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꿈을 꾼다. 모든 사람이 고루 행복해지는 꿈이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누군가는 유토피아(Utopia)라고 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토피아는 없다. 토머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는 공상소설이다. ‘어디에도 없다’라는 뜻의 유토피아도 그가 만든 말이다. 지은이조차 없다고 고백한 유토피아를 소설 밖에서 찾는 건 무리다. 낙원이나 천국 혹은 이상향이나 파라다이스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다. 없지만, 아니 어쩌면 없어서 더더욱, 유토피아라는 꿈을 현실이라는 종이에 그리고 싶은지 모른다. 꿈을 현실로 바꾸려는 시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물론, 시도하거나 진행되는 프로젝트의 명칭과 내용은 서로 다르다. 다름에도 우리가 그 꿈에 애정을 쏟는 것은, 그들이 그리려는 꿈의 배경이 ‘누구나 행복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아, 누구나 행복한 사회라니. 생각만 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꿈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그들이 꿈꾸는 누구나 행복한 사회는 어떤 세상일까. 나는 그들의 꿈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도 전에 ‘누구나 행복한’이라는 어감의 완벽함에 압도당하고 만다. 고백하건대 나는 너무도 불완전한 사람이
당신은 늘 거기 있어요. 옥상 한 귀퉁이, 배불뚝이 옹기 속에 있어요. 유리로 된 창도 없지요. 앞으로도 뒤로도 열고 나올 문이 없어요. 문도 창도 없는 동그라미 속에 당신이 있어요. 저는 믿어지지 않을 때가 많아요. 그렇게 사는 것도 산다고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사는 옹기 속은 어떤 세상인가요. 얕기만 한 제 눈에는 보이지 않아요. 애써 부릅떠도 볼 수 없어요. 당신은 속에 있고 저는 밖에 있어요. 무릎에 턱을 고이고 쪼그려 앉으셨나요. 옹기 속 동그란 세상에도 환한 달빛이 드리우나요. 저는 모르겠어요. 뚜껑을 열어 봐도 어둠뿐이니까요. 당신은 늘 거기 있어요. 옥상 한 귀퉁이, 배불뚝이 옹기 속에 있어요. 메주 아홉 덩이를 넣고 소금물을 부은 날부터였지요. 맞아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은 말이 없지만, 어둠이 두껍게 내린 밤이면 제 귀에 들려요. 당신은 동그란 옹기 속에서 앉아 울고 있어요. 당신의 울음은 밖으로 퍼지지 못하고 속으로 무너져요. 당신이 우는 밤이면 저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말아요. 참지 말아요. 속으로 울지 말아요. 익는다는 것은, 까맣게 태운 속이 다시 썩어 문드러지는 걸까요. 저는 모르겠어요. 뚜껑을 열
낳을 자유는 있어도 태어날 자유는 없다. 아이는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다. 태어나게 해달라고 조른 적도 없다. 아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이가 된다. 그렇다고 아이가 우연의 산물이라는 건 아니다. 아이는 부모의 의지가 빚은 사랑의 결정체다. 임신(姙娠)이라는 단어를 뒤집으면 신임(信任)이 되는 것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확고한 믿음, 그것이 부모와 자식을 연결하는 생명의 끈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일까.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고 마는 아이들의 비극은 왜 끊임없이 반복되는 걸까. 며칠 전 대전에 사는 아버지가 딸을 죽였다. 태어난 지 20개월 된 아이였다. 아장아장 걷기도 바쁜 어린 딸을 아버지는 잠을 자지 않고 운다는 이유로 죽였다. 우는 아이를 이불로 덮고 주먹과 발로 때리고 밟아서 죽였다. 엉덩이뼈가 바스러지고 온몸에 피멍이 든 아이는 끽소리도 못하고 죽었다. 딸의 시체는 아이스박스에 넣어 화장실에 방치했다. 딸의 시체를 유기하고도 어머니는 보름이 지나도록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죽은 딸의 시체가 썩어가는 연립주택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을 자고 숨을 쉬고 밥을 먹었다. 보건복지부는 2019년 한 해 동안 아동
당신이 계신 곳은 어떠십니까. 제가 머무는 산기슭에는 비가 내립니다. 빗소리는 그윽합니다. 라디오 볼륨을 높여도 빗소리는 멀어지지 않습니다. 음악과 빗소리는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안과 밖에서 차분합니다. 아침상을 물리고 길을 나섭니다. 우산으로 비를 가리며 산길을 걷습니다. 가려지는 것보다 가려지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습니다. 가리고 싶어도 끝내 가릴 수 없는 것들, 아랫배에 그어진 수술자국 같은 것들, 지금은 잊어버리고 없는 흑백사진 속 아버지의 눈물 같은 것들, 빗길을 걸어 숲에 들면 가려질 수 있을까요. 잣나무 숲길을 걷습니다. 우산으로 비를 가리며 걷습니다. 여전히 가려지는 것보다 가려지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숲길을 따라 양치식물이 군락을 이뤘습니다. 군데군데 산딸기가 익어갑니다. 숲에서 익어가는 산딸기는 달콤 쌉싸름합니다. 세상살이의 맛도 이러할까요. 어쩌면 나무(木)가 숲(林)을 이루는 것도 그래서일지 모릅니다. 당신 생각은 어떠십니까. 저는 ‘삼림’(森林)이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살림’이 떠오릅니다. 살림살이는 죽임이 아니라 살림입니다. 살림살이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입니다. 생명 가득한 삼림처럼, 우리네 세상살이도 그
선택의 연속이다. 멈출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숙일 것인가 치켜들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소리칠 것인가. 마주 잡을 것인가 뿌리칠 것인가. 도대체 어쩔 것인가. 수도 없이 마주하는 갈림길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세상살이다. 진로도 믿음도 결혼도 선택의 순간을 비껴갈 순 없다. 꿈도 희망도 명예도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도 등장한다.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살려서 죽을 것인가 죽여서 살아남을 것인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18일, 서울은 중공군에게 함락될 처지였다. 후퇴하라는 명령이 전군에 떨어졌지만, 미 공군 중령 러셀 블레이즈델(Russell L. Blaisdell)은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는 전쟁물자 대신 1069명의 전쟁고아를 C-54 수송기에 태워 제주도로 피신시켰다. 김포비행장까지는 해병대 트럭 14대를 동원해 실어 날랐다. 트럭을 징발할 때, 러셀은 상부의 명령이라고 운전병들을 속였다. - 죽음에 내몰린 아이들을 죽게 놔두는 것이 군인이라면, 지금 즉시 군복을 벗겠습니다. 군사재판에 회부된 러셀 중령이 왜 명령을 어겼는지 묻는 판사에게 답한 대답이다. 대답을 들은 판사는 군법을 어긴
‘강함’의 정의는 무얼까. 이기는 것일까, 아니면 살아남는 것일까. 승자와 패자의 관점으로 바라봐선 답이 없는 질문이다. 펜과 칼의 강약(强弱)은 누가 쥐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죽이려는 자에게는 독이지만 살리려는 자에게는 약인 것, 그것이 펜과 칼이다. 펜과 칼의 두 얼굴은 역사가 증명한다. 펜과 칼이 백성을 위할 때 세상은 흥(興)했고, 펜과 칼이 권력을 탐할 때 세상은 망(亡)했다. 펜과 칼의 본질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돌이켜보면, 우리 역사에 기록된 펜과 칼은 백성을 위하지 않았다. 숱한 역사 속에서, 펜과 칼은 권력을 빼앗거나 탐하는 흉기로 쓰였다. 칼을 겨누며 협박하고 펜을 갈기며 조롱했다. 진짜를 밀어내고 가짜를 내세웠다. 가축을 죽이듯 칼이 춤을 추면 흘린 백성의 피를 펜이 지웠다. 다 죽이고 다 지울 때, 백성은 백성이 아니고 개 돼지였다. 일제와 결탁한 친일파들이 그랬고, 이승만을 앞세운 친일잔당이 그랬고, 군부독재와 놀아난 온갖 나팔수들이 그랬다. 칼이 앞에서 북을 치면 펜이 뒤에서 나팔을 불었다. 황국신민, 유신헌법, 정의구현, 떠들썩한 구호가 활개 칠 때마다 세상은 눈이 멀고 백성은 귀가 막혔다. 지금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을 제
말을 못하는 곳이 감옥(監獄)이다. 옥살이를 뜻하는 옥(獄)은, 두 마리의 개(犭, 犬)가 말(言)을 못하게 감시하는 모양새이다. 한자가 처음 만들어질 때와 비교할 순 없겠지만, 옥살이를 하는 죄인의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교도소에서는 감방을 나눠 죄수를 가두고 말을 통제한다. 한자에 새겨진 두 마리 개의 역할은 벽과 철문과 쇠창살과 감시카메라가 대신한다. 감방은 잠을 자는 밤에도 전등이 꺼지지 않는다. 전등을 켜고 끄는 스위치가 감방에는 없다. 감방을 감시하는 전등 불빛은 취침이나 기상나팔과 상관없이 하루 스물네 시간 감방을 비춘다. 감옥살이는 말을 빼앗김으로 시작된다. 말과 함께 이름도 사라진다. 사라진 이름을 대신하는 것은 죄수 번호인데, 면회와 편지와 진료와 재판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없고 번호만 살아 숨 쉬는 곳이 감옥이다. 취침시간을 제외하면 바닥에 눕거나 벽에 등을 기대서도 안 된다. 노래는 고사하고 웃거나 떠들어도 곤란해진다. 화장실 벽이 낮아서, 변기에 앉아도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항문 속까지 검사하는 교도소에서 볼일 보는 걸 감시하는 것은 상식이다. 감옥은, 몸과 말을 함께 가두는 네모난 벽이다. 그럼에도 예외는 있다.
‘이비’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잊어버린 말이다. 우는 아이를 달랠 때, 어른들은 ‘이비 온다’라고 했었다. 어른들이 말하는 이비는 ‘귀(耳)와 코(鼻)를 자르는 짐승’을 뜻했다. 이 짐승들이 처음 세상에 나타난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칠 전리품으로 왜군들은 조선 백성의 귀와 코를 잘랐다. 머리는 크고 무거워서 대신 자른 것이 귀와 코였다. 전리품으로 자른 귀와 코는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냈다. 조선 백성들의 잘린 귀와 코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교토에 묻었다. 땅을 파고 매장할 때,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위에 오륜석탑을 세웠다. 희생된 조선백성의 원혼을 석탑의 힘으로 찍어 누르기 위해서였다.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가면 조선 백성의 귀와 코가 묻힌 무덤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 일본말로는 미미즈카(みみづか)라고 부르고 한문으로는 이총(耳塚)이라 표기한다. 귀와 코가 잘려 이총에 묻힌 조선 백성의 수는 12만 6000명이었다. ‘이비’라는 말이 있다. 지금은 잊어버린 말이다. 우는 아이를 달랠 때, 어른들은 ‘이비 온다’라고 했었다. ‘귀(耳)와 코(鼻)를 자르는 짐승’은 일제시대에도 출몰했다. 이 때 출몰한 이비들은 자른 귀와 코
박근혜 정권 때였다. 지하철 무임승차 단속반이 아내와 나를 가로막았다. 아내가 사용하는 장애인 교통카드 때문이었다. 단속반 완장을 찬 중년 사내는 장애인을 사칭한 무임승차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멀쩡한 사람이 교통비 몇 푼 떼먹으려고 이래서야 되겠냐는 식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퇴근길에 지친 눈길들이 아내에게 쏟아졌다. 파렴치범을 대하는 눈빛이었다. 찔러오는 눈빛 앞에서, 발가벗겨지기라도 하듯 아내는 장갑을 벗어야만 했다. 엄지를 잃은 손은 어미를 잃은 아이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모멸감에 아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엄지손가락을 잃은 아내의 손을 확인하고도 단속반은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역무원들이 일하는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지만 어느 누구에게서도 정중한 사과는 듣지 못했다. 공공근로를 하는 일용직이라 단속이 서툴렀다며 책임을 회피하기에만 급급했다. 역무원들이 입고 있는 조끼가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되어 가슴에 날아와 박혔다. 조끼에는 ‘단결투쟁’이라는 구호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아내 손을 꼭 쥐고 사무실을 걸어 나왔다. 엄지 잃은 조막손이 내 손 안에서 파르르 떨었다. 아내의 손을 쥔 주먹에 힘을 더했다. 떨
사월이면, 깜깜하고 시린 사월 어느 밤이면, 소주 한 잔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밤바다로 향하는 아비가 있어. 아비의 손에는 까만 비닐 봉투가 들려있지. 철 지난 겨울 양말과 장갑과 내복이 들어있는 봉투 말이야. 바다는 그때의 바다나 지금의 바다나 다를 것 없어. 칠년이라는 세월에도 어김없이 침묵할 뿐이야. 어둠은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그리움만 하얀 띠가 되어 파도처럼 달려들지. 술을 비워도 아비는 취하지 않아. 취할 수 없어. 봉투를 풀어 시커먼 바닷물에 내복을 입히지. 양말을 신기고, 장갑을 끼어줘. - 추웠어? 아비는 바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밤을 지새워. 술도 목으로 넘어가질 않아. 술에서 바닷물에 흔들리는 해초 냄새가 나. 흔들리는 해초 이파리가 딸의 손가락 같아. 아빠, 안녕. 웃을 때 드러나는 덧니 같아. 교복에 붙은 이름표 같아. 이름표에 새겨진 이름 같아. 딸의 숨소리 같아. 아비는 숨을 쉴 수가 없어. 자식을 잃고도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이 죄인 같아서. 때만 되면 고파지는 배가 기가 막혀서. 이런 것도 아비라고 할 수 있을까. 토해내고 토해내도 밤바다는 말이 없어. 목이 쉬도록 불러도 대답이 없어. - 추웠어? 숨이 막혀서, 사월만 되면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