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유랑 가요의 고전은 태평레코드사에서 1940년 10월 발매한 음반으로서 ‘산 팔자 물 팔자’와 뒤를 이은 ‘번지 없는 주막’이란 노래이다. 이 노래는 1940년의 대표곡이요 히트곡으로써 백년설이 불렀다. 이 가요는 해방이 되고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다니던 1960년대까지 불러졌다. 내 기억의 저장고에 기록된 내용의 가사를 보자면, ‘산이라면 넘어주마 물이라면 건너 주마 / 인생의 가는 길이 산길이냐 물길이냐 / 그님도 짝사랑도 풀지 못할 내 운명 / 인심이나 쓰다가자 사는 대로 살아보자’ 이다. 나는 인천에 사는 매형의 회갑 때 이 노래를 불렀다. 많은 사람이 산길인가 물길인가 하면서 지치고 힘들어 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도 그랬다. 산길인지 물길인지, 번지 없는 주막에서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다시 걸어야 했다. 그때 장만(張晩)의 시조를 만났다.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도곤 어려워라 / 이후란 배도 말도 말고 밭갈이만 하리라.’ 바다의 풍랑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험한 산길에서 다시 고생을 한 어느 한국인의 한숨 소리를 듣는 듯했다. 이어서 배·말 다 집어치우고 흙 속에서 호미로
단풍이 지기 전 추석이 왔다가는 게 다행스럽다. 숲에는 아직도 나뭇잎들이 나무의 상처를 가려주고 하늘을 적당히 숨기다가 드러내 주기도 한다. 철 늦게 우는 새소리는 ‘가을이 가요’ ‘가을이 가요’하고 낮은 소리의 리듬을 탄다. 산속 작은 벌레들의 연주는 땅으로 깔리다 그 소리 끝내 나무뿌리로 스며든다. ‘숲 속의 고요’에 청각이 맑아지는 시간이다.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인간관계보다 일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사람은 어느 정도 고립되어 지낼 때 창작의 방향으로 개성이 발달되기도 한다고 했다. 내가 강의하는 수필창작 반에 등록함으로써 인연을 맺은 L 씨라는 분과 도청 옆 ‘담’이라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일주일 전부터 예약해야 된다는 그 집 분위기는 뭔가 담 안의 깊이와 가볍지 않은 분위기가 있었다. L 씨는 내게 ‘보리굴비 정식’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처음 온 음식점이고 내게는 조금 부담이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주문 같았으나 좋을 대로 하자고 했다. 성공은 형식과 물질 속에 있는 것 아니고 삶에 대한 이해와 긍정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는 성공한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 스스로 인내하며 불행하지 않는 뒤진 자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오늘 같이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퇴계 이황(李滉)은 13년 동안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특히 8년 동안은 사칠 논변(四七論辨)을 통해 조선 성리학에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을 펼쳤다. 전라도 광주의 기대승은 경상도 이황 선생과 13년 동안 인편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26살 아래의 자기를 깍듯이 대해 주신 대유학자로서의 이황 선생의 훌륭한 모습을 존경하였다. 퇴계 이황 선생이 돌아가신 뒤 기대승은 퇴계에 대한 존경심을 비문에 모두 담아내지 못하여 별도의 돌에 남몰래 추모의 글을 아래와 같이 새겨 묻었다. ‘세월이 흐르면 언젠가 산도 허물어져 낮아지고 / 돌도 삭아 부스러지겠지만 / 선생의 명성은 하늘과 땅과 더불어 영원하리라.’ 지금이야 우체국에 가서 4-500 원 주고 편지를 보내면 2-3일 내에 수취인의 손에 들어간다. 그러나 지금부터 500 년 전 두루마리 한지 종이에 쓴 편지글은 사람이 전라 경상도를 오가며 전해주고받았다. ‘애정 깊은 아들에게’ 오늘 나는 평소보다 출근을 빨리하여 봄의 창을 열고 네게 편지를 쓴다. 나는 가끔씩 한두 통의 편지를 쓴데 그 순간이 행복하단다. 그게 나의 호흡이며 나를 사는 시간 같다는 느낌에서다. 훈이 너를 보내고,
아침 산길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는다. 오늘은 서울에서 우리 아이가 열심히 노력해 제 능력으로 K 회사 대표이사로 취임하는 날이다. 그래서인지 산자락에서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를 듣자니 시골에서 자랄 때 우리 집 새벽을 깨우던 수탉의 목소리며 당당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휴대폰 알림 소리가 잠을 깨운다. 그러나 알림 소리보다 닭 울음소리가 창조주 음성처럼 먼저였다. 다음으로는 할아버지 기침 소리에 집안의 대문과 어머니의 부엌문이 열렸다. 할아버지의 기침이라는 무언의 언어가 회사 대표의 리더십 같은 역할을 했다. 어렸을 적 일이다. 날만 새면 친구들과 어울려 지금의 골프 같은 자치기나 구슬치기, 땅따먹기, 딱지치기 등에 해가는 줄 몰랐다. 이때 해질 무렵이면 어머니는 내 이름을 부르며 골목길로 나를 찾으러 다니셨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땅따먹기고 뭐고 발로 쓱쓱 문질러버리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닭 우는 소리에 태어나 어머니 같이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 순간 손 털고 떠나는 게 우리들 존재의 끝인 것 같다. 나는 하나님에게 특별히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 어머니의 외아들로 태어나 철저히 고독하게 유년기,
아버지가 내게 주신 문화유산은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必有餘慶)’이다. 선을 쌓는 집에 경사가 있고, 조상의 적덕으로 자손이 받게 되는 경사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고. 그러니 힘들어도 착하게 살면 ‘나도 이만하면 살겠구나!’ 싶을 때가 온다고 다독거려 주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논어 맹자 노자를 줄줄 외울 정도의 독서광이었다. 동양문화의 핵이 되는 인문학 공부는 자존심을 도도히 지니게 했다. 쩨쩨하거나 천박한 일은 하지 않았다. 체면을 매우 중시했으며 수신하고 가정을 건사한 뒤 사회 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았다. 기원전 343년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2세로부터 열세 살 된 아들의 교육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왕실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훗날 알렉산더 대왕으로 불리게 되는 알렉산드로스 3세를 7년 동안 가르쳤다. 그 결과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났기에 전쟁터에서도 책을 읽는 알렉산더의 두뇌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1807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알렉산더 대왕 교육법 중 하나인 ‘논박(elenctic)’은 크리스토퍼 랭델 교수에 의해 1924
여름이 깊었다. 에어컨 환경이 좋은 도서관으로 가는데, 인도블록 틈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 지렁이 사체가 눈에 띈다. 구리철사 토막인가 싶었다. 멈춰서 보니 지렁이 사체가 분명하다. 한 생명의 계절적 희생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어느 신문에서 김형석 씨가 쓴 ‘100년 산책’을 읽게 되었다. 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워싱턴 DC 부근 마운트버넌이라는 곳에 있는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저택과 농장과 그의 묘를 보고 소개한 글이다. 생전의 워싱턴은 자기를 내 농장 집 내가 지정한 장소에 그를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국회의사당으로 옮기지 못하고 그의 유언대로 자기 저택 왼쪽 돌들이 쌓여 있던 경사지에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가 대통령 임기를 마친 뒤, 주변의 간곡한 연임 권고를 거부하고 사저로 돌아와 살았을 때다. 찾아온 손님들이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쓰면 워싱턴은 ‘나는 대통령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지금 백악관에 계십니다. 이름만 부르기가 어색하면 ‘파머(farmer농부)’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살아 있을 때 창고 비슷하게 사용하던 건물 안에는 그의 애용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가장 눈에 띄
우리나라가 자체 기술로 개발한 첫 우주 발사체 ‘누리호(KSLV-Ⅱ)가 6월 21일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고흥군 나로우주센터 발사대에 탑재된 ‘누리호’는 매끈하고 날씬한 모습이었다. 발사대를 차고 오른 누리호는 탑재한 인공위성을 고도 700km 목표 궤도에 안착시켰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자력 기술로 위성 발사가 가능한 일곱 번째 국가가 되었다. 우주 강국은 물론 미래 세계의 꿈에 성큼 다가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위성을 실은 발사체의 발사가 언제든 가능한 만큼 우주 개발에 독립적인 ‘우주 주권’을 확보한 셈이다. 이는 37만 개의 부픔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작동하게 하는 첨단 기술이 있었고 2010년부터 연 1000여 명과 300여 개 국내 기업 인력과 예산과 투지력과 단합된 가슴들의 뜨거운 열정이 있어 가능했다. 『달로 가는 길』이라는 마이클 폴 린스의 책을 읽으면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1961년 소련이 유인우주선 발사에 성공하자 위기감을 느낀 케네디가 1960년대가 끝나기 전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1969년 아폴로 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하여, 한 세대를 매듭지었다. 미국은 달에 사람을 보낸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백수로 살면서도 공휴일은 기다려진다. 마음 편하고 약속잡기도 좋아서다. 계획 없이 사는 것 같지만 가슴속 시계는 매일 돌아간다. 삶이라는 게 ‘되고 싶은 나’와 아직 거기에 ‘다다르지 않은 나’ 사이에서 발버둥 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날들도 많았다. 지금도 나는 아침에 깨어나면서부터 외롭다.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오늘은 별일 없으려나? 하는 생각이 의식의 습관처럼 고개를 드민다. 저녁이면 잠자리에 들어 이불을 잡아당기면서도 외롭고 조금은 슬프다. 같은 핏줄 없이 태어나 울타리 없이 지내온 탓일까. 결혼하여 아들을 얻을 때까지 나는 외동이었고 을의 입장에서 얌전해야만 했다. 왜 그렇게 못났었는지, 나는 중매결혼으로 아내를 만났다. 아내에게 첫 부탁은 ‘부모님을 잘 모셔주는 일’이었다. 아내는 그 부탁을 실행하기 위해 평생을 문밖에 나가는 일도 조심하였다. 특별한 침묵인지 탁월한 선택인지는 모르나 언어를 상실당한 여인 같이 아내는 집안에서 수행적인 삶을 살았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까지 소리 소문 없이 잘 보내드렸다. 여름 숲에서 본다. 많은 나무들이 자기 생명의 언어처럼 잎을 피워 두터이 하면서 싱싱해져 하늘을 가리는 무성함이다.
지루하고 답답했던 선거도 끝났다. 현수막 피로감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여름이 오고 가면 가을이다. 모두가 역사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이제 맨 정신으로 스스로를 찾아 나서 자신을 위한 진정한 행복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다. 내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힘으로 학교를 다니기 위하여 집집마다 신문 배달하는 것을 지금의 아르바이트하듯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문 밖에서 던지는 신문이 집 안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싫지 않다. 이어서 일찍 배달된 신문에서 풍기는 활자의 잉크 냄새가 아침 공기와 함께 신선하게 느껴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신문과 인연이 깊다. 아니 문학을 하나의 업으로 생각하며 노력하는 길에서 신문은 나에게 정신적으로 신선한 영양소를 제공했다. 사회적 정보와 함께 어떻게 살며 세상을 읽어나가야 할 것인가를 깨우쳐주는 산사의 풍경과도 같았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는 다 읽은 신문의 필요한 부분을 오려 ‘스크랩 북’을 만들었다. 문화면과 오피니언에 실린 철학적인 내용들을 잘 오려서 스크랩에 풀로 붙여 보관하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글 짓고 강의할 때는 물론 축사나 조사를 할 때도 스크랩북에서 그 분위기에 맞는 단어와 문장을 참고하면서 나의 정서에
하늘과 산과 호수에 담긴 구름이 조화를 이루는 아침 시간이 있습니다. 호수 수면 위 연잎은 표면적 무늬가 됩니다. 그것은 호수 내면에 감춰진 흙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갈대는 지난 해 그 모습보다 낮아지고 빛바랜 그대로 서 있는데 그 자리에 푸른 빛 여린 대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세대교체보다 생명교체가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호수 중심 낮은 말뚝에는 해오라기 한 마리가 제 쉴 곳 일번지나 되는 듯, 위에서 내리긋는 획 같은 형상으로 졸고 있습니다. 그 모양이 물속으로 스미어 물 위아래 풍경이 하나가 됩니다. 호수의 풍경이 정지된 영상처럼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 순간 쇠물닭 한 마리가 수면 위로 반원을 그리며 지나갑니다. 바람에 밀리는 물결은 솟아오른 아침 빛 머금어 남에서 북쪽으로 물무늬 지으며 번져갑니다. 꽃 진 자리/ 잎 솟고/ 아기 녹색(幼錄)/ 꽃보다 고운데// 비에 씻긴 철쭉/ 맑음이어라/ 하늘 길 찾아가는/ 선한 눈망울 어느 해 봄에 써 둔 시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창을 넘어온 햇살이 내 책상에 와 머물고 있습니다. 창문을 열었습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어린이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