위험가중자산(RWA) 관리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만큼, 앞으로 기술신용대출이 더욱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주요 은행들은 주주환원을 위해 보통주자본(CET1)비율을 13% 내외로 유지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RWA가 높아지면 CET1비율이 떨어지는 만큼, 은행 입장에서는 RWA가 낮은 우량대출을 확대하며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이 유리하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올 들어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은행들이 건전성 관리 차원에서 우량 기업 중심의 영업을 확대하고 있다"며 "가계대출보다 위험 가중치가 높은 기업대출, 특히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기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성장 잠재력을 가진 기술기업에 자금이 원활하게 공급될 수 있도록 은행들이 '손쉬운 리스크 관리'에서 벗어나 기술금융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 7일 중소기업과의 간담회에서 "최근 금융권 자금 흐름을 보면 손쉬운 가계대출과 부동산 금융은 확대되는 반면, 기업에 대한 생산적 금융은 위축되고 있다는 점에 깊은 우려를 느낀다”고 짚었다.
은행들도 기술금융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업은행은 김성태 행장이 취임 이후 꾸준히 '중소기업과의 상생' 의지를 강하게 보이면서 기술신용대출을 꾸준히 늘렸다. 그 결과 기술신용대출의 시장 점유율을 1년 새 3%p 확대했다.
KB국민은행도 자체적인 지적재산권(IP) 가치평가 활성화를 위해 예상 가치평가금액 제한(10억 원 이내)을 없애 IP 담보대출을 늘리고 있다. 은행 자체 기술평가 대상 지역도 수도권에서 전국으로 변경해 기술기업에 대한 신용공급을 활성화할 계획이다.
[ 경기신문 = 고현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