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 연휴,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가을 풍경을 만끽하러 해외로 떠난 사람들이야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국내에 머문 사람들은 황금 휴가를 지리 하게 보내야 했다. 몇 년 전 의왕으로 이사 온 이래 학의천의 징검다리가 물속에 잠긴 걸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올해는 넘실거리는 물로 돌다리를 한 번도 건너지 못했다. 콸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청계천 길을 걷노라면 베네치아가 자연스레 연상되며 들뜬 기분도 든다. 그러다 문득 ‘이 비로 올 가을 농사는 무사할까? 배추밭이 누렇게 주저앉을 텐데’라는 걱정이 앞선다. 어린시절 장마로 배추밭이 누렇게 주저앉으면 이웃집 농부들이 탄식하던 걸 자주 봤다. ‘하느님 그만 비를 멈추시고 쨍쨍한 햇살을 비추소서. 가을 곡식을 잘 야물게 하소서.’
근엄해지던 찰나 지구촌 저편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알바(Alba) 지역에서 진귀한 하이트 트러플을 수확했다는 뉴스다. 은은한 향이 특징인 이 희귀한 버섯은 마늘 향과 단맛이 깃들어 있다. 식품 중 가장 비싼 이 버섯의 가격은 가히 천문학적이다. 지난 경매에서 낙찰된 가격은 850g에 7만 5천유로(1억 2500만 원)였다.
피에몬테(알바 랑게, 로에로, 몬페라토, 몬레갈레세) 전역에서 야생으로 자라기 때문에 피에몬테 송로버섯이라고도 불리는 이 버섯은 지난 11일부터 열린 박람회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 박람회는 가을바람이 랑게의 포도밭을 부드럽게 스치며 햇살이 나뭇잎을 황금빛의 만화경으로 물들일 때, 마법의 시간을 수놓는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십만 명의 방문객이 이 도시를 세계 미식의 수도로 변모시키기 때문이다.
‘깊은 존중(Profondo Rispetto)’이라는 슬로건 아래 9주간 펼쳐지는 이 행사는 전설적인 화이트 트러플을 기리는 동시에 미식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피에몬테 언덕에서 자생하는 화이트 트러플은 뿌리를 존중하며 미래로 나아가는 강력한 상징이다. 이 박람회는 지역 경제의 핵심 동력인 수억 유로의 매출을 창출한다. 이는 지역의 전략적 기둥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 행사의 진정한 정수는 자선이다. 전 세계의 자선가, 미슐랭 스타 셰프, 미식가들이 기부하는 천문학적 금액은 100% 모두 자선 단체에 기부된다. 위성 생중계를 통해 경매장은 홍콩, 싱가포르, 두바이, 뉴욕 등의 대도시로 뻗어나가 이들 도시에서도 경매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 경쟁은 가격을 천정부지로 치솟게 하고 행사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인다. 세계 3대 진미인 하이트 트러플은 이처럼 연대의 대사가 되어 궁극의 사치 행위를 멋진 관대함의 제스처로 탈바꿈시킨다.
피에몬테 지방정부는 트러플을 단순한 진미가 아닌 피에몬테의 정체성, 노동, 전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노력은 ‘메이드 인 피에몬테’의 우수성을 가장 잘 상징하는 이 제품의 품질, 지속 가능성, 독창성을 홍보하는 데서 간파할 수 있다. 박람회를 통해 그들의 보물이 한 지역을 어떻게 세계무대에 위치시키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달성시키는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지자체들도 가을이면 온갖 축제의 장을 연다. 그러나 그 지역만의 정체성이나 독창성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메이드 인 피에몬테’처럼 지역의 국내외 위상을 드높이고 활성화시키려면 그 지역만의 전통과 문화적 깊이가 어우러진 오리지널 사업을 발전시켜야 한다. 영혼 없이 이웃 지자체를 그대로 카피만 해서는 절대 지속 가능한 사회를 이룰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