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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사잇길을 걷다] ③ 하늘을 찌르는 의병의 기상, 13도창의군탑(왕산 허위)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망우리위원회)는 2017년 교보생명의 후원으로 중고생 대상의 망우역사문화공원 퀴즈 프로그램 ‘도전! 러닝맨(Learning Man)’을 시작했다. 미래 세대 청소년들에게 애국지사 등의 묘를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청소년의 가슴에 나라 사랑의 나무를 심는다는 보람과 세계 최초, 유일의 묘역 퀴즈 프로그램이 아닐까 하는 자부심으로 성황리에 몇 년 동안 진행했다. 그 행사의 본부가 13도 창의군 탑이 우뚝 서 있는 저류조 공원이었다. 지금은 망우역사문화공원 제 3주차장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2018년 8월 15일 광복절, 그날은 폭염으로 인해 묘역을 돌지 않고 13도 창의군 탑 앞의 게이트볼장을 빌려 골든벨 형식으로 진행했다. 행사 종반에 13도창의군탑에 꽃을 바치고 참배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에 노년의 여성 세 명이 눈에 띄었다.


마침, 일행 중에 망우역사문화계승협회 이사장 김진만 선생이 있었다. 망우동 주민 김진만 선생은 오래전부터 망우리공원을 항일애국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운동을 주도하며 무궁화 심기나 애국지사 묘역 참배를 꾸준히 해온 분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 여기 참배 오셨나요? 이 여성분들은?”


“아, 이분들은 왕산 허위 선생의 외손녀분들입니다. 러시아에서 오셔서 이번에 함께 꽃을 바치러 왔습니다.”


매일일보 8월 17일의 기사를 확인하니 그분들은 외손녀 최나딸리야, 전따마라와 친구 김나딸리야라고 한다.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최나딸리야 씨는 허위의 장손녀 허로자의 조카라고 하니, 허위의 증 외손녀인 듯하다. 


“아, 반갑습니다. 허위 선생의 후손을 이렇게 직접 뵙다니 영광입니다. 여기 학생들이 광복절 기념으로 망우리 애국지사 문제를 푸는 행사를 하고 있는데요, 괜찮으시다면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딸리야 씨는 한국말을 잘 못한다고 하시며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허위 선생 가족이 만주로 이주하고 다시 연해주(블라디보스톡)로, 또다시 스탈린에 의해 가족이 강제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으로 분산 이주되며 큰 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전하고, 오늘 광복절 행사에 참석한 학생들을 보니 눈물이 난다며 말을 맺었다.


학생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평소라면 13도창의군탑 이야기가 학생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겠지만, 허위의 유족을 만났다는 사실에 그날의 기억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13도창의군탑(十三道倡義軍塔). 1907년 정미년 당시 전국은 13도였다. 창의(倡義)는 의병을 일으킴이라는 뜻이다.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 13도창의군을 기리는 탑이다. 동아일보가 1991년 8월 15일 세웠고 높이는 15m. 탑의 설계자는 김영중 조각가. 비문은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한림대 최영희 교수가 지었고 서예가 박원규가 썼다. 탑 앞에 설치되어 있는 비석의 글을 읽어본다. 현장을 찾아와 비문을 읽는 것만치 좋은 교육이 없다.


”이 탑은 구한말인 1907년 11월 전국의 13도에서 모인 의병들이 일제 침략의 본거지가 있는 서울을 탈환하여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경기도 양주에 집결, 동대문에서 30여 리 떨어진 이곳 망우리 일대에서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1년 8월 14일 동아일보사가 건립하였다. 당시 48진 1만여 명에 이르는 의병은 13도 창의대진소를 설립하고 총대장에 이인영을, 군사장에게 허위를 추대하였다. 다음 해 1월 허위는 3백 명의 선봉 결사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격하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후속 부대의 도착이 늦어 중과부적으로 퇴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허위는 임진강을 근거지로 서울을 공격하였으며 전국적으로 의병 전쟁이 더욱 치열해졌었다, 이곳은 비록 서울을 탈환하지는 못하였으나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려는 연합 의병들의 고귀한 뜻이 깊이 숨 쉬고 있는 곳이다.”


다른 사료를 찾아봐도 정확한 지명 없이 ‘동대문 밖 30리’라고만 적혀 있다. 1907년 12월 22일 매일신보에 “망우리 풍진(風塵). 재작일(그제)에 동문 밖 망우리 등지에서 일 순사 사십여 명과 순검 십여 명이 의병과 접전하였다더라”라는 기사가 망우리 추정을 뒷받침한다.

 

한편 구리시는 수택동을 전투의 장소로 추정하여 2020년 장자못공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등지(等地)’라고 했으니 실제 그곳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은 있지만, 탑을 세울 장소로는 동대문 쪽 시내가 바라보이는 지금의 장소가 가장 적절하다.

 


이때의 전투에서 허위 휘하의 의병장 김규식(1882~1931)이 탄환을 맞고 부상했다. 구지면(구리시) 사노리 출신으로,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의 장교였다. 허위 사후에도 투쟁을 펼치다 나라가 망한 후에 만주로 망명했다. 청산리 전투에 대대장으로 참여했고 대한독립군단과 고려혁명군 총사령관을 지냈다. 


이후 1월 28일 여주 출신의 총대장 이인영(1867~1909)이 부친상으로 급거 귀향하는 바람에 군사장 허위(1855~1908)가 13도창의군을 이끌었다. 총대장 이인영의 귀향은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당시의 윤리관이 그랬다. 왕이 내린 벼슬을 거절할 때는 부모의 병환이나 상중(喪中)임을 이유로 들었다. 


이후 허위는 임진강, 한탄강 지역에서 다시 진격을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헌병대에서 심문을 받고 재판을 거쳐 1908년 10월 21일 서대문형무소(경성감옥) 제1호 사형수로 순국하였다. 이인영 또한 체포되어 1909년 9월 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허위에게 건국훈장 최고의 대한민국장을, 이인영에게는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탑의 위쪽 면을 바라보면 검은 바탕에 흰색의 꽃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허위가 받은 영예로운 대한민국장이다.


또, 서울시는 1966년 허위의 호 왕산(旺山)을 따서 청량리 로터리에서 동대문까지를 왕산로라고 지었다. 2010년부터 도로명 주소 개편으로 시조사 삼거리에서 신설동 오거리까지를 가리킨다. 이순신(충무로), 이황(퇴계로), 을지문덕(을지로)과 동급의 위인으로 기리고 있다.


왕산은 고위 관료(의정부 참찬, 비서원승) 출신으로는 드물게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이며, 왕산의 가문은 3대에 걸쳐 14명이나 애국지사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의 명문가다.


왕산의 장남 허학을 비롯한 친·외가 유족은 서간도로 망명하고 그 후 다시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허학의 가족은 다시 연해주로 갔다가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겨져 황무지를 개척하며 살았다. 허학의 딸, 즉 왕산의 손녀 허로자 씨는 2006년 10월 정부의 초청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았고 2011년 귀화, 2021년 95세로 별세하여 구미시 공설 숭조당에 안장되었다. 

 


13도창의군은 왜 중요할까? 1919년의 3.1운동은 온 겨레가 떨쳐 일어난 비무장 독립운동이었으며, 1907년의 13도창의군은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이 연합체를 결성하여 일으킨, 나라 멸망 전의 마지막 무장 독립투쟁이었다. 그 후로 많은 의병은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탈출하여 독립투쟁을 계속 펼쳤으니 13도창의군은 8.15 광복 때까지 해외에서 끊임없이 이어진 독립전쟁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연합 의병의 거사를 기리는 13도창의군탑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물임에도 불구하고 탑의 주변은 족구장 등으로 어지럽다. 지자체의 역할은 보훈시설의 관리에 한하지 않고 널리 알리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 일대를 의병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이 마땅하다.


13도창의군탑을 바라보라. 망우리고개에 집결하여 저 멀리 동대문 쪽을 바라보던 의병들의 독립을 향한 기상이 푸른 하늘을 찌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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