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 지면을 통해서 한번 얘기한 바 있을 것이다. 일본 석학 다치바나다카시 얘기다. 『그는 도쿄대생은 죽었는가』라는 저서에서 “세상은, 결코 스페셜리스트가 지배하지 않는다, 제너럴리스트가 이끈다”고 했다. 이 말을 요즘처럼 뼈저리게 느끼는 때도 없다. 국민의 힘 대통령 후보 윤석열 씨가 그 점을 상징처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후보는 역설적으로 지금의 한국사회에 중요한 이정표를 남기는 중이다. 윤석열 후보와 같은 스페셜리스트는 자신이 필요에 의해 쌓은 지식 공학의 범주에서만 세상을 보고, 또 잣대를 만들어 낸다.(모든 사람들은 잠재적 범죄자이다. 사모펀드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그래서 ‘조국은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주입돼 있었다.) 스페셜리스트들은 대개 수직주의자들이다.(주 120시간 노동시간 발언.) 엘리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계급과 계층에 대한편견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자유를 알지 못한다는 발언.) 반면 제너럴리스트는 광범위한 지식을 구하려 노력한 덕에 그래도 세상을 균형있게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제너럴리스트들은 응당 수평주의자가 되며 세상에서 평등과 함께 분배에 대한 올바른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지
에릭 홀트하우스의 저서 ‘미래의 지구 – 온난화 시대에 대응하는 획기적 비전’에 따르면 2030년에는 지구 멸망의 시그널들이 본격화 된다. 당신은 내일, 혹은 며칠 후나 몇 달 후에 세상이 망한다면, 그래서 다 죽을 수밖에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뭐 근데 그런 질문을 하는 영화들은 많다. 예컨대 로렌 스카파리아 감독이 만든 ‘세상의 끝까지 21일’에서 주인공들은 마지막 순간에 가족과 친구를 만나러 간다. 스티브 카렐은 아내보다는 옛 여자친구를 찾으러 간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다른 지역(뉴욕에서 시애틀로)에 있는 가족들에게 가려고 한다. 이 영화의 원제는 ‘세상이 끝나는 날에 친구 찾기, Seeking a friend for the End of the World’였다. 대부분 가족을 만나러 가지만 또 대부분은 ‘막 산다’. 매일 밤 파티를 열고 아무나 붙잡고 섹스를 하는 데다 임신이나 성병도 신경 쓰지 않는다. 살이 찌는 것 따위는 더욱 더. 3주 후면 다들 죽는데 뭐. 곧 내가 죽을 운명이라면 과연 무엇을 할까의 질문은 그걸 아무리 코믹하게 그린다 해도 마음속은 서서히 침잠하게 되기 마련이다. 우울에 빠지게 된다. 넷플릭스의 새 영화 ‘돈 룩 업’은 지
하마구치 류스케의 화제작 ‘드라이브 마이 카’는 몇 가지 점에서 주목을 끈다. 무엇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단편 원작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것 하나, 러닝타임이 3시간이나 된다는 점(그의 전작 ‘해피 아워’는 장장 5시간28분짜리이다)이고, 거기에 오프닝 타이틀이 나오기 전인 인트로 부분이 물경 50분이나 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평자(評者)들을 제일 깜짝 놀라게 하는 점은 그 50분이 하루키의 소설 단 몇 줄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류스케의 영화적 상상력이 하루키의 문학적 상상력에 못지않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영화는 문학을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류스케는 그걸 뛰어 넘으려 한다. 신세대다운 발상이다. 류스케는 1978년생, 이름하여 M세대에 가깝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50분을 할애한 하루키 소설의 분량은 이 작품이 수록된 ‘여자 없는 남자들’의 26페이지에서 29페이지까지 단 세 장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지만 아내는 이따금 다른 남자와 잤다. 가후쿠가 아는 한 상대는 모두 네 명이었다. 최소한 정기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가졌던 남자가 네 명이었다는 얘기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주인공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아내가 죽
1613년에 이탈리아 페샤(pescia)의 한 수녀원에서 벌어진 섹스 스캔들이 500년 만에 영화 ‘베네데타’로 부활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거장인 폴 버호벤이 만들었다. 폴 버호벤은 83세로, 우리에겐 ‘원초적 본능’이나 ‘로보캅’, ‘쇼걸’, ‘스타쉽 트루퍼스’란 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전작인 ‘엘르’란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는 할리우드보다 파리를 근거지로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다. 솔직히 그는 언제부턴가 퇴물 감독으로 취급받아 왔다. 그러나 폴 버호벤은 폴 버호벤이다. 특히 이번 신작 ‘베네데타’는 노령인 그의 거의 마지막 역작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쩌면 오랜 숙원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베네데타’는 실화다. 1613년에 벌어진 한 종교재판에 대한 기록이다. 이 기록은 현대의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주디스 브라운 교수에 의해 ‘수녀원 스캔들 –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한 레즈비언 수녀의 삶(By Judith C. Brown. 214 pp.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이란 논문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폴 버호벤은 그 역사서를 매우 도발적인 드라마로 뒤바꾸어 놨다. 영화는 매우 외설적이고 야하다.
이건 아니다. 지난 6일의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쏟아진 말들이 그랬다. 이건 아니다. ‘지긋지긋한,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라니. 누가 그에게 그렇게 왜곡된 연설문을 써서 줬을까. 미완성이긴 해도 한반도 종전을 이끌어 가고 있는데다 코로나19의 절대적 위기 속에서도 세계 8위의 무역 대국을 이루어 낸 정부가 무능하다니. 한치의 부정도 없는, 심지어 아티스트인 아들이 공적 지원을 받는 것조차 시비를 받을 정도로 투명한 대통령이 부패하다니. 그것이야 말로 숱한 ‘차떼기 뇌물’의 역사와 국정농단의 과거를 지닌 정당의 후보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스스로가 창피하지 않을까. 아니면 아예 염치라는 인식이 없는 것일까. 그러므로 해서 더더욱 이건 아니다. 여성은 군 복무를 하지 않으니 4분의 3만 권리를 행사하되 자식을 2명 낳은 여자는 예외로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인재랍시고 영입하려 했던 당사자들이 ‘스트릿우먼 파이터’를 축하 댄스 무대로 장식한다. 한 마디로 헛웃음이 나올 일이다. ‘스우파’의 스피릿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공격적일 만큼 당당한 여성상을 시대가 받아들여야 하며 또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막
일별(一別)만 가지고 영화를 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럴 수 있는 영화가 있고 그럴 수 없는 영화가 있다. 제인 캠피온의 역작 ‘파워 오브 도그’는 그럴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장대하면서도 웅장한 작품은 펄 벅의 ‘대지’를 연상시키게 하면서도 록 허드슨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무엇보다 제임스 딘의 유작(遺作)이기도 한 ‘자이언트’를 연상시킨다. 한편으로는 이안 감독이 만든 ‘브로크백 마운틴’을 닮았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걸작 ‘데어 윌 비 블러드’처럼 미국이 어떻게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갔는지, 그 과정에서 이른바 대규모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 이른바 부호와 상층 부르주아의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보여 주기도 한다. ‘데어 윌 비 블러드’처럼이 영화 ‘파워 오브 도그’도 위대한 미국 현대사이면서 기이하게도 그 안에 담겨져 있는 핏빛의 음모, 치정, 살인의 냄새를 가득 풍긴다. 앞서 언급한 모든 영화를 합친 느낌이 난다. 그것도 매우 도발적으로. 무엇보다 매우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무릎을 친다는 것은 단순한 수사학(修辭學)이 아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결론은, 보는 사람들의 뒷통수를 가감없이 정통으로 때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하
웨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를 보고 나면 이제는 거의 사멸되다시피 한, 그래서 다소 시대착오적인 어휘들이 떠오른다. 예컨대 고색창연(古色蒼然)하다 같은 것, 혹은 경이(驚異)롭다 같은 것이다. 이 영화는 언제부턴가 사라져 가고 있는 중요한 세상의 가치, 삶의 원칙에 대한 얘기다. 무엇보다 그 회한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사라지고 있는, 폐간 직전에 놓여 있는, 한 유수의 잡지에 대한 얘기다. ‘프렌치 디스패치’는 우리 말로 약간 고쳐서 의역하면 ‘프랑스발(發) 특종’이 되겠다. 프랑스 앙뉘라는 가상도시에서 발행되며 정치·사회·문화·생활·음식과 지역에 대한 갖가지 뉴스를 다루는 고급 잡지다. 미국 캔사스 출신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인 아서(빌 머레이)는 어느 날 뜻한 바 있어 앙뉘에 왔고 ‘피크닉’이란 이름의 잡지를 인수해 지금의 ‘프렌치 디스패치’로 바꾸고 키워냈다. 그렇게 캔사스에 앙뉘를, 앙뉘에 캔사스를 가져다 놓는 일을 한다. 곧 세계를 지역에, 지역에 세계의 소식을 변증(辯證)시킨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매우 독특한 글로벌 잡지로 성장시킨다. 월간지 ‘프렌치 디스패치’는 소수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하며 기자와 기사의 수준이 매우
#불안하다. 영화 ‘부산행’으로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가 ‘반도’와 ‘방법: 재차의’ 등으로는 비교적 혹평을 받았던 감독 연상호가 이번엔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으로는 글로벌 순위 1위에 올랐다. 연상호의 화려한 부활이다. ‘지옥’ 뿐만이 아니다. ‘오징어 게임’은 여전히 2위이고 ‘갯마을 차차차’, ‘연모’, ‘마이 네임’ 등도 인기가 최고 수준이다. 다들 국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최소한 28개국, 많게는 70여 개 국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K콘텐츠의 인기가 최절정이고 상한가 중에 상한가다. 그런데도 왠지 불안하다. 이런 분위기가 과연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문화의 발전은 정치의 그것과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 영화와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는 더욱더 그렇다. 중국의 영화계가 제5세대 감독(첸 카이거, 장예모)과 제6세대 감독(로예), 지하전영 감독들(지아장커)의 영광에도 불구하고 왜 걸작의 불모지가 됐는 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시진핑의 권위주의 국가 시스템 때문이다. 정치가 닫히면 영화가 닫힌다. 일본의 영화와 드라마들이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하마구치 류스케 같은 감독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변방으로 밀려났는지도 아
새로 나온, 아니 오랜만에 극장가에 나온 한국영화 ‘장르만 로맨스’는 알고 보면 장르는 로맨스 영화다. 로맨스 장르가 아닌 척해도 사실은 뼛속 깊이 로맨스 영화인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로맨스들이 심상치가 않다. 예전 같으면(라떼에는) 애들이 보기에 ‘좀 그런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겠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장르만 로맨스’는 흔히들 얘기하는 현대인들의 성 인지 성향, 우리 사회 속 차별 문제에 대한 자의식 등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잣대와 같은 작품일 수 있다. 중년 남자 교수와 학생 간의 동성애와 이웃집 아줌마와 고등학생의 미묘한 연애담이 유쾌하게 곁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보수 기독교 단체 같은, 세상의 사랑에 대해 오도된 편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얘기한 것처럼 그런 설정들이 ‘곁들여지는’ 느낌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전면과 정면을 살짝 피해 가는 것처럼 보인다.이 영화를 만든 배우 출신의 조은지 감독은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이 영화가 갖는 궁극의 주제는 내가 사랑하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만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그 관계에
극장 한 켠에서 ‘은둔형’으로 개봉중인 미국 독립영화계의 기라성 같은 인물, 켈리 라이카트의 영화 ‘퍼스트 카우’는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첫 젖소’이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지 전혀 짐작하기 힘들게 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다 보면, '아 이런 얘기도 영화로 만들어질 수가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갖게 된다. 여기서 이런 얘기란, 말 그대로 별로 이야깃거리가 안 되는 얘기가 시나리오로 쓰여질 수 있다는 측면과 이런 이야기조차 제작과 투자가 이루어진다는 생경함 같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겨져 있다. 글쎄, 대체 어떤 투자자가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를 ‘투자분이 회수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예술은 종종 있을 수 없는 기이한 용기의 결합에서 탄생한다. 투자와 제작, 연출, 촬영, 연기의 모든 면에서 이 영화 ‘퍼스트 카우’는 대단한 용기가 전제돼야 했을 것이다. 특히 연기자들이 놀랍다. 이런 얘기로 연기가 돼? ‘퍼스트 카우’는 19세기 미 북서부를 배경으로 한다. 퍼스트 카우. 그러니까 한 마을에 처음으로 젖소 한 마리가 들어 오게 되고 이 젖소의 젖을 두고 벌어지는 일종의 암투극이다. 코미디라고? 절대 코미디가 아니다. 실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