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이 도성을 나간 숭례문은 오랫동안 국가지정문화유산 국보 1호였다. 여기서 1호가 국보의 관리 번호일 뿐임에도 가치가 제일 높다는 의미로 읽히면서 여기저기서 문제제기가 많았다. 이에 시달리던 국가유산청은 국보에 붙인 번호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국보다.
1394년 8월 24일 개성에서 서울로의 천도를 결정했고, 9월 1일에 새수도궁궐조성특별위원회(新都宮闕造成都監)를 설치했으며, 9월 9일에 정도전이 궁궐과 종묘를 포함하여 새수도의 도시계획도를 그려 바쳤다. 이때 4대문과 4소문의 위치도 정했을 것인데, 1396년 9월 24일에 여러 성문을 완성한 후 남쪽의 대문을 ‘숭례문’이라 명명했다. 여기서 남쪽의 기준은 정궁인 경복궁인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남대문인 숭례문과 정궁인 경복궁을 잇는 직선의 대로를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런데 1394년의 도시계획도에는 그렇게 그려져 있지 않았다.
성 밖에서 숭례문을 통과한 후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길은 서울역-숭례문-서울시청-세종대로사거리-광화문을 잇는 왕복 8차선의 세종대로다. 비록 직선은 아니지만 숭례문에서 경복궁의 광화문을 잇는 최단코스의 길이다. 그런데 세종대로 중 숭례문-서울시청-세종대로사거리 구간은 조선에서는 없었고,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새로 만든 길이다. 1394년의 도시계획도에 그린 남북대로는 숭례문에서 활처럼 휘면서 종각까지 이어진 지금의 남대문로다.
숭례문과 광화문을 직선으로 이으면 거의 정북에 가까운데, 숭례문의 출입문 방향은 동북-서남이다. 왜 이런 방향을 취했을까? 정답은 이거다. ‘숭례문을 들어서도 경복궁을 쳐다보지 마라!’ 숭례문을 지나 활처럼 휘는 남대문로를 따라 종각까지 갔다가 서쪽으로 꺾어서 세종대로사거리에 이르러 북쪽을 바라봐야 임금이 사는 경복궁과 광화문을 처음으로 볼 수 있다. 전통시대 어느 수도에도 이런 간선도로망은 없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간선도로망이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은 세종대로사거리에서 바라본 경복궁의 풍경에 있다.
조선 후기 가장 오랫동안 정궁의 역할을 했던 창덕궁의 진입로인 돈화문로에서 바라본 풍경은 하늘-보현봉-창덕궁(돈화문)의 거대하고 웅장한 3단계 풍경이다. 조선 전기 정궁의 역할을 했던 궁궐은 정도전이 풍수의 원리에 따라 명당의 위치를 잡아 1395년에 만든 경복궁이고, 그 뒤에는 풍수의 주산과 조산인 북악산(342m)과 보현봉(714m)이 우뚝 솟아 있다. 그래서 세종대로사거리에서 바라보면 하늘-북악산·보현봉-경복궁(광화문)의 3단계 풍경이 거대하고 웅장하다.
그런데 돈화문로에서 경험했듯이 광화문에서 멀어질수록 북악산·보현봉의 모습은 커지고 경복궁(광화문)은 작아지는데, 세종대로사거리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와서 보면 경복궁(광화문)의 크기가 너무 작다. 그래서 정도전은 하늘-북악산·보현봉-경복궁(광화문)의 3단계 풍경을 세종대로사거리에서 처음 볼 수 있도록 남북대로를 숭례문에서 종각 뱡향으로 활처럼 휘도록 계획했다. 숭례문의 방향도 문을 들어선 사람이 시선을 경복궁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동북-서남으로 정했다. ‘경복궁을 쳐다보지 마라’ 이것이 숭례문의 방향에 구현된 풍수도시 서울의 비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