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노 남보쿠(1757~1834)는 200년 전 일본의 관상가다. 열살에 조실부모(早失父母)했다. 그 때부터 술을 마시고 싸움질을 밥먹듯 했다.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도박에도 손을 댔다. 마침내 열여덟 살에 감옥에 들어간다. 그는 "짐승 보다 못한 삶이었고, 스물 전에 죽을 운명"이었다고 고백했다. 감옥에서 소년의 인생에 대반전이 일어난다. 죄수들의 관상과 행태를 유심히 보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도 교도소를 '인생대학'이라고 하는 걸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그곳은 '역설의 대학'이다. 그 관찰력은 훗날 그의 성공에 큰 자산이 된다. 출옥하자마자, 이름 높은 관상가들을 찾아다녔다. 한 사람이 "1년 안에 칼 맞아 죽을 팔자"라고 단언하며 스님이 되길 권한다. 절에 가서 사정을 고백하고 받아주길 청했으나, 스님은 "1년 동안 콩과 보리만 먹고 다시 오라"고 말하며 내려보낸다. 그는 약속을 지키고 절에 가던 길에 검난(劍難)을 예언했던 관상가를 찾아갔다. "무슨 큰 공덕을 행하여 관상이 완전히 달라졌는가?"물었다. 그 후 청년은 스님이 되는 걸 포기하고 관상가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는 이발소에서 3년은 두상과 면상을, 목욕탕 때밀이 3년간
큰 스승으로 모시는 어른들 가운데 세계적인 육종학자 한상기 박사(1933~ )가 계시다. 서울농대를 거쳐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박사를 하고 모교의 조교수가 되었을 때, 이 젊은 학자는 두 가지의 기회 앞에 섰다. 38세. 하나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식물육종학 연구소, 또 하나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의 국제열대농학연구소. 그는 이 순간 미국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을 떠올렸다. "...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훗날 나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일왕불퇴(一往不退:한번 가기로 했으면 결코 물러나지 않음)의 주사위를 아프리카 대륙 위에 던진다. 1970년대 아프리카는 내전, 자연재해, 전염병에, 매해 50만 명이 굶어죽는 슬픈 땅이었다. 역시 굶주림이 가장 크고 시급한 숙제였다. 설상가상, 주식인 '카사바'(cassava)의 고사현상이 전대륙에 걸쳐 벌어지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백이면 아흔 아홉은 캠브리지를 택할 것이다. 한박사의 사명은 23년간 단 하루의 결근도 없이 헌신적으로 지속되었다. 슈바이처가 활동했던 가봉의 랑바레
z는 매일 죽고 싶었다. 엄마는 십년 넘게 정신병원에 입원 중이다. 아버지는 몸이 심하게 상하여 일을 못한다. 학교에서는 늘 난폭한 놈들의 학대를 받았다. 교사들은 결코 좋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보통의 어른들과 다른 존재 아닌가. z는 그들을 믿지 않았다. 고교를 간신히 졸업한 z는 어두컴컴한 방안에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죽음만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위하여 작은 의지도 힘도 없었다. 죽음이 곧 해방이었다. 그래서 소멸의 날을 기다리며, 최선을 다해 절망적인 인생을 마무리 하려했다. 마침내 D-day가 다가왔다. 지옥에서 마지막으로 어떤 어른들을 만났다. 나이 스물 넘도록 단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외계인' 커플이었다. 부모나 친척, 교사나 또래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과 표정, 눈빛이 달랐다. 충격이었다. 따뜻했다. 다정했다. 희망적이었다. 부드러웠다. 도움을 기대해도 될 것 같았다. 긴 시간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또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z는 이제 스물 여섯살이다. 마주 앉은 이가 그 누구든,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필요를 위한 최소한의 의사표시조차 못하던, 그래서 잠
조선 중기에 천재 딸 셋이 태어났다. 그들의 삶은 하나같이 비운(悲運)의 시간이었다. 황진이 허난설헌 이숙원이 그들이다. 여염집 처자가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것은 대개 불행의 원인이었다. 치명적인 저주가 되기도 했다. 몽매하고 흉악한 시대였다. 황진이는 시서화무(詩書畵舞)의 탁월한 종합예술가로 당대를 풍미했다. 기생이었기에 가능했다. 성리학이란 게 이 얼마나 난폭한 세계관인가. 난설헌과 진이에 비하여 덜 알려진 숙원은 이들 못지않은 천재였다. 왕실 후손으로 출세길을 마다하고 시골 군수를 지냈던 이봉(李逢)의 서녀였다. 멸문폐족의 한 처자와 화합하여 얻은 이 특별한 딸은 아비의 문재를 내려받아 총기 넘치고 영민하였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호를 옥봉(玉峰)이라 지었다. 이봉은 '옥돌이 아름답게 솟아오른 봉오리'에 크게 감탄했다. 그날부터 숙원은 옥봉이 되었다. 그 이름은 아비가 하늘까지 높여준 자존감의 기호였다. 딸은 무시하고 첩의 딸은 더욱 심하게 냉대하는 천형의 세상에 던진 돌팔매였다. 옥봉은 열다섯에 당시 젊은 관리 중에 가장 촉망받던 엘리트 조원을 찍어 그의 소실로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이봉은 딸을 위하여 그에게 청혼한다. 일언지하에 거절당하는 수모를
故 장준하 선생(1918-1975)이 저자다. 스무살 때 처음 읽었으니 어언 40년이 넘었다. 그 감동은 줄지 않았다. 그간 또래나 후배들에게 선물한 것만 족히 백 권은 넘는다. 기회 있을 때마다 읽기를 권해왔다. 10여 년 전, 대학생들에게 씨알사상을 강의할 때는 아예 필독서 리스트에 올렸다. 요즘 청소년들은 안타깝게도 김구도 안중근(응칠)도 잘 모른다고 한다. 장준하를 알 리가 없다. "안중근 의사를 안과의사라고 하는 애들도 있다"는 중학교 교사의 탄식도 들었다. 그렇게 자란 친구들이 이 특별한 책을 읽고 발표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뭉클했다. "졸업하고 세상에 나가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장준하 선생처럼 살겠다"던 학생대표의 스피치를 들으며 목이 메었다. 아, 장준하! 박정희의 정적이 둘이라면 장준하와 김대중이다. 하나라면 장준하다. 그래서 먼저 죽인 거다. 독립군 출신 정치인으로서 "독립군을 사냥하던 박정희만은 안된다"며 저항했던 선생은 박정희의 독재가 극한으로 치닫던 1975년 8월 포천의 약사봉에서 암살되었다. 추락사로 위장된 그 더러운 역사는 먼 훗날(2013년 3월 26일) 타살로 결론이 났다. 장준하, 김준엽 등 50여 명의 청년들이 7개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친구인 현인 유하혜(柳下惠)의 동생이다. 그러니까 대략 2500년 전 인물이다. 9000명이나 되는 졸개들을 거느리고 전국을 종횡무진하며, 재산약탈, 양민학살, 식인, 부녀자 학대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특수강도였다. 맹자, 장자, 사마천의 사기에도 나온다. 도척은 이름처럼 '최고의 도적'으로 2500년 동안 특별한 존재다. 공자가 그 형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사람 만들어주겠다고 만난 적이 있다. 놀랍게도, 공자는 도척의 긴 시간 훈계를 들은 뒤 심한 모욕을 당하고 쫓겨났다. 공자가 수레에 탄 뒤에도 머리를 숙이고 부들부들 떠는 장면이 장자 잡편에 상세히 나와 있다. 훗날, 장자의 제자들이 '소설 쓴 거'라는 설이 있다. 왕초와 부하들과 나눈 대화다. "도둑에게도 도(道)가 있습니까?" "그 어디를 가봐라. 길이 없는 곳이 있는지... 집안에 재물이 어디에 있는지, 그걸 정확히 찾아내는 것은 성(聖)스럽다. 앞장서는 것은 용기(勇)다. 다 털고 가장 늦게 나오는 것은 의리(義)다. 과업을 실행할지 말지 판단하는 것이 지혜(智)며, 목표를 이룬 뒤에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어짊(仁)이다. 이 다섯 가지 道(聖勇義智仁)를
'동장군'(冬將軍)이라고까지 높여 부르는 삭풍혹한도 입춘, 우수에 이어 개구리처럼 동면하던 생명들이 여기저기서 기지개 켜는 경칩이 되면 무장해제한다. 자연의 법칙이다. 꽃들도 제각기 볼록한 가슴을 열어 자부심을 뽐낸다. 모두가 양춘가절(陽春佳節)의 주역으로 생명축제의 들판에 진출하는 것이다. 봄은 기화요초(琪花瑤草), 만화방창(萬化方暢)의 시간이다. 선남선녀들은 두터운 겨울옷을 벗어던지고 산야대지로 뛰어나가 약동하며 그 맹추위의 기나긴 억압을 떨치려 한다. 이 자유는 흡사 해방을 맞은 식민지 민초들에게 주어진 고귀한 선물과 같다. 이때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불청객이 있으니 그 이름은 '꽃샘추위'. 4월에도 마치 한겨울로 되돌아간 듯 맵찬 눈보라가 몰아친다. 나의 군복무 시절, 강원도 화천 대성산에는 5월에도 눈이 내렸다. 꽃샘추위는 우리의 인생에도 봄 속에 겨울이 있고, 겨울 속에 봄이 있음을 극적으로 가르친다. 그 어느 날 칼바람 불던 새벽. 보초교대하고 하산, 행정반에 신고하러 내려가는데, 조리하는 냄새가 멀리까지 진동하였다. 개구리 매운탕이었다. 와공 일당은 긴 겨울잠을 멈추고 기어 나오던 날 팽형(烹刑)을 당하여 전방병사들의 술안주가 된 것이다. 이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궁극적 목표였다. 민비와 그 척족이 권력을 쥐고 농단하는 동안, 나라는 늘 풍전등화였고,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싸우던 외세(청나라와 일본)는 그 존재자체가 생존의 위협이었다. 전봉준은 그 일체의 학정과 위협을 사즉생과 임전무퇴의 정신으로써 대항해야 할 폭력으로 인식했다. 그것이 동학농민혁명의 동기다. 그 폭력을 제거해야만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백성을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이 나라를 돕는 일이며, 그 때 비로소 씨알들의 삶이 편안해진다는 것이 동학군의 신념이었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고부에서 시작하여 전주까지 파죽지세로 달려갔다. 관군에게 압승을 거둔 농민군은 혁명전사로 변했다. 그 마음으로 우금치까지 폭풍 진격했다. 아쉽게도 거기까지였다. 겨우 200명의 일본군과 3000명의 관군이 연합하여 2만명의 동학군을 전멸한 것이다. 대포와 최신형 기관총으로 공격하는 일본군에게 화승총과 죽창으로 대항한 '아군'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다. 130년 전, 그 조상들이 당했던 폭력은 치명적이었다. 안팎으로, 무능하고 악마적인 왕조와 외세(청나라와 일본)는 잔인무도한 폭력집단이었다.
텔레비전을 없앤 지 20년째다. 당시 애들 엄마는 드라마 작가, 나는 정치컨설턴트였다. 세 아이 모두 초등학생이었는데, 어느 날 오후, "이 놈들이 TV에 중독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리사이클링업체에 주었다. 물론 과격했다. 애들은 잠시 금단증세를 보이더니 이내 받아들였다. 그 해 여름 한일 월드컵 때, 놈들은 온 세상이 왜 붉은 티셔츠 입고 미쳐서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지 모른 채 그저 눈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했다. 그 표정들 잊을 수 없다. 요즘 우연히 소위 '먹방'을 접할 때가 있는데, 그 프로그램에 배치된 거구의 연예인들과 그 기획의도를 보며 식욕이 동하기는커녕, 측은지심과 함께 화가 치민다. '폭식'은 단순히 식도락이 아니다. 정치 경제의 으뜸주제를 그토록 탐욕적이고 희화적으로 추락시켜 긴 시간 전파를 낭비하는 건 옳지 않다. 먹고사는 일의 품격을 높이자. 폭식은 우선 자학이며, 굶주린 사람들을 희롱하고 고문하는 폭력이다. 그로 인한 비만은 정신병이다. 다양한 먹거리들의 특징과 장점, 검증된 약성(藥性) 등을 재미있게 알려주면 안되나. 그 협찬금의 일부를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하여 기부하는 걸 병행하는 건 어떨까. 단 한번이 아
어머니께서 7년째 병원신세를 지며 힘들게 사시다가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 1935년생 88세, 미수(米壽)시다. 아들과 마지막 통화하시고 한 시간 뒤에 눈을 감으셨다. 나는 그 이틀 전 병원측의 협조로 어머니 곁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행운이었다. 임종의 도리도 지키기 힘든 시대다. 돌이켜보면,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빠르고 현저하게 어머니의 체력이 약화되었다. 어머니는 마침내 혼자서 걸을 수 없어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만 짧은 거리나마 어렵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화장실 출입이 고난도 프로젝트가 되었다. 최근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서 식사나 자잘한 목적을 위하여 움직이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기능이 전반적으로 제로로 향하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최근에는 구급차를 불러야할 응급상황이 빈발했다. 특히 승하차 과정이 정말 위태로웠다. 그 길고 험난한 시간을 동생이 24시간 보초병처럼 어머니를 보살폈다. 큰 상금이나 무공훈장을 준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명을 자발적으로 감수한 그 아들에게 어머니는 큰 복을 주실 것이다. 그 특별한 보살핌이 자발적이지 않다면 이는 단지 억울한 희생이고 노예 노동일뿐이다. 이 미담을 세상이 알면 좋겠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