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뎃잠을 경험한 사람은 안다. 노숙(露宿)이라고 해야 쉬 이해하려나. 덮을 신문지 한 장 없이 겨울밤을 견딜 때, 한 방향의 바람이라도 막아줄 벽이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지. 열아홉 살 때였을까. 혼자서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비둘기호 열차였다. 비둘기호 열차는 한반도의 평화만큼이나 느리고 굼떴다. 반나절이 걸려 영등포역에 도착했을 때, 혼자라는 사실에 덜컥 겁이 났다. 갓 상경한 촌놈에게 서울은 빠져나오기 힘든 미로 같았다. 눈보라 치는 밤, 의지할 것이라곤 편지봉투에 적힌 친구의 자취방 주소뿐이었다. 그 시절에는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하면 병역이 면제되었다. 5년을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마다하지 않았다.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던 친구는 자격증을 따기 무섭게 방위산업체에 취업했다. 철이 바뀔 무렵이면 편지를 보내오곤 했는데, 언제든 놀러 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말만 되새기며 서울행 열차를 탄 게 화근이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자취방은 굳게 잠겨 있었다. 주말에도 야근을 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까마득히 몰랐다. 공중전화로 회사에 전화를 걸었지만 작업 중에는 바꿔줄 수 없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졸지에 미아가 되어서 밤거리를
완벽한 대본이라 해도 NG는 생긴다. 정해진 대사와 지문이라 해도 피할 길이 없다. NG는 대본 따라 연기하는 배우들만의 것이 아니다. 촬영을 멈추게 하는 요인은 의외로 많다. 도로를 통제해도 날아드는 비둘기를 막을 수 없고, 급작스러운 바람에 조명이나 소품이 넘어질 수도 있다. 정해진 것은 대본뿐이다. 정해진 대본에 맞춰서, 날씨와 장소와 시간과 상황과 감정을 연출하는 건 쉽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크게 다를 게 없다. 누구에게나 가슴에 품은 완벽한 대본이 있지만, 대본 따라 살아지는 건 아니다. 아이의 꿈이 또 무너졌다. 삼 년 째다. 아이의 침묵은 무너지는 빙산처럼 시리고 아득하다. 손을 뻗어보지만 헤아릴 길 없는 벽이다. 벽 너머에서 침묵이 눈처럼 쌓인다. 예고도 없이 쌓이는 눈 때문일까. 취준생 가족의 겨울은 목부터 얼어붙는다. 남은 한 장의 달력조차 칼날이 되어 가족의 목을 겨눈다. 재작년이 그랬고 작년 겨울 역시 그랬다. 이런 겨울은 아이가 꿈꾸는 대본 어디에도 없다. 없는 내용의 대본을 펼쳐 놓고 아이는 침묵과 마주한다. 마주한 둘의 틈을 누가 파고들 수 있을까. NG를 외치며 멈춰 세울 수 있는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어깨동무를 하면
개는 골목에서 큰길로 걸어 나왔다. 다리는 짧고 몸통은 길쭉한 개였다. 목줄에 묶인 개는 주인의 바짓가랑이 주위를 요리조리 누비며 걸었다. 걷던 개가 처음 멈춰 선 곳은 전봇대 앞이었다. 개는 뒷발 하나를 전봇대에 걸치고 오줌을 갈겼다. 오줌은 벌려진 개의 뒷발 각도와 높이에 상응하는 자국을 전봇대에 남겼다. 전봇대에 새겨진 오줌 자국에서 김이 모락거렸다. - 가난한 사람은, 부정식품도 먹을 수 있게 존중하고. 다른 개는 반대편 인도에서 걸어왔다. 송아지인지 개인지 구분하기 힘든 개였다. 목줄에 묶인 개를 따라 주인은 아등바등 끌려 다녔다. 개가 주인을 끌고 나온 건지, 주인이 개를 끌고 나온 건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다른 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전봇대에 오줌을 갈긴 개를 향해 다가왔다. 다가서는 다른 개를 향해 다리가 짧고 몸통이 긴 개가 짖어댔다. - 일을 할 거면, 일주일에 120시간 바짝 일하고. 송아지인지 개인지 구분하기 힘든 개의 주인은 여전히 아등바등 끌려 다녔다. 끌려 다닐 때마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는데, 앞말과 뒷말이 연결되지 않고 뜬금없어서, 말의 속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았다.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난 건지, 만나던 애인에게 딱지를 맞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건 사슴이다. 소는, 모가지와 상관없이 슬픈 짐승이다. 소의 운명은 ‘워낭소리’와 함께 끝났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다큐멘터리 영화만큼이나, 소의 역할 또한 우리 곁에서 지워지고 없다. 들녘에서 논을 갈고 밭을 일구는 건 소가 아니라 기계다. 일터에서 쫓겨난 것은 사람이나 소나 마찬가지이지만, 소에게까지 실업수당이 지급되진 않는다. 고양이처럼 발바닥을 핥지 못하고,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지 못해서, 소는 반려동물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소는, 모가지와 상관없이 슬픈 짐승이다. 개와 고양이를 키우듯이 사람은 소를 키운다. 개와 고양이는 주린 정을 채우기 위해서 키우고 소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키운다. 사람은 소를 먹는다. 사람이 고기로 먹는 소는 한해 삼억 마리에 달한다. 고기는 구워 먹거나 삶아 먹거나 날것으로 먹는다. 머리는 쪄서 귀와 코와 혀와 골을 먹고, 뼈는 푹 고아 물을 먹는다. 그렇게 먹다 남긴 것을 갈아서 사람은 일반가축의 먹이를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 중에는 반려동물의 먹이도 있다. 사람이 먹기 위해 죽인 가축의 부산물을 가축이 다시 먹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료라고 부른다. 개중에는 우유를 생산하기 위해
아버지는 내 생일날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아침상에 오른 미역국을 몇 숟가락이나 뜨셨을까요. 다시 자리에 누운 아버지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추석을 이틀 앞둔 날 아침이었습니다. 영화처럼, 한쪽 눈을 감지 못하고 아버지는 숨을 거뒀습니다.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인가 하였는데, 말은 내 귀에 도달하지 못하고 흩어져버렸습니다. 흩어진 말속에는 말은 없고 흙냄새만 남아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쪼그려 앉으면 맡을 수 있던 흙냄새였습니다. 어쩌면 무화과나무 아래 굴을 파고 살던 개미들의 냄새였는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내 생일날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마당에 생일은 의미가 없습니다. 빛을 잃기는 추석명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가신 뒤로는 명절 대신 제사를 위해 가족이 모입니다. 사십여 년을 그렇게 지냈습니다.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코로나로 인해 가족이 다 모이지 못한 것입니다. 하긴, 그것이 우리 가족만의 문제일까요. 코로나로 오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하루 평균 팔천 명 꼴입니다.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서둘러 가족을 땅에 묻은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할까요. 그들의 기억에도 흙냄새가 선명할까요. 아버
막내가 왔다. 현관문이 삑삑거리기 시작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캐리어 가득 빨래를 챙겨 온 막내는 씻기도 전에 ‘배고파’를 연발했다. 삼분이나 걸렸을까. 초스피드로 씻고 털고 말린 막내는 팬티 바람에 식탁에 앉았다. 자다가 불려 나온 막내의 엄마는, 그러니까 내게 주인 되는 분께서는, “미친 놈, 시간이 몇 신데”를 연발하면서 밥상을 차렸다. 막내는 양푼에 밥을 비벼가며 냉장고 잔반을 처리했다. 고추장 냄새는 알싸하고 들기름 냄새는 달달했다. 아내는 맞은편 식탁에 앉아 꾸벅 졸았다. ‘꾸벅’과 ‘꿀꺽’이 식탁을 사이에 두고 상봉하였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사회적 거리두기와 상관없이) 모자의 상봉을 관전했다. 다행히 막내의 엄마는, 그러니까 내게 주인 되는 분께서는, 별다른 지시를 내게 하명하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의 청춘은 애달프다. 대학생이라고 해도 별 수 없다. 비대면(非對面)이 일상인 캠퍼스에 낭만은 없다. 없는 낭만이 꿈꾼다고 생겨날까. 보이는 것이라곤 불확실뿐인 시대에 낭만에게 할애할 여유는 없다. 막내는 학교 담 너머에서 자취를 한다. 비대면 수업이 일상이라지만 교수연구실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막내에겐 ‘해당사항 없음’이다. 싫든 좋든, 해가 뜨면
우리는 늘 바닥이었다. 앞발 두 개가 땅에서 떨어지는 순간 우리의 신세는 바닥이 되었다. 인간들의 직립은 바닥을 딛는 우리의 운명을 강요하는 것이어서, 곧추 세운 머리의 하중은 몸뚱이의 것이 되지 못하고 우리 것이 되었다. 머리가 강요한 아픔의 깊이를 목도 허리도 다리도 받아내지 않았다. 받아내지 않고 흘려보낸 것들은 뼈와 살과 피를 따라 밑으로 흘러 땅에 고였다. 땅에 고인 것들을 딛고 서는 건 늘 우리 몫이다. 우리는 바닥에 산다. 늘 바닥일 수밖에 없음은 부당한 것이었으나 우리는 받아들였다. 우리의 받아들임으로,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몸뚱이가 바닥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바보 같은 결정이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후회한다고 해서, 후회를 돌이킬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우리에겐 없다. 선택권은 늘 머리 꼭대기에 있고 우리에게 하달되는 건 선택의 결과뿐이다. 결과 또한 매번 부당해서, 인간들이 잠든 순간에도 우리는 발가락을 세우고 보초를 서야 한다. 입이 하는 소리를 우리는 믿지 않는다. 손이 쓰는 말도 거짓임을 우리는 잘 안다. “위를 보지 말고 아래를 보라”고 말하는 입은 역겹고, “밝음 뒤에는 어두움이 있다”라고 쓰는 손은 뻔뻔하
집은 단순히 잠을 자는 곳이 아니다. 하루가 열렸다가 닫히는 곳이 집이고, 한 사람의 생애가 시작되었다가 마무리되는 곳이 집이다. 집은, 아이를 잉태한 어머니의 자궁이고, 가족을 품은 울타리이고, 문명을 보듬은 사회이고, 국민을 보살피는 국가이고, 생명을 품은 녹색의 별 지구이고, 천지만물의 조화가 싹트는 우주다. 그런 점에서, 셀 수도 측정할 수도 없는 광활한 영역의 집을 네 개의 벽에 둘러싸인 몇 평짜리 공간으로 규정짓는 것은 인간의 착각이다. 지구에 사는 그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집을 규정하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사회의 비극도 거기에서 출발되었는지 모른다. 땅에 기둥을 세우고 지금부터 이곳은 내 집이니 들어오지 말라고 우기는 순간, 자연의 일부였던 집은 욕심의 일부가 되고 만다. 집이 빚어낸 욕심은 마당과 논밭으로 확장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땅에 선을 긋고 자신의 영역이라 우겨대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영역표시는, 땅을 품은 자연이 보기에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땅과 물과 공기를 빌려 쓰는 동물이 어찌 그것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땅과 바다와 하늘에 선을 긋고 제 것이라 우겼다. 우긴다고 땅과 바다와 하늘이 누구의 것
창을 열면 물안개가 짙다. 늘 그렇다. 강(江)에 기대 사는 마을의 아침은 물안개로 시작된다. 안개는 강과 산과 들의 경계를 지우고 기억에 박힌 익숙함 마저 지운다. 물까마귀 울음이 안개 너머에서 날아와 단풍나무 이파리를 흔든다. 안개에 갇힌 까마귀 울음은 반듯하게 착지하지 못하고 마당에 나뒹군다. 강을 건너온 까마귀 울음에 잣나무 숲에 사는 딱따구리가 화답한다. ‘까악’은 애달프고 ‘딱딱’은 절박하다. 둘의 울음은, 전선(戰線)을 사이에 두고 암호를 주고받는 스파이들의 교신 같다. 강을 덮은 물안개는 전쟁의 참상을 덮는 연기(煙氣) 같다. 물안개를 따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미얀마 로힝야족 마을이 흘러간다. 물안개의 발걸음은 강물의 흐름만큼이나 더디다. 물안개의 느린 발걸음은, 링거에 의지하고 숨을 뱉는 다섯 살 아이의 맥박 같다. 강을 덮은 물안개가 강을 거슬러 나아간다. 강도 따라 거꾸로 흘러가는 것 같다. 죽임으로 역사를 거스르는 반역의 걸음걸이도 저러할까. 비틀거리려는 아침, 창틀에 손을 짚고 거꾸로 흐르는 물안개를 바라본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물안개가 자욱하기는 인터넷 세상도 마찬가지다. 새벽 내내, 인터넷 창(MS Windows)을 열고
우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꿈을 꾼다. 모든 사람이 고루 행복해지는 꿈이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누군가는 유토피아(Utopia)라고 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토피아는 없다.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는 공상소설이다. ‘어디에도 없다’라는 뜻의 유토피아도 그가 만든 말이다. 지은이조차 없다고 고백한 유토피아를 소설 밖에서 찾는 건 무리다. 낙원이나 천국 혹은 이상향이나 파라다이스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다. 없지만, 아니 어쩌면 없어서 더더욱, 유토피아라는 꿈을 현실이라는 종이에 그리고 싶은지 모른다. 꿈을 현실로 바꾸려는 시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물론, 시도하거나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명칭과 내용은 서로 다르다. 다름에도 우리가 그 꿈에 애정을 쏟는 것은, 그들이 그리려는 꿈의 배경이 ‘누구나 행복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 누구나 행복한 사회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꿈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그들이 꿈꾸는 누구나 행복한 사회는 어떤 세상일까. 나는 그들의 꿈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도 전에 ‘누구나 행복한’이라는 어감의 완벽함에 압도당하고 만다. 고백하건대 나는 너무도 불완전한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