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 언론은 지난 16일 정의당 류호정 의원의 훤히 드러난 등을 클로즈업했다. 타투업법 제정을 촉구하는 사람들의 팻말은 상대적으로 작게 처리되거나 생략되었다. 류 의원의 등만 부각된 것이다. 류 의원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퍼포먼스는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정치인 류호정'이 어필했을까? '자연인 류호정'이 어필했을까? '반라의 등'이 어필했을까? 무엇이 어필했든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정작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휘발되었는지도 모른다. 왜 이런 현상이 빚어질까? 대중들이 메시지보다 메신저만 바라보아서 그럴까? 메신저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그럴까? 이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우문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는 자극적인데다 일방적인 포르노에 깊이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류 의원은 포르노그래피 퍼포먼스를 애용한다. 포르노그래피는 재독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한병철 선생이 일련의 철학 에세이를 통해 그 위험성을 경고해 온 주제다. 그의 논리를 빌리면 자기성애의 포르노그래피는 일방적, 즉흥적, 폭로적이다.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는 나르시시즘이기 때문에 타자는 안중에 없다. 타자의 추방인 것이다. 이를 류
형은 정의당을, 나는 민주당을 찍었습니다. 촛불 혁명 이후 말입니다. 형과 나는 동시에 낙망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맘 둘 정당이 없다고 씁쓸해했습니다. 형은 정의당이 대학 동아리보다 못하다고 혀를 끌끌 찼고, 나는 민주당이 무능력한데다 새로움이 없다고 분개했습니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실토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우리는 비판했습니다. 그 말에 따르면 정치는 더 이상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치적 동물인 인간은 허망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무한 시장 경쟁주의인 신자유주의를 있는 그대로 본 노 전 대통령의 솔직한 심정을 모르지 않습니다. 권력은 과연 시장으로 넘어갔을까요? 정치는 하위범주일까요? 정치는 경제를 변화시킬 수 없는 걸까요? 전 세계적 현상인 살인적 경제 양극화는 조금이라도 좁힐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일까요? 형과 나는 치열하게 논쟁했습니다. 촛불이 세운 문재인 정권마저 양극화를 심화시킨 것을 보고 우리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세계적 저금리에 따른 유휴 자금의 발 빠른 이동 등 부동산 가격 상승의 기초 조건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문정부의 숱한 정책 제시에도 부동산 폭등을 막아내지 못해 여전히 정치가 경제 불평등 완화에 무력하다
"왜 어린 애들에게 미사일을 쏘아 죽이려 하는 거죠? 정말 불공정합니다.”(팔레스타인 소녀 나딘 압델 타이프가 지난 15일 중동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점점 팔레스타인의 숙명에 익숙해지고/ 우리 삶이 감옥이 되어 갔다는 것/(....)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요/ 이미 그때 내 삶은 죽음과 손잡고 있었으니까"(2011년 출간된 정한용 시인의 『유령들』에 실린 시 '레퀴엠' 중에서) "이 무지막지한 이스라엘 군인 놈들아/ 내 자식 내 남편 내놓아라./ 이 갈갈이 찢어 죽일 아브람, 모세, 다윗, 솔로몬의 새끼들아/ 통곡의 벽 안쪽은 그 벽 밖의/ 통곡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 외신은 울음의 전도체인가, 아닌가"(1983년 출간된 황지우 시인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실린 시 '베이루트여, 베이루트여' 중에서) 2021년, 2011년, 1983년. 팔레스타인 소녀와 한국의 두 시인이 40년이라는 시간 격차 안에서 절규한 이 연도들은 무엇을 뜻할까? 너무 명백해서 묻는 것 자체가 부질없다. 팔레스타인 상황은 그만큼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지난 20일(현지 시각) 휴전하기로 합의했지만 합의서는 두루마리 화장지
문재인 정부는 '지주의 나라'로 가고 있던 대한민국을 어떤 나라로 인도하고 있을까? 봉건 사회로 더 깊이 내몰고 있을까? 현실로 맞아야 할 현대적 나라로 운전하고 있을까? 그 답은 이즈음 신조어가 된 '벼락 거지'가 대신할 것이다. 이 정부 들어 서울과 수도권 주요 도시의 아파트 가격이 100~300% 상승한 것은 단순한 상승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죄도 짓지 않은 50%의 무주택자들에게 피눈물이기 때문이다. 3~10억 선인 아파트 가격 상승분은 보통사람들이 10~100년 정도 저축해도 손에 쥐기 어렵다. 따라서 내 집 마련은 하늘의 별 따기다. 폭등하는 전월세 비용 마련도 쉽지 않다. 그들에게 부동산 폭등은 삶이 뿌리째 뽑힘 그 자체인 것이다. 그들의 박탈감은 70년 대 산업화의 기념비적 소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소환한다. '낙원구 행복동' 판자촌에 살던 난쟁이 가족과 주민들은 재개발로 투기꾼들에게 입주권을 헐값에 팔고 뿔뿔이 흩어진다. 입주비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들과 현재의 무주택자들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살던 공간에서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것은 같지만 상대적 박탈감은 지금의 무주택자들이 훨씬 크지 않을까? 실제 상류층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 결과를 어떻게 봐야할까? 그간 쏟아진 분석 중에 와 닿는 게 단 하나라도 있는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이번 선거결과는 명료한 분석이 쉽지 않다. 이처럼 분석이 어려운 선거는 일찍이 없었다. 실제 문자로 쓰여 진 것들 중 고개가 끄덕여지는 분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답답해서 오래 전부터 알고지낸 신뢰하는 기자들이나 정치평론가들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두 개의 극과 극인 수치가 똑떨어지게 이를 대변한다. 4‧7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 수치와 지난 19일 보도된 JTBC 여론조사 결과 수치. 당선된 국민의힘당 오세훈 후보와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 간 득표율 차이는 무려 18.32%포인트. 그러나 투표가 끝나고 열흘 뒤 발표된 여론조사는 '야당이 잘해서 당선됐다'는 응답이 고작 3%. 심지어 국민의힘당 응답자들 중에서조차 국민의힘당이 잘했다고 평가한 건 4% 정도. 부동산 정책 실패와 LH사태, 코로나백신 대처 미흡, 무능과 오만, 불공정 등 정부‧여당에 대한 심판으로 야당에 몰표를 줬지만 그들이 잘해서는 절대 아니라는 표심은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것이다. 한 그릇을 반분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심설당) 도입부에 나오는 이 문장은 아름다워서 책만큼이나 유명하다. 그런데 과연 그런 시대가 있었을까? 하지만 이를 역사적 실존의 문제가 아닌 인문적 상상력의 문제로 보면 쉽게 와 닿는다. 별빛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지식인들이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가 있었다. 몇 년 전 작고한 전 한양대 리영희 교수는 그런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책과 칼럼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문장, 빽빽하게 차 있는 사실 관계, 명확한 인과 관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메시지. 판금도서였던 그의 명저『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비평)는 군사정권을 폐부에서 균열내기에 충분했다. 거짓된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비판해 당시 한국 사회가 우상을 걷어내고 이성을 회복하는데 소금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즈음 기성 언론이 간판급 지식인으로
"진보를 자신의 특허품인 양 떠드는 진보 꼰대나 상식조차 지키지 않는 수구 꼰대나 거기서 거기 같아요." 한동안 20대들하고 책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계급장'을 떼고 매번 수평적으로 토론을 벌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속내가 드러났다. 여론조사나 경제통계 수치 등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20대들의 감성을 들여다본 것이다. "우리는 알바족이잖아요. 술집이나 음식점, 편의점, 백화점 등에서 생활비를 벌기위해 감정 노동을 하죠. 기성세대들에 대한 이미지는 그들과 부딪혀서 생긴 감정의 결과물이죠." 재일 동포 철학자 강상중 전 도쿄대 교수의 말을 빌릴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 (사계절)에서 인간의 이성은 변화가 가능하지만 감성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보통 관념과 정반대 사유다. 감성을 인간 이해의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일테면 20대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진보든 수구든 하나의 달걀 꾸러미에 넣어 계열화해서 자신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분류한다. 이처럼 감성의 성은 생각보다 크고 견고하다. 이제 여론조사 분석이 가능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벌이는 정치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여자배구 국가 대표 선수 등 스포츠 스타들의 과거 폭력 문제로 떠들썩하다. 그들이 10여 년 전 초중고 시절에 벌인 일들은 끔찍해 입에 담기조차 힘들다. 스포츠 선수들의 과거 폭력을 현재화해 엄벌에 처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전근대성을 벗어나고 있다는 하나의 조짐으로 읽힌다. 폭력은 단순히 나쁘다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타자를 굴복시켜 주종 관계를 일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이 기득권층의 무기이자 숨겨진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인간의 역사가 이를 증언한다. 멀리 갈 것 없다.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합법을 가장한 제도적 폭력이 지금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기득권층이 자신들을 특권화하는 수단으로 가하는 이 수직적 폭력을 보통 사람들이 내재화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평화와 정의, 민주주의와는 정반대 지점에 있는 폭력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체화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할까? 정당성 없는 지배질서는 당연히 멈추지 않는다. 멈추기는커녕 합리화해주기 때문에 더욱 견고해진다. 내재화한 폭력은 자연스레 자신들과 엇비슷한 부류인 보통 사람들에게 향한다. 프랑스 의사이자 알제리 독
일반인인 조민씨에 대한 기성 언론의 낙인찍기는 무얼 뜻할까? 그 광기는 그저 하나의 미친 짓에 불과한 것일까? '조민 낙인찍기 현상' 이면에 무엇이 똬리를 틀고 있을까? 일단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정반대 지점에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나치 체제에서 유태인들을 죽음의 가스실에 몰아넣었던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에서 아렌트는 새로운 발견을 한다. 명령에 따라 악인 줄도 모르고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한 아이히만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이라는 통찰. 그의 죄는 '무사유'였다. 그렇다면 의식적 '사유' 속에서 어떤 죄도 짓지 않은 유태인들을 낙인찍어 아이히만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죽이라고 명령한 이들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악의 평범성? 악의 특별성? 누구나 악의 특별성이라고 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의 특별성을 한국 사회에 대입하는 상상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특별한 소수의 특별한 악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요소들이 장막의 역할을 한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다원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열린사회란 점도 하나의 장막일 것이다. 그 형식은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작용해 사물을 제대로 보는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한국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어느 정도나 될까? 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이라는 통계는 널리 알려져 있다. 가장 최근인 지난해 형사사법기관들의 국민 신뢰도 추이에서 법원은 35.3%를 기록했다. 더불어민주당 소병철의원이 형사정책연구원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로 OECD 통계와 맞아 떨어진다. 판결을 톺아보면 밑바닥인 신뢰도 통계수치가 더 떨어져야 하는 것인지, 억울한 것인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이즈음 판결 몇 개만 비교해보자. '지난 총선 당시 재산 11억 원을 누락 신고한 국민의힘당 조수진 의원, 벌금 80만 원(의원직 유지) VS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인턴한 대학생에게 증명서를 발급해준 열린민주당 최강욱 의원,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원직 상실)', '86억 원 횡령-배임-뇌물 삼성 이재용 부회장, 징역 2년6개월 VS 회삿돈 10억 원 횡령한 삼성물산 직원, 징역 3년 6개월', '350억 원 은행 잔고증명서 위조한 윤석열 검찰총장 장모, 불구속 기소 VS 증거없이 판사가 표창장 위조했다고 본 정경심 교수, 징역 4년'. 어떤 판단이 서는가?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창비) 개정판에 따르면 한국 판사들의 재량권은 외국에 비해 훨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