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받은 편지가 족히 수백 통은 넘어간다. 내가 인기 많은 교사여서 편지를 받는 건 아니다. 스승의 날이 되면 작년에 담임했던 아이들이 자기 교실에서 스승의 날 행사로 편지를 써서 교실로 가져온다. 학년이 끝날 때쯤에 편지를 주고 떠나는 아이들도 가끔 있다. 교사를 하다 보면 연례행사처럼 편지를 받게 된다. 편지에는 보통 공부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나, 올 한 해 재밌었다는 말이 적혀 있다. 때로는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하기도 하고, 말을 잘 안 들어서 죄송하다, 그동안 말썽꾸러기들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다는 이야기가 구구절절 쓰여 있을 때도 있다. 아주 가끔이지만 지금 괴로운 일을 겪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가 올 때도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생활하는 게 대동소이하니까 편지의 내용도 비슷비슷해진다. 나를 잊지 않고 편지를 적어서 건네준 아이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개학을 맞이해서 출근했는데 교무실에 편지가 한 통 와 있었다. 보낸 이는 올해 우리 반 친구 A였다. 급한 일이었으면 메신저를 통해서 연락이 왔을 텐데 그게 아닌 걸 보니 천천히 확인해도 될 내용인 듯싶었다. 편지 봉투에 우표까지 붙여서 온 편지를 보고 약간은 두근거리기
코로나 때문에 1년 반 동안 거의 운동장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운동장 곳곳에 초록색 풀이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남자아이 하나가 창밖으로 운동장을 바라보다가 풀을 조금만 더 자라게 두면 천연 잔디구장이 될 거 같다고 좋아했다. 교장 선생님께서 수풀처럼 변해가는 운동장을 보다 못해 가끔 직접 잡초 제거를 하셨지만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공간에서 승자는 이름 모를 잡초였다. 풀들은 여름 햇볕을 받고 더 맹렬하게 자라고 있다. 운동장을 떠올리면 초등학교 때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며 뛰어다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새로 지은 건물에 구색 맞추기 식으로 작게 운동장이 있었는데 그나마 1년 뒤에 별관이 신설되면서 운동장 크기가 더 줄어들었다. 그곳에서 점심시간과 방과 후에 공을 차며 놀았다. 물론 그렇게 놀았던 여학생은 나뿐이었다. 내가 유년 시절 내내 살던 아파트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나와서 성별에 상관없이 어울려 놀았다. 나는 언제나 놀이터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아이들과 놀 때도 있었지만 남자아이들이 하는 축구와 야구 같은 운동을 자연스럽게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한 여자 친구들이 내 주변에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점심시간에 남자아이들이
올림픽 한 경기, 한 경기를 과몰입 상태로 보다가 인상 깊은 선수를 발견했다. 육상 높이뛰기에서 전체 4위를 한 우상혁 선수였다. 한국 선수가 높이 뛰기 결선에 진출한 덕분에 오래간만에 육상 경기를 실시간으로 봤다. 우상혁 선수는 경기 초반 굳어 있던 표정에서 벗어나 시종일관 웃으면서 하늘을 날았고, 2m 35cm를 넘어 개인 최고 기록이자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이후 2m 39cm에 도전했지만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다. 새로운 기록을 세우지 못해 메달에서 멀어졌음에도 활짝 웃으며 ‘괜찮아’를 외치는 모습이 뇌리에 남았다. 우상혁 선수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후회 없는 경기를 했으며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우상혁 선수뿐만이 아니었다. 수영 황선우 선수도 메달권이 아니었지만 자신의 기록에 만족한다면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양궁 8강 경기에서 탈락한 김우진 선수는 인생이 어떻게 해피엔딩만 있겠느냐며 웃었다. 사격에서 은메달을 딴 김민정 선수도 비슷하게 인터뷰를 했다. 결승 슛오프가 너무 재밌었고 아직 어리니까 아쉽지 않다고 말했다. 예전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따지 못하면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며 죄인 아닌 죄인처럼 인터뷰를 했다. 4년 동안
어릴 때도 방학은 무척 기대되는 이벤트였다. 늦잠을 자고 하루 종일 밖에서 실컷 뛰어놀 수 있으니까 손을 꼽아가며 방학을 기다렸다. 마냥 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때는 방학 숙제가 정말 많았다. 매일 일기 쓰기와 책 읽고 독후감을 몇 편 이상 작성하기는 1학년 때부터 6학년 때까지 빠지지 않던 숙제였다. 고학년이 되자 주제를 정해서 탐구해 오기와 문제집 한 권 풀어오기가 추가되었다. 당연히 방학 내내 아무것도 안 하다가 개학이 다가오면 이 모든 걸 다급하게 해결했다. 다른 건 몰아서 해도 지장이 없었는데 일기만큼은 그게 어려웠다. 일기의 내용을 채우는 건 아침 먹고 놀고 점심 먹고 뛰어다니고 저녁때 TV 봤다는 내용으로 채울 수 있었다. 문제는 날씨였다. 이미 지나간 날씨는 거짓말이 어려웠다. 그때는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여서 신문 같은 매체에나 날씨가 적혀 있었다. 앞일을 걱정했다면 그날그날 일기는 안 쓰더라도 날씨는 적어놓았을 텐데 그 정도의 계획조차 세우지 않을 만큼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학교 가서 친구의 일기를 보고 날씨를 베끼기로 하고 개학 전날 밤까지 열심히 일기를 써서 검사를 받았다. 교사가 되고 보니 방학 숙제는 담임교사 재량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였다. 운동장 기억의 대부분은 교장 선생님이 구령대 위에 서서 훈화 말씀하시던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말의 구체적인 내용이 떠오르는 건 아니다. 훈화 말씀 시간은 곧 흙장난을 치는 시간이었다. 한참 서 있으면 곧 지루해져서 발끝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친구에게 흙을 튀겼다. 바닥에 앉을 수 있는 운수 좋은 날에는 손으로 흙을 모아 쌓거나 지나가던 벌레를 장난감 삼아 놀았던 것만 생생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거 같아 고개를 들어 구령대를 쳐다보면 아직도 누군가가 일장연설 중이었다. 구령대는 늘 선생님들 것이었다. 운동회 때 유일하게 그늘이 생기는 구령대 아래에는 대회 본부석이 차려졌다. 우리는 옆쪽에 위치한 스탠드에 자리를 잡았다. 운동회를 시작하는 타이밍엔 스탠드에도 그늘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해가 움직이면 여지없이 직사광선이 내리 꽂혔다. 그때는 학생들이 햇빛을 받는 게 너무 당연해서 한껏 찌푸린 채 손 그늘과 손부채를 만드는 게 전부였다. 요즘은 분위기가 반전됐다. 운동회 때 학생들을 위해 각 스탠드마다 천막을 쳐서 햇빛 가리개를 만들어 주는 건 기본이고, 교사들의 전유물이었던 구령대까
우리 반 아이들은 다음 주 월요일부터 매일 등교한다. 교육부에서 2학기부터 전면 등교를 하겠다고 발표했는데 학교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는 우리 학교는 한 달 먼저 등교를 시작하기로 했다. 1년 4개월 만에 아이들이 매일 학교에 올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아이들을 매일 보려나 기대하던 찰나에 옆 학교에서 확진자 수가 갑자기 늘었다. 다시 전면 온라인 수업으로 넘어가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다행스럽게 위기가 넘어갔다. 우리 반 아이들은 언제나 매일 학교에 오고 싶어 했다. 거리 두기 때문에 교실에서 별다르게 재밌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왜 학교가 재밌냐고 묻자, “뭘 하든 학교에 가는 게 낫죠.”라고 말하곤 했었다. 교육부에서 실시한 등교 관련 설문조사를 봐도 고등학생은 등교를 원하는 학생이 26퍼센트에 머무르는 반면 초등학생들은 열 명 중 일곱 명이 학교에 가고 싶다고 답했다. 역사의 기록으로 사라질지 모르는 마지막 온라인 쌍방향 수업이었다. 어떤 내용으로 수업할까 고민하다가 교실에서 하지 못했던 음식 만들기를 했다. 6학년 실과에는 한 그릇 요리를 만드는 단원이 7차시 분량 정도 나온다. 등교했을 때 실습을 하기가 어려워서 콘텐츠로
얼마 전에 근처 초등학교에서 내년 혁신학교 신청 관련 학부모 설문조사를 돌리려다가 홍역을 치렀다. 학부모들이 혁신학교에 반대한다고 학교에 항의 전화와 민원을 넣었고, 해당 아파트에는 대자보가 붙었다. 아파트 벽에 붙어있던 종이에는 혁신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학력이 떨어지므로 찬성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과 17년도 뉴스 기사가 실려 있었다. 정말 혁신학교에 다니면 아이들이 바보가 되는 걸까. 혁신학교에 가면 학력이 떨어진다는 뉴스는 18년도에 교육부가 7년에 걸친 종단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낸 보고서로 반박할 수 있다. 기사가 났던 해를 제외한 모든 연도에서 혁신학교 학생들의 성적이 높았다. 혁신학교에 다니면 아이들 학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아이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만들어낸 실체 없는 불안에 가깝다. 필자는 첫 근무를 혁신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시작했다. 면접과 수업 실연을 거쳐 기간제 교사로 채용됐지만, 교사로서 큰 기대는 없었다. 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다른 진로를 모색하던 중에 공백기를 줄이려고 시작한 직장 생활이었다. 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이 없었으니 교사로서 아이들을 만나는 것도 설레지 않았다. 이전까지 과외 지도를 해왔으니 학교 교사도 그와 비슷한 연장
지구에서 가장 많은 산소가 만들어지는 곳은 어딜까요? 질문을 던지자 아이들이 신나서 대답한다. "숲이요!", "아마존 아닌가요?" 대체로 나무와 관련된 답들. 바로 답을 말해주지 않고 한참 뜸을 들이고 있으니 눈치 빠른 아이 하나가 숲이 아닌 다른 곳인 거 같다고 답을 정정한다. 아이들을 둘러본 후 정답이 '바다'라고 말하자 교실이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다. 바다에 들어가면 숨을 쉴 수 없는데 어떻게 바다에서 산소가 나오냐는 아이부터, 책 어디선가 아마존이 지구의 허파라고 써 있는 걸 봤다는 아이까지 다양한 반응이 나온다. 한껏 흥분한 아이들을 진정시키면서 바다에서 산소가 발생하는 원리를 설명한다. "바다에는 작은 플랑크톤이 사는데 그 친구들이 번식하면서 산소를 배출합니다. 우리가 숨쉬는 산소의 절반 이상은 바다에서 옵니다." 우리반 친구들과 환경 수업을 처음하면 어디에서 산소가 제일 많이 나오는 지를 알아본다. 바다가 만들어 내는 산소를 확인시키며 아이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스키마(Schema)를 깨뜨린다. 그 후에 바다가 얼마나 심하게 오염되어 있는지 준비한 사진과 영상 자료를 꺼낸다. 주로 바다에 떠 있는 한반도 7배 크기의 쓰레기 섬과 인간이 버린 쓰
초등학교에서 보통 성교육은 보건 교사가 한다. 5학년 교육과정에 성교육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부분을 포함한 몇 차시 정도를 보건 선생님께서 수업해주신다. 덕분에 담임 교사가 직접 성과 관련된 가르치는 일이 흔치는 않다. 담임 교사 본인의 의지가 있어서 손수 가르쳐야겠다고 결심하면 창체 시간을 이용해서 가르칠 수 있다. 그렇지만 굳이, 싶은 마음이 들어 포기했었다. 얼마 전에 교사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성교육을 해봤다. 6학년이라 교육과정에 자세한 내용이 없는데 여학생들에게 생리팬티 기부 제안이 들어와서 겸사겸사 진행했다. 처음엔 성교육 그거 뭐 별거라고 그냥 하는 거지! 하는 자신감이 있었다. 공작새 깃털처럼 부풀어 있던 자신감은 교육 자료를 정리하면서 폭삭 쪼그라들었다. 13살은 이성에 한참 관심이 많을 나이다. 이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 수준까지 교육을 해야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일단 5학년 교과서 수준보다는 한 차원 높아야 했다. 작년에 배운 내용을 그대로 다시 가르치는 건 아이들도 나도 재미없을 것 같았다. 남자 여자 신체의 구조와 기능 정도는 벗어난 심도 있는 재구성이 필요했다. 그러면서도 어린이들의 동심을 보호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었다. 북유럽은
어릴 적에는 스승의 날이면 학생들끼리 돈을 모아 케이크를 준비해서 파티를 했다. 반 회장을 주축으로 모여서 칠판에 풍선을 붙이고 분필로 편지를 썼다. 선생님에게 진짜 감사를 표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파티를 열어 합법적으로 수업을 빼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요즘은 김영란법이 생겨서 이런 식의 파티는 거의 없다. 주변을 둘러봐도 파티를 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교사들은 오히려 스승의 날이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작년 스승의 날엔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았으니 정말 아무 일이 없었고 올해엔 학생 몇 명이 꽃과 편지를 가져왔다. 편지는 받고 꽃은 사진을 찍고 돌려보내면서 사진으로 잘 간직하겠다고 말했다. 학생이 아쉬워했지만 편지만으로 충분하다고 거듭 말했다. 교장선생님이 전체 교사들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주셔서 감사히 받았다. 스승의 날엔 교사들끼리 그간 고생이 많았다, 앞으로 힘내자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 스승의 날이라고 별 다를 건 없다. 평소처럼 수업을 하고, 아이들 하교를 시킨 다음에 업무 처리를 했다. 어제와 똑같이 지나갈 뻔 했는데 오전에 받은 편지를 펼치니 감회가 생겼다. 교실에 앉아 학생들이 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