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1936년 음력 5월 13일 양(량)강도 후창군에서 태어났다. 양강도는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접해 있어 양강도라 부른다. 어머니 고향은 동해안에 위치한 함경북도 어랑군이다. 두 분은 일제강점기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 부모님을 따라 두만강, 압록강을 건넜고, 신중국에서 사회주의 실험을 하던 격변의 시대 만났다. 그리고 196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시기 어린 두 아들과 두만강을 건너 북조선으로 갔다. 조선족 자치주인 연변에서는 북한을 북조선이라 부른다. 아버지는 함경남도에 있는 고원탄광(수동구 장동)으로 배치 받아 얼마동안 노동자로 일했다. 의사를 했다는 증인을 찾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3명의 증인이 있어야 하는데 2명 밖에 찾지 못했으므로 속성으로 의사시험을 보았다. 속성 시험을 보면 준의사 자격을 주었다. 준의사는 의사, 간호사 중간에 위치한다. 당시는 의사와 준의사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후에 의사가될 기회가 있었는데 그냥 준의사로 남았다. 병원에서 학위나 학벌은 중요하지 않고 진단과 처방을 잘하는 의사가 존중받는다. 진단과 처방은 즉시 효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기술을 터득하지 않으면 학위가 있다 할지라고 지속하기
함흥-흥남은 북한 최대의 보건의료 중심지이다. 함흥에는 고려약학대학과 함흥의학대학, 함흥의학대학병원, 산업의학연구소, 임상의학연구소, 구강병예방원 등 있다. 흥남에는 북한 최대합성의약품 생산기지인 흥남제약공장이 있다. 평양에 이보다 더 많은 의료 시설이 있다. 그럼에도 함흥을 보건의료 중심지라고 하는 것은 최초라는 의미와 최대 규모, 의료기술에 있다. 함흥은 이제마 사상의학이 발원한 전통적 도시이다. 동의학(한의학)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여준 이제마의 사상의학이 함흥이라는 전통적 도시에 영향을 주었다. 해방 후에도 동의학 의술이 이어져 경락이라는 독특한 의술이 개발되기도 했다. 1968년 최초로 생겨난 함흥약학대학은 1990년 함흥고려약학대학으로 개칭했다. ‘고려’에는 동의학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동서의학을 결합한 약학부분 전문가를 양성한다. 함흥의학대학과 함흥의학대학병원은 1946년 생겨난 북한 최초 보건의료인 양성기지이다. 의학전문학교를 개편하여 생겨난 의학대학과 대학병원은 함흥시 회상구역에 있다. 주·야간을 겸하고, 동의학과 신의학을 공부한다. 대학생 임상실습기지로 함흥의학대학병원이 있다. 말단기관인 진료소를 거쳐 각 시,군에서 치료가 어
동해안에 위치한 함흥-흥남은 오래전부터 이름난 명태어장이다. 함흥에서 동쪽으로 흥남 항구가 있다. 항구가 생겨나기 전 서호진 앞바다에서 명태가 많이 잡혔다. 명태가 많이 잡혔으므로 가공시설도 발달했다. 특히 흥남이 화학공업도시로 되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명태수요도 많았다. 멘타이코로 불리는 명란젓은 일본인들이 함경도 특산인 명란을 가져다 만든 것이다. 명태는 김장철인 지금 적기이다. 11월부터 1월까지 많이 잡히는데 특히 12월과 1월에 많이 잡힌다. 명태를 넣으려고 일부러 김장을 늦추기도 한다. 1980년 중반부터 명태가 사라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금태가 되었다. 명태가 한창 잡히는 성어기에는 항구에 명태가 산처럼 쌓여 그것을 가공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지금은 명태 치어를 방류해서 명태생태계를 복원하려고 하고 있다. 명태의 고장인 함흥-흥남 지역은 명태로 만든 음식이 유명하다. 명란은 소금에 한번 절인다음 마늘과 고춧가루를 넣고 삭혀서 먹는다. 짠 맛의 명란젓이 아니라 새콤한 맛의 명란젓을 만든다. 창란젓은 명태 내장을 손질해서 고춧가루 마늘에 버무려 만든다. 명태식해는 명태를 좁쌀과 버무려 발효시켜 먹는다. 혹은 좁쌀을 넣지 않고 명태를 버무려 따
함흥시는 동해안에 위치한 평양 다음으로 큰 지방도시이다. 해방 후 함흥의 자연 지리적 환경과 화학산업 특성으로 주목을 받아 성장한 도시이다. 함흥 동쪽에 위치한 흥남은 일제시기 생겨난 당시 세계적 규모의 흥남비료공장이 있다. 식의주 문제가 급했기에 김일성은 함흥을 ‘노동계급’의 도시로 만들려 했다. 1990년 이전까지 특별한 주목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함흥은 식의주 문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소도시를 지향하는 체제의 특성상 함흥-흥남이 백만이 넘는 대도시로 된 것은 이례적이다. 함경남도 소재지이며 크고 작은 공장 기업소가 몰려 있다. 함흥시 중심에서 조금 벗어나면 벼와 강냉이 밭이 무연하고, 나지막한 곳에는 사과 배를 심은 과수원이 있다. 과수원에는 특히 사과나무가 많다. 수확한 국광사과는 껍질이 두꺼워 움에 저장한다. 봄에 먹으면 사과 향기의 아삭한 맛은 표현할 길 없이 좋다. 홍옥은 껍질이 얇기 때문에 가을에 수확해 저장하지 않고 바로 소비해야 한다. 남쪽처럼 알알이 종이를 씌우는 수고는 없다. 수확하는 시기가 있기 때문에 종사자 아닌 사람들이 일손을 돕는다. 크고 작은 사과들이 가득히 쌓여 있는 곳에서 분류해 차에 실어 식품회사나 과일가게에 가져
신흥관은 함흥시 중심에 자리 잡은 규모가 큰 음식점이다. 1976년 준공되어 부지면적 2만2000㎡로 지상 2층, 지하로 1층에는 식사, 2층에는 연회장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유명한 함흥냉면이 나온다. 함흥에서 북서쪽으로 올라가면 신흥군이 있다. 신흥군은 일제시기 부전강, 장진강 발전소가 생기면서 번창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감자전분은 신흥군을 거쳐 함흥으로 흘러들었다. 감자는 오래전부터 함경도 지방에서 많이 재배되었다. 그래서 감자전분으로 만든 농마(녹말)국수는 함경도 지방 특산으로 이름 있다. 신흥군에서 들어온 감자전분은 농마국수로 만들어져 지금의 함흥 신흥관 명물이 되었다. 함흥에는 농마국수를 기막히게 잘 만들어 인기 있는 할머니가 있었다. 함흥 신흥관 농마국수 레시피는 그이가 만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함흥사람들은 냉면보다는 농마국수라는 말을 많이 한다. 사용하는 육수에 따라 온면과 냉면을 구분한다. 농마국수는 차게도, 따뜻하게도 먹는다. 따뜻한 농마국수는 고기국물을 부어 먹는다. 감자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에서는 농마국수를 일상으로 먹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는 농마국수를 별미로 먹는다. 함경북도, 량(양)강도, 자강도 사람들은 감자전분으로 만든
함흥남자라면 형부를 떠올린다. 농촌사람의 순박함이 묻어나는 듬직한 체구가 세련된 도시남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부모님이 언니와 결혼을 반대하니 속상한 형부는 어디가 그렇게 부족하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얼굴도 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건 다 싫다고 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건강한 체격에 듬직한 뒤 모습만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로부터 형부는 얼굴은 마주하지 않되 가능한 뒤 모습을 많이 보이려 노력했다. 뒤 걸음으로 들어오는 웃긴 장면도 있다. 형부와 언니가 결혼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부모님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다. 도시에 살고 있는 함흥남자는 ‘함흥얄개’란 말처럼 만만치 않다. 함경남도 소재지인 함흥에는 큼직한 행정기관과 공장기업소들이 맞물려 있어 생산품도 많다. 화학공업도시로 ‘고난의 행군’때에는 마약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각지에서 여러 사람이 모이다 보니 팍팍한 도시생활에서 손익계산에 빠르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말도 빠른 함흥남자와 말이 느린 형부와 향유하는 문화수준도 차이가 난다. 형부는 명절이면 농촌의 작은 문화공간에서 소소한 활동을 하는 반면 도시에서는 함흥대극장 중심에 모여 화려하게 성대하게 문화생활을 한다
‘정성운동’은 함흥-흥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북한에서 ‘정성운동’은 1961년 흥남에서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소년을 흥남비료공장 의료진과 함흥의대 실습생들이 자신들의 피부를 이식해 살려낸 이야기를 ‘정성운동’으로 호명한 대중운동이다. 160여명의 피부를 이식해 기적적으로 살려낸 방하수 소년의 이야기는 사회주의 인간형상 창조의 원형으로 불려진다. 사회주의 인간형상이란 자신의 피와 살을 남에게 주는 헌신과 희생정신을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정성운동’의 발원지인 함흥의학대학은 1990년 정성대학으로 개칭했다. 함흥-흥남은 어떻게 ‘정성운동’의 발원지가 되었을까. 당시 북한은 해방과 함께 전쟁으로 파괴되고 몹시 가난했다. 남북의 체제 대립이 심했던 냉전시기 사회주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무엇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먹고 입는 문제부터 해결해야했다. 화학공업지대로서 천혜의 자연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 함흥-흥남에는 숙련된 노동력과 산업시설이 밀집해 있었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함흥의 재건은 최대의 관심사였다. 함흥과 흥남의 중간지점에 건설된 2.8비날론 공장은 전 국민의 관심과 지원으로 세워졌다. 함흥-흥남이 재건되는 과정에 생겨난
북쪽 고향에 있을 때 옆집으로 함흥여자가 시집왔다. 목소리도 굵고 행동도 씩씩한 그는 결혼 전까지 직장 출근하면서 단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러한 성실함으로 당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렵다는 입당도 했다. 공로가 커서인지 함흥여자는 내가 사는 동네에 시집와서도 괜찮은 직장 간부를 하게 되었다. 함흥여자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아 참으로 피곤했다. 어려웠던 1990년 고난의 행군 시기가 되자 많이 유연해졌다. 본인 자신도 아이 넷에 시부모까지 살려야 하는 생사의 기로에 있었다. 그리고는 동네에서 제일 먼저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라고 하면 부끄러워할 때 체면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나 했다. 나는 함흥에 외사촌들이 살고 있고, 친언니도 그곳으로 시집을 갔기에 함흥으로 자주 다녔다. 그때 만났던 함흥여자들은 억척스럽다. 억양이 높은 함흥 사투리로 말시비가 붙으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몸치장은 덜 하더라도 집 안에 있는 그릇은 빛이 나도록 반짝이게 닦는다. 남쪽에서 함흥 출신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개성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함흥여자들로 어쩔 수 없는 지역 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북쪽에서는 함
함흥 사람들은 유별나게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함흥 사람들은 평양과는 라이벌 관계라고 생각한다. 1980년대 건설된 함흥시 중심에 있는 함흥대극장은 평양대극장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건설해 비판을 받았다. ‘함흥얄개’ 또는 ‘함흥내기’로 부르는 함흥사람들은 군 생활이나 공동체 생활을 할 때에도 우두머리를 하는 경우가 많고, 나약함을 보이면 함흥사람이 맞냐는 의심을 받는다. 최고의 신부감으로 함경남도 지역 여성을 꼽으며 알뜰하고 생활력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함흥하면 지역주의가 강하고 생활력 강한 여성들이 살고 있다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지방주의 온상’이라는 말은 해방이후 생겨났다. 함흥-흥남지역은 산업시설이 많은 관계로 일제시기 노동운동이 활발했다. 1930년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저임금과 학대로 인한 최초 파업은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화학공장에서 생산하던 질소는 전시에는 폭탄이 된다. 군수품을 생산하는 이곳에 사회운동가들과 문학가들이 거쳐 갔다. 해방 후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으로 입국한 김일성은 각계정파들과 권력을 다투어야 했는데, 그 중 국내공산주의자였던 오기섭과의 노선투쟁은 이후 북한의 정치사에 영향을 주었다.
사회주의적 도시는 계획된 도시이다. 국가는 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하면서 사회주의적 이념을 공간에 투영한다. 사회주의적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도시 중심에 광장이 있고 기념비나 동상, 문화시설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자본주의 도시와 반대로 사회주의적 도시는 금융시설이나 소비를 위한 쇼핑센터보다는 문화시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적 도시 설계자들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식민시기 최초의 기업도시를 만들었던 흥남은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쾌적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기획하고 건설되었다. 고급시설을 갖춘 일본인 거주지는 구역으로 나뉘어 등급에 따라 거주했다. 이를 ‘흔히 보는 도시의 모양과 다른 소련식 신흥도시였다’고 기록한다. “흥남은 2년도 안 되는 사이 흥남부(府)로 되고 인구 약 18만 명의 함남도 제1의 대도시로 되었다. 일본인 인구는 조선 전체에서 제3위이고 물동량은 하루 1만 톤에 이르렀다. 쇼와(昭和)초기부터 동양 제일의 화학공장이 생겨난 것은 대 수력 발전에 의해 풍부하고 싼 전력이 개발된 것과 더불어 일본 질소 노구치(野口)사장의 강렬한 의욕과 젊은 기술진의 총결집 나아가 개발을 지원하는 자금원이 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공장의 부대설비로는 스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