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9일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빌 클린턴, 조지 부시,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 도널드 트럼프 등 굴지의 정치인들이 모여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가난한 땅콩 농부이자 인도주의자, 전 해군 중위로 캐나다의 핵 재앙을 막고 미국 최고 권좌에 올랐던 카터는 이제 이 세상을 영원히 등졌다.
타임지는 평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은 ‘미국 최고의 전직 대통령’으로 카터를 평가했다. 국제 분쟁의 핵심 중재자이자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의 수호자인 카터는 1978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화해시킨 캠프 데이비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그는 해군에 입대할 당시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모든 것을 뒤로하고 가족의 땅콩 사업을 물려받기로 결심했다. 4남매의 장남이었던 그의 가장 큰 야망은 "농장에 도움이 되고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1976 미국 대통령이라는 큰 왕관을 쓸 운명이었다. 리처드 닉슨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미국 정치가 소용돌이 칠 때 그는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이때 카터는 조지아 주 상원의원을 지냈지만 미국 정계에는 거의 무명이었다. 그런 그가 거물급 정치인 제럴드 포드를 100만 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아웃사이더 정치인이었다. 선배 대통령들과는 달리 취임식 날 워싱턴을 자동차로 통과하지 않고 걸어서 왔다. 주간지 뉴스위크의 워싱턴 지국장을 지낸 멜 엘핀은 “카터는 대통령이 보여줘야 할 겸손함을 잘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집권 후 카터는 에너지부와 교육부를 신설하고 행정과 세제를 개혁했고, 교통 부문의 규제를 완화하고 국립공원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高실업률과 高인플레이션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재임 선거에서 그는 로널드 레이건 토네이도에 휩쓸려 무참히 무너졌다.
그 후 카터는 고향인 조지아주 플레인스로 돌아가 ‘원치 않는 새로운, 잠재적으로 공허한 삶’을 살았다. 그는 에모리 대학교에서 강의하고 회고록을 집필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조용한 은퇴 생활을 하기에 아직 젊었다. 1982년 그는 아내 로절린과 함께 카터센터를 설립해 평화와 질병 퇴치, 그리고 희망을 구축하기 위한 일을 시작했다. 그의 재단은 베네수엘라, 나이지리아, 중국 등 약 40개의 선거를 감독했다. 평화의 옹호자인 카터는 1989년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에서 대표단을 이끌고 여러 차례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다. 1994년에는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핵개발을 진정시켰고, 아이티를 방문해 군부가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설득했다. 2002년에는 쿠바를 방문한 최초의 전직 미국 국가 원수로 워싱턴과 아바나 간의 화해를 촉구하는 연설을 진행했다.
많은 사람은 그의 치적에 갈채를 보냈고 2002년 10월 노벨평화위원회는 급기야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다. 카터는 백악관을 떠난 후 진정한 자기만의 브랜드를 개발하고 인류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대통령 재임 4년을 훨씬 뛰어넘고도 남았다. 카터의 이런 눈부신 업적은 “우리는 항상 우리 아이들의 삶이 우리 자신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확신을 잃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상계엄으로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윤석열 대통령은 과연 이런 고민을 한 순간이라도 하고 사는지 묻고 싶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처럼 숨어서 나라를 난장판으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왜 철학적 사유가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되는 씁쓸한 신년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