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아도르노는 말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떠올리면 아도르노의 절규는 상식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아우슈비츠 이후 줄기차게 서정시를 써왔다. 아도르노가 살아있다면 얼마나 통탄해했을까. 우리나라의 사정은 더할 것이다. 통계로 잡힌 건 없겠지만 생산되는 시 대부분이 서정시 부류에 속하는 것 같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등식이 성립한다. 서정시는 인간과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문학 장르라는. 이 등식이 맞으면 아도르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도 인간에 의한 인간의 학살을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그렇다. 서정시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서정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아우슈비츠 등 인류의 숱한 학살을 형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명란 시인의 '아우슈비츠 이후'가 좋은 예다.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이후에도 나는 밥을 먹었다/ 깡마른 육체의 무더기를 떠올리면서도/ 횟집을 서성이며 생선의 살을 파먹었고/ 서로를 갉아먹는 쇠와 쇠 사이의/ 녹 같은 연애를 했다/(부분) 그렇다면 서정시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열망보다 허망이 압도적으로 앞서는 지금과 같은 대선 상황이 있었을까? 이즈음 여론조사 결과가 심상치 않다. 대선 주요 후보들에 대한 비호감도가 각각 60% 선으로 호감도보다 대략 2배 이상 높은 것이다. 실제 한국갤럽이 지난 19~21일 전국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여야 대권주자 개별 호감도를 물은 결과 '이재명 32%, 홍준표 31%, 윤석열 28%' 순을 기록한 반면 비호감도는 '윤석열 62%, 이재명 60%, 홍준표 59%' 순으로 나타났다. 대선 국면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다. 새 시대정신으로 지난 시절의 한계를 극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바람은 자연스럽게 대선 후보에게 투영된다. 그런데 호감도보다 비호감도가 2배가량 높다는 것은 그들에게 희망을 접었음을 뜻한다. 요컨대 유권자들은 가장 큰 열망으로 정권 교체를 들고 있는데 여기에 부합하는 대선 후보가 없다고 본다. 이 때문에 후보들이 새 비전을 제시해도 먹히지 않는다. 이 심각한 위기는 후보들의 구태에서 온 게 아닐까? 후보들은 상대방의 부패와 비도덕성을 놓고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유권자들이 자신들을 버린 지도 모르고 이전투구에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오래된 편견
딱지치기,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줄다리기, 구슬치기, 오징어. 한국의 전래 어린이 놀이를 끌어다 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여러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이 세계인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이 드라마에는 콘텐츠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장치가 촘촘하게 들어 있다. 공포물, 게임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플롯, 소외된 자들의 서사, 화려한 무대장치, 컬러와 도형이 주는 상징 등 어느 것 하나를 뽑아 즐겨도 부족함이 없다.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조롭고, 단조로운 것 같으면서도 복잡하다. 훌룽한 예술 작품처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한국의 전래 어린이 놀이가 아닐까? 어떤 사회적 요소가 깃들어 있기에 드라마에서 재구성을 했고, 이질적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것일까? 차용된 놀이를 들여다보면 윤곽이 잡힌다. 놀이에서 지면 혹독한 결과가 따른다. 딱지치기와 구슬치기 등의 경우 지는 쪽은 자신의 것을 빼앗겨 빈털터리가 된다. 오징어는 드라마에서 "육체적이며 폭력적"이라고 말했듯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죽는 건 예삿일이다.
이즈음 집단지성이란 말을 찾는 사람들이 드물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유행어였는데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한국 사회의 큰 에너지로 작동한 집단지성이 왜 이렇게 쪼그라든 것일까? 누구나 알고 있듯이 집단지성은 SNS 환경에서 태어났다. 손에 쥔 개별화한 디지털 기기로 세상에 참여해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말한 마셜 매클루언에 따르면 모바일이라는 새 미디어는 개인의 발견이다. 객체가 아닌 주체, 수동이 아닌 능동. 주체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걸러지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집단지성은 사회에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는 청량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통해 간선이라는 과두 체제에 일대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오죽했으면 민주당 송영길 대표가 집단지성을 대놓고 비난했을까? 송 대표가 언급한 속칭 '대깨문'은 어쨌거나 SNS에 기반한 집단지성의 한 흐름이다. 그만큼 정치권에 있어 집단지성은 눈엣가시라는 반증일 것이다. 그런데 이와 무관하게 집단지성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정치 논의가 활발해지기 마련인 대선 정국에서 새로운, 응집된 논리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
"이 선생님, 청와대와 민주당에 들어가 있는 운동권을 저는 심각하게 의심하고 있습니다." "......" "어떤 낡은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괴물들 같아요." "글쎄요, 동의하기 어려운데요. 팩트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정치권에 들어간 운동권 출신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긴 하지만." "시대에 역행하는 사고를 하고 있고, 그것을 실현시키려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봐요. 그렇지 않으면 정치권에 있는 운동권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이기 쉽지 않거든요." "김 선생, 나는 정치권 운동권들이 차라리 이데올로기적이었으면 해요." "......" "정치권 운동권들은 대부분 기존 철학을 버렸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시대에 맞는 어떤 새로운 철학을 받아들인 것 같지도 않아요. 상당수는 타락했다고 봐요. 잘못된 정치 문화에 깊이 빠져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무슨 말씀인지 와 닿지 않는데요." "한편으로는 윤석열 사태가 그들의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으니까요. 싸운 건 시민들이었지요. 중요한 화두인 정의 뿐 아니라 보다 세밀한 고찰이 필요한 공정의 시험대이기도 했는데 그들이 어떤 몸부림을 쳤는지 의문입니다. 이
사랑은 뜨거운 게 아니더군 멀리 있는 것이더군 아침에 눈 뜨면 아무도 생각나지 않아 가슴 쥐어 뜯지만 그게 사랑이더군 꽃잎 진 자리가 사랑이더군 향기 사라진 자리가 사랑이더군 사랑은 차가운 게 아니더군 가까이 있는 것이더군 ▶약력 ▶충남 부여 출생. ▶ 한양대 국문과 졸업. ▶장편소설 『세상 끝에 선 여자』(임권택 감독의 영화 ‘창’ 원작). 시집 『호박잎쌈』 .인문학 가이드북 『리더는 리더다』 기획. ▶현재 신문과 잡지에 칼럼과 책 비평 연재.
분당 인문고전 모임에서 만난 한 선생의 가훈은 '나를 의심하라'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토론을 할 때마다 남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다. 의심이 가는 대목은 메모해 뒀다가 뒤풀이 자리에서라도 꼭 묻는다. 처음에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 지속적으로 질문을 받으면서 그의 가훈 그대로 나를 의심하는 습관이 생겼다. 정확히는 내가 말한 것들, 내 사고, 내 시각. 정말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 생각은 맞는 것인가, 그 반대 지점의 생각은 엉터리이기만 한 것인가. 그 선생의 영향으로 마치 초침이 된 느낌이다. 누구의 말이나 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맥락 속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옳든 그르든 참고한다. 그러나 이 습관은 이따금씩 흐느적거린다. 어떤 일방의 현상이나 주장에 쉽게 동조하는 것이다. 지난 4·7 보궐 선거에서 오점 많은 국민의힘당 후보의 큰 차이 승리는 어려울 것이라는 나자신의 분석을 좋은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돌이켜보면 예술 창작에서 말하는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만큼 나를 의심하라가 깊이 각인돼 있지 못한 것이다. 민주당 대선 경선 국면인 이즈음 거리두기가 이루어져 다행이다. 각 후보들의 면면을 자세히 살
최근 이사하면서 서재 한 구석에 박혀 있던 여러 권의 한국기자협회 취재수첩과 여러 장의 사진 뭉치를 발견했다. 신문기자로 일했던 지난날이 떠올랐는데 한 장의 사진이 강렬해 눈길을 멈췄다. 전두환 정권 초기 때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들이 총을 든 군인 앞에서 차렷 자세로 서있는 모습. 특히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겁에 질린 표정이 압권이었다. 김영삼 정권 시절에 여의도에서 연일 시위를 벌였던 삼청교육대 희생자들에게 제보를 받고 요즘 언론에서 걸핏하면 다는 '단독' 기사로 보도했던 것이었다. "노인들도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는 제목으로. 전두환의 만행이 어디 한둘 이겠냐만 이 사진은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일 터이다. 그런데 사진을 보다 최근 국민의힘당에 기습 입당한 윤석열 씨의 발언이 겹쳐졌다. "41%의 지지율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임기말에 40%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사진과 발언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윤석열 씨 발언의 뉘앙스는 다분히 부정적이다. 문대통령이 실정을 했는데 임기 말에 지지율이 유지되는 건 비정상이 아니냐는 문제 제기. 그가 정권교체를 자주 부르짖기에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발언 이면에 자
정치인들과 그 지지자들의 말과 글이 살풍경하다. 그 어느 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더이상 들을 수 없고, 읽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당 전유물이 모든 당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즈음이다. 민주당 대선 예비경선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 귀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 대선 후보의 말과 글은 옮겨 적는 것조차 주저하게 된다. 상스러워도 너무 상스럽기 때문이다. 시민으로서, 유권자로서 모멸감이 인다. 특정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말과 글도 그 후보의 것 못지 않게 폭력적이다. 유튜브나 포털 뉴스 댓글, 페이스북, 누리집 익명 게시판 등 아무 것이나 딱 10초만 들여다봐도 폭언이 튀어나온다. 피해가는 것이 더 어려운 실정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에 말과 글을 흉기처럼 휘두르나? 그런 후보에게 도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기에 폭언을 일삼나? 자신들만의 집단 광기로 권력을 잡아 이 나라를 전리품으로 통째로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확신이라도 하는 건가? 폭언은 폭력이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차원을 뛰어넘는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를 무릎 꿇리겠다는 선언이다. 독선도 이런 독선이 없다. 그런데 이
조국 전 장관 부녀의 삽화를 성매매 기사에다 쓴 조선일보 사태를 보고 실로 오랫동안 품었던 궁금증이 터져 나왔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일까? 보통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일까? 이 궁금증은 언제부터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선일보 기자들을 투명 인간 취급을 해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그들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가 닿을 수 없는 머나먼 나라의 차갑기 그지없는 사람들이었다. 감히 다가설 수 없는 무서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이번에 그들에 대한 궁금증이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툭 터지고 마는 봉숭아 씨처럼 터졌다. 엉뚱하게도 그들은 그들 자신을 사랑할까, 하는 의문. 곧바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답이 메아리쳤다. 왜일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십중팔구 자신을 객체화한다. 준열하게 자신을 꾸짖는다. 나는 고정불변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나와의 끊임없는 부딪힘 속에서 날마다 새롭게 탄생하기 때문에 자신과의 대화는 필수요소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다른 나와 아름다운 투쟁을 할까?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랬다면 조선일보가 한 면을 통틀어 사과하는 일이 있었을까? 조 전 장관에게 10억 원의 손해배상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