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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 배다리 건설의 최적지로 왜 노들나루를 택했을까?

 

정조는 1789년 7월 11일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의 읍치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13일에는 수원의 새읍치를 팔달산 밑으로 정했고, 10월 5일에 영우원을 수원의 옛읍치로 옮기고는 이름도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었다. 정조가 현륭원으로 행차하는 여러 가지 규정을 담은 '원행정례(園行定例)'의 편찬을 명한 것은 9월 18일이다. 이때 한강을 건너는 방법으로 배다리(舟橋)의 건설도 결정했다. 정조는 1790년부터 사망하는 1800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현륭원 참배를 실천했다.

 

임금의 행차는 늘 경호 문제가 따라다니기 때문에 대규모일 수밖에 없고, 한강처럼 큰 강을 신속하게 건너는데 배를 타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사고 위험도 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무덤을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옮길 때 뚝섬나루에서 뜬다리(浮橋)를 임시로 만들어 건넜다. 전쟁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면 몇천, 몇만, 몇십만의 군대가 뜬다리 또는 배다리를 만들어 강을 건넌 사례를 세계 여기저기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는 의미다.

 

정조의 현륭원 행차는 매년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배다리를 그때그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나루를 선택하여 똑같은 모습으로 만들면 됐다. 그런데 서울 도성의 남쪽에는 한강을 건너는 나루가 아주 많았다. 유명한 것만 따져도 서쪽부터 양화나루(楊花渡), 서강나루(西江津), 삼개나루(麻浦津), 용산나루(龍山津), 노들나루(露梁津), 동재기나루(銅雀津), 서빙고나루(西氷庫津), 한강나루(漢江津), 두뭇개나루(豆毛浦津), 뚝섬나루(纛島津), 삼밭나루(三田渡), 송파나루(松坡津), 광나루(廣津) 등이 있었다. 이중 서울-수원을 오가는 사람들이 이용한 최단코스의 길에 있는 나루는 동재기나루였는데, 왜 정조는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舟橋) 건설의 최적 장소로 노들나루를 선택한 것일까?

 

배다리 건설 관련 내용을 체계적으로 담은 정조의 '주교지남(舟橋指南)'은 두뭇개나루(東湖), 서빙고나루(氷湖)의 장단점을 제시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두뭇개나루는 물의 흐름이 잔잔하고 양쪽의 강가가 모두 높은 장점이 있지만 강폭이 넓고 너무 우회하는 단점이 있다고 했다. 서빙고나루는 강폭이 좁은 장점이 있지만 남쪽의 강가가 낮은 모래사장이어서 밀물 때나 큰비에 물이 갑자기 불어나면 강폭이 넓어져 배다리를 연장해서 놓거나 부두(船槍)를 새로 증축해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는 것이다.

 

노들나루는 물의 흐름이 잔잔하고 깊으며 양쪽으로 언덕이 마주 대하고 있어 물이 갑자기 불어나 강폭이 넓어질 일이 없고, 강폭도 뚝섬이나 서빙고나루에 비해 ⅓밖에 안 되어 건설비용도 상당히 절감할 수 있는 이점까지 있다고 기록했다. 최단코스의 동재기나루에 비해 돌아가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두뭇개나루에 비하면 우회하는 거리가 짧다.

 

신기하게도 서울의 도성에서 현륭원을 오가는 최단코스의 동재기나루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왜일까?. 동재기나루는 국립서울현충원의 한강가에 있었는데, 북쪽의 물가는 엄청 넓은 모래사장이어서 밀물 때나 큰비가 내려 갑자기 물이 불어나면 강폭이 넓어지는 문제가 서빙고나루보다도 더 크게 발생한다. 그래서 '주교지남'에서는 비교의 대상으로도 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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