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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불교향 짙은 시대, 부처 가피가 가득했던 날들"

③고려시대-현오국사탑비·처인성 등 자비와 항쟁이 공존하던 시대

 

① 선사시대

② 삼국시대

③ 고려시대

<계속>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고려 명종 대의 고승 현오국사의 탑비다.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 산110에 있는 탑비로 고려 후기에 건립됐다. 서봉사 절터의 규모를 보면 아주 큰 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절에서 나온 쌀뜨물이 개울을 따라 10여리 나 흘러내려 왜군이 그 물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대사찰이라는 이야기다. 

 

남아있는 기록으로 보아 18세기 후반까지 있다가 19세기쯤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으니 불교계와 역사학자들의 관심도 깊다.
 

스님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탑비는 보통 사리를 모신 부도탑과 함께 건립되는데, 서봉사지에서는 부도의 흔적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비문에 의하면 현오국사는 고려 중기의 승려로 세속의 성은 왕씨(王氏)였으며, 속명은 종린(宗璘)이다. 15세에 불일사(佛日寺)에서 승려가 된 후, 부석사(浮石寺) 주지를 거쳐 국왕의 고문에 해당되는 승통(僧統)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사판과 이판을 오가며 고려 불교에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명종 1178년 53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명종은 크게 슬퍼하며 그를 국사(國師)로 삼고, ‘현오(玄悟)’라는 시호를 내린 뒤 동림산 기슭에서 다비했다고 한다. 현오국사는 대각국사 의천의 권위를 계승한 대표적인 고승이 됐다.

 

비문에는 글을 지은이와 건립 연대 등이 함께 기록돼 있는데, 본문을 쓴 사람은 이지명(李知命)이며 글씨는 초서(草書)의 달인 '유동권(劉公權)'이다.

 

 

공세리 오층석탑

 

2층 기단을 갖춘 평면 네모꼴의 오층석탑으로 높이는 약 2.6m다. 실측도 상에 기록된 하층 기단에는 측면에 안상(眼象) 등에서 나타나는 문양으로 코끼리의 눈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네 개씩 조각돼 있으며, 안상 가운데에는 연꽃이 핀 화려한 형태가 조각됐다.

 

상층 기단부에는 원래 4매의 면석이 있었으나 현재는 2매가 유실돼 좌우의 면석(面石, 상층기단과 하층기단의 주축부로 네 면을 이루는 벽체 부분)만 남아 있다.

 

탑신부는 5층으로 돼있는데, 1층 탑신과 옥개석(지붕돌)은 서로 분리돼 있지만 2층 이상은 탑신부와 옥개석이 통돌로 구성됐다. 탑신부에는 우주(모서리 기둥)가 조각돼 있으며, 옥개석 하부에는 3단의 옥개받침을 뒀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나 모서리는 위쪽으로 경쾌하게 들리게 만들어졌고, 끝부분에는 구멍이 있어 풍탁(풍경)이 달려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옥개석 상면에는 1단의 낮은 탑신괴임이 모각돼 있다.

 

노반 이상의 상륜부는 사라졌으나, 5층 옥개석 윗면에는 직경 37㎝ 정도의 원형 찰주공이 뚫려 있어 과거 석탑 위로 상륜부가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이 석탑은 하층 기단부에 안상이 새겨져 있고, 기단 갑석에 앙련이 새겨져 있는 등 세공수법이 세밀하고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탑의 형태와 구조에서 보이는 특징을 고려할 때 공세리 오층석탑은 한강 이남에 남아 있는 15~16개의 고려 중기 탑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서리 고려백자

 

함박산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끝자락에 위치한 고려시대 가마터다. 1960년대에 처음 발견됐으며 고려 초기인 10세기 중반 무렵부터 12세기까지 청자와 백자를 생산했던 곳으로 밝혀졌다.

 

지난 1984년부터 순차적으로 실시된 1~3차 발굴조사 결과, 4개의 퇴적층이 확인됐는데, 가마와 제작공정과 관련된 건물터가 발견됐으며, 백·청·도기조각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

 

가마는 초기에 사용한 벽돌로 된 가마와 나중에 사용된 진흙으로 조성한 가마가 확인됐는데, 벽돌가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진흙가마는 여러 차례 개축과 보수를 거치면서 사용됐고, 27개의 출입구가 확인됐다. 출토유물로는 청자·백자주발, 해무리굽 대접·접시·잔·장고·병 등으로 특히 해무리굽 대접(완)이 대부분이다.

 

출토유물로 보아 가마의 제작 시기는 10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초까지로 추정된다.

 

그리고 2021년부터 실시된 4차 발굴조사에서는 건물지와 답도(통로)·계단·저장구덩이·폐기장 등의 시설이 추가로 확인됐다. 특히 보(벼와 조를 담는 네모난 그릇)와 궤(기장을 담는 둥근 그릇) 등 왕실 제기 등의 유물이 확인돼 이곳이 왕실에 제기를 공급하던 생산지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유적은 거대한 퇴적층과 벽돌진흙 가마의 존재, 다양한 모양의 백자 등이 발견돼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 전기에 이르는 도자사 연구에 획기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백자의 발생과 변천 과정을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특히, 해무리굽 백자를 만들던 시기의 토층에서 원시 상감청자 조각이 나왔는데, 이는 우리나라 청자의 상감기법이 발생한 시기를 100년 이상 끌어올린 유물이다.

 

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상태가 좋은 완형의 왕실 제기가 확인돼 고려 왕실제기의 제작과 납품 과정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민간보다는 학계와 기초단체가 주도적으로 연구발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처인성

 

승장 김윤후가 몽골군을 물리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처인구 남사읍 아곡리 산 43에 위치했다. 

 

형제봉에서 동쪽 능선으로 이어지며 돌출된 해발 70.9m의 자연구릉상에 자리하고 있다. 평면형태는 사다리꼴에 가까우며, 규모는 전체 둘레 약 351m, 높이 3~6m로 알려져 있다. 성벽은 남서쪽이 높고 북서쪽이 낮은 형태로 성문은 북동벽에 2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야산의 끝자락 위에 세운 평지성인데 대체로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 축성했으며, 낮은 지점은 판축공법으로 성토하여 구축했다고 전해진다.

 

처인성은 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이 출토됐는데, 출토유물과 축성법 등을 바탕으로 신라 말~고려 초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토유물 가운데 고려도검은 고려시대 칼 가운데 하나로 매우 큰 가치를 지니는데 고려시대 처인성에서 전투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유물이다.

 

처인성 일대는 예로부터 동서와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군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 지역이었으며, 고려시대에는 군량을 저장하던 군창(軍倉)으로 사용됐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향토학자들 사이에서는 전체적인 고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용인어비리삼층석탑

 

처인구  동도사 경내에 있다.

원래 이 석탑이 있던 곳은 이동저수지에 있던 사찰인데 지난 1963년에 석불좌상과 함께 동도사로 이전됐다.

 

석탑은 네모난 이중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석과 옥개석이 있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석탑의 전체 높이는 3.25m이며 기단부 높이는 1.23m다.

 

기단 부분은 여러 개의 돌을 정교하게 만들었는데 하층 기단에는 우주(모서리 기둥) 2주와 탱주(가운데 기둥) 2주를, 상층 기단에는 우주 2주과 탱주 1주를 얕게 조각했다. 기단부의 윗부분에 해당하는 상대갑석 위에는 탑신 괴임을 마련했는데 이중기단과 탑신 괴임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신라 말기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의 규모나 3층 옥개석(지붕돌) 상부에 남아있는 원공(탑신부 위로 상륜부를 설치하기 위해 만든 구멍)을 통해 탑신부가 원래부터 3층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탑신석들에는 기단부와 같이 우주를 얕게 조각했으며, 1층 탑신석과 2층 탑신석의 비례는 2대1 정도다. 옥개석을 세공하는 치석 수법은 고르고 정연하게 돼 있다. 처마부에는 일정한 너비로 낙수홈대가 있으며 처마선은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빗물이 낙수면을 따라 급경사를 이루고 내려오다 처마 쪽으로 흐르도록 치석됐다고 학자들은 전한다. 옥개석은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규모만 작아질 뿐 치석 기법은 같게 돼 있고 현재 상륜부는 모두 사라졌다.

 

수도권 석탑에서는 보기 드문 탑신괴임이 눈길을 끈다. 왜, 탑신괴임은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유행한 석탑의 부재인데, 주로 중부 이남과 남부지방에서 많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의 석탑에 비해 규모가 작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이상일 시장은 "불교국가로 분류되는 고려시대 용인 문화유산은 불교향이 짙다"며 "이 시대의 문화유산이 당시 백성들의 삶을 어떻게 반추했고 현재까지 이어졌는지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 경기신문 = 최정용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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