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벤처기업이 보유한 '기술'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은행권의 기술신용대출 규모가 1년 새 4조 원 이상 줄어들며 코로나19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불황이 깊어지면서 중소기업들이 겪는 어려움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만큼 은행들이 적극적으로 금융 지원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9일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기술신용대출 잔액은 305조 9000억 원으로 1년 전(310조 3000억 원)보다 4조 4000억 원 감소했다. 대출 건수도 74만 건에서 68만 8000건으로 줄어들었다. 잔액과 대출 건수 모두 2020년(270조 원, 68만 1994건) 이후 최저치다.
주요 은행의 감소세는 더욱 가팔랐다.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기술신용대출 잔액은 지난 1년간(2023년 11월~2024년 11월) 13조 6591억 원 줄었으며, 대출 건수도 6만 2583건 감소했다. 지난해 기업대출을 확대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영업에 나섰던 것과 상반되는 모습이다.
기술신용대출은 우수한 기술을 보유했으나 비교적 재무상태가 부실하거나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벤처기업에 자금을 조달하는 제도다. 기업의 재무능력 외에 기술력 평가를 30% 이상 반영해 심사하며, 기술신용평가기관이 발급한 평가서를 기반으로 등급에 따라 대출 한도와 금리가 우대된다.
하지만 기술력이 없는 기업까지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금융당국은 보다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고, 이는 은행권의 기술신용대출 감소로 이어졌다.
금융위는 지난해 7월 은행 본점에서 지점에 기술신용평가자를 임의 배정하게 해서 지점이 평가사에 대해 영향력을 갖지 못하도록 하고 일반 병의원, 소매업과 같은 비기술 기업에는 기술대출을 승인하지 못하도록 대상을 정비하는 내용의 ‘기술금융 제도방안’을 시행했다. 올해 1분기부터는 인공지능(AI) 평가체계까지 도입해 평가자의 관대한 평가를 차단한다.
중소기업의 연체율이 오르면서 은행들이 리스크 관리를 강화한 것도 일부 영향을 미쳤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말 기준 중소기업대출 연체율은 0.7%로 1년 새 0.15%포인트(p) 상승했다. 지난해 3분기 5대 은행의 1개월 이상 중소기업대출 신규 연체액은 3조 1621억 원으로 통계 작성 이후 분기 기준 최대치를 기록했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과거에는 기술 신용대출 건수를 늘리기 위해 기술력이 부족한 기업에도 대출을 내줬지만, 이제는 필요한 기업에만 대출을 제공하고 있다”면서 “이로 인해 대출 건수가 줄어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 침체가 길어지면서 중소기업들의 자금난이 심화되고 있는 만큼, 은행권이 금융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중소기업 500곳을 대상으로 ‘중소기업 금융 이용 및 애로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7.2%가 ‘올해 자금 사정이 악화했다’고 답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해 11월 "기업에 대한 생산적 금융이 위축되고 있어 깊은 우려를 느낀다"며 "담보, 보증에 의존하는 대신 여신심사 시스템 고도화 등을 통해 기술, 혁신성 등 기업의 미래를 고려한 대출이 확대되도록 유도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는 신년사에서도 “서민, 자영업자,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을 강화하고 민생침해 금융범죄에도 엄정히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기술금융 지원 대상을 늘려 규모를 키우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그동안 부적절하게 집행된 기술대출이 있었던 만큼, 이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실적이 줄어드는 것은 불가피하다”며 “새로운 산업이 많아지고 있어 (이를) 기술금융으로 포섭해 지원대상을 확대하는 부분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 경기신문 = 고현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