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꿈이 뭐냐”라고 물었다. 나는 과학자라고 대답했다. 다른 아이들도 과학자, 발명가, 우주비행사, 심지어는 대통령 등등… 선생님은 이번에는 공부 좀 한다는 녀석에게 다가가 “꿈이 뭐냐”라고 물었다. 공부깨나 하는 녀석의 대답이다. “이것저것 하다가 안 되면 선생질이나 해야죠 뭐” 그날 그 녀석은 엉금엉금 기어서 집에 갔다.
시인이네, 책이네, 공부네 하면 별 흥미가 없는 사회 분위기라서 유머라도 한 토막하고 넘어가고자 써본 글발이다.
이희승 씨는 '독서와 인생'이란 글에서 우리나라 사람은 일반적으로 책에 관심이 적은 것 같다. 학교 다닐 때는 시험 때문이랄까, 울며 겨자 먹기로 교과서를 파고들지만, 일단 졸업이란 영예의 관문을 돌파한 다음에는 대개 책과는 인연이 멀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옛말에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서 가시가 돋친다. (一日不讀書 口中生刺)!라는 말이 있지만, 오늘날은 하루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문제 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존 경쟁이 극심한 마당에서는 하루만큼 낙오가 되어, 열패자(劣敗者)의 고배(苦杯)와 비운을 맛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까지 했다.
평론가가 최선 최고의 리더십이라고 평하는 퇴계의 '퇴계처럼'이란 책을 보면, 퇴계는 아들 준에게 ‘선비에게 있어 가난함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떳떳함이라고 하면서 ‘한유(寒儒)’라는 말을 즐겨 썼다고 한다. 더불어 산은 깊을수록 좋으며 글씨는 맛이 있어야 하고 사람은 가난한 데서 낙(樂)이 있다.’라며 가난을 선비의 당연한 삶으로 받아들였다.
퇴계는 맏손자 이 안도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그리고 아낀 만큼 교육도 철저히 시켰다. 주로 편지를 통해서였다. 맏손자에게 생애 총 153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주로 퇴계가 55세(안도 15세)로 접어들면서 시작되어 70세(안도3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16년 동안 이루어졌다. 편지에서는 일상의 안부를 묻고 전하는가 하면, 공부에 임하는 자세나 선비가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을 세세하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김규동 시인은 2011년 3월 25일 '나는 시인이다'는 시집을 냈다.
시인은 1925년 2원 13일 함경북도 종성에서 출생하여, 1944년 경성고보를 거쳐 1947년 연변의대를 수료하고 평양종합대학을 다니다 1948년 월남했다. 고향땅을 떠나 평생 분단의 상처를 안고 서울 흑석동 산꼭대기 판잣집에 살다가 1·4 후퇴 때 피난길에 나섰는데 적지 않은 책 가운데 100여 권의 책을 묶어 이것을 등에 지고 길을 나섰다고 한다. 그리고 노량진 시장가를 지나려는데 웬 지게꾼이 달려들어 이 무거운 짐을 선뜻 지고 앞장서 노량진역까지 뛰다시피 해서 무거운 책을 져다 주었다고 한다. 그는 고생 끝에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고 부산에서 3년 동안 피난살이 하는 동안 아저씨가 져다준 책들을 정신 차려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책을 들 때마다 지게꾼 아저씨의 초상이 떠올랐다고 했다.
6·25 전쟁 통에 피난을 가면서 우선 급히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챙기는데 시인은 책만 100여 권을 등에 지고 나섰다. 그에게는 책이 곧 인간이고, 생명이었기에. 그렇다. 서두의 유머에서 학생이 선생질이란 말만 안 했어도 맞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선생질이란 말은 있어도, 시인질이나 소설가질이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하하하! 크게 한번 웃어뵬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