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천역 낭만시장’ 행사가 13일 동인천역 북광장 일원에서 개막한 가운데 학생들이 옛날 점포를 구경하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사진 = 인천시 제공 )
국가지질공원인 인천시 옹진군 백령·대청도의 다양한 모습을 사진과 그림으로 만날 수 있는 전시회가 11일 중구 도든아트하우스에서 개막한 가운데 관람객들이 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 사진 = 인천섬유산연구소 제공 )
사곶(沙串)에는 세계에서 두 곳만 존재한다는 천연비행장이자 해수욕장(천연기념물 제391호), 먹거리인 냉면과 칼국수 등 관광자원이 즐비하다. 주민의 갱생 의지로 외로움과 가난을 극복하고 일궈낸 촌락이다. 2021년 1월 기준 142세대 297명이 거주하며, 규모는 작지만 육지에 알려진 유명세로는 대도시 격이다. 사곶은 어떤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을까? ▶ 지명 유래 사곶 마을은 백령도 남동쪽 끝 부분의 해안지대로 용기포 서쪽에 있다. 북쪽은 남산(해발 145m)이 솟아있고 남쪽은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살쿠지’, ‘사을곶’ 등으로 불려왔으며 한자로는 ‘沙乙串地’, ‘沙串地洞’, ‘沙串洞’ 등으로 표기돼 왔다. 모두 모래땅 또는 모래땅이 송곳같이 길고 뾰족하게 된 곳이라는 뜻이다. 즉 이 모래땅이 안골뿌리에서 서쪽 끝 사북까지 길게 뻗어나갔다 해 그 같은 지명이 붙게 된 것이다. ▶ 입도조 김해김씨 김두기(金斗己)와 마을 형성 사곶에 최초로 들어와 모래땅을 개척한 입도조(入島祖)는 김해김씨 김두기로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이며, 적어도 1753년 이전 즉 18세기 전반기에 들어왔다. 조선 후기 해적의 출몰이 잦아지면서 정부가 백령도에 군사시
박남춘 인천시장이 9일 2022년 국비확보를 위해 서울 여의도 국회를 방문, 이종배 예결위원장과 면담을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 = 인천시 제공 )
제59주년 소방의 날 기념식이 9일 메타버스를 활용해 시청 접견실에서 진행됐다. 인천소방 관계자들이 박남춘 시장 등과 함께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 사진 = 인천시 제공 )
백령도 사곶 이 주부(李主簿), 고 이승욱(李承旭)씨 도서벽지 의료 시설이 없던 무의촌(無醫村) 시절, 그 때는 속칭 ‘침쟁이’의 침술과 ‘엄마 손은 약손’이거나 ‘민간 요법’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백령도에 의료기관이 1960년대에 처음 생겼으니 그 이전에 환자의 진료와 치료는 어땠을까? 손가락에 가시가 박혀도 일상이 괴로운데, 과연 아픔의 고통에 장사가 있을까? 비록 정식 면허를 얻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닌 상황에서 의술을 펼쳤지만 당시 백령도에 ‘사곶 이 주부(李主簿)’의 집을 다녀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며, 혹자는 이분을 위해 공적비라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곶 이 주부’ 고 이승욱씨 얘기다. 그는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1919년 출생했으며, 해방과 함께 백령도로 내려와 용기포에 선착했고 이후 사곶으로 이사했다. 호리호리하고 과묵한 편이며, 연화리 출신 11살 연하의 송맹녀 여사와 1946년 결혼해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고, 1980년 향년 61세로 타계했다. 비록 40년 전에 고인이 되셨지만 막내 이광인(51, 사곶 거주)씨를 만나 기억을 더듬었다. “부친께서는 이미 북에서부터 침술에 관한 전문성을 갖고 계셨으며, 남하 후 어렵고
물이 짜지만 않았다면... 길을 걷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걷는가. 질문 자체가 엉뚱하겠지만 각양각색에 무한대의 생각을 하며 걷겠지만 좌, 우로 돌아보면 옛이야기나 역사의 한 축을 이룬 사건이 있지 않나 또는 문학의 풍광이 서린 작품이 있을까 생각하며 걷는 것, 이 맛이 진정 산책자들의 즐거움일 것이다. 매일 보고 걷는 길도 예외일 수 없겠다. 우리가 사는 곳에는 산책자들의 즐거움을 주는 야트막한 산(山)이 있다. 등산이라고 할 것은 없어도 아침이나 저녁, 아니면 휴일에 거닐어 볼 산 말이다. 인천의 진산, 계양산과 문학산을 우리는 많이 찾고 있다. 더군다나 문학산은 2015년 10월 15일 ‘인천 시민의 날’을 기점으로 개방돼 올려다만 보는 산이 아니라 발로 더듬어 오르는 산이 된 것이다. 1965년부터 10년이 넘게 미군 미사일 기지가 주둔했고, 그 후 1977년부터 40년 동안 한국 공군부대가 뒤를 이어 점유하면서 반 백년 간 올려다보는 산으로만 존재했었다. 계양산이 백운 이규보를 품고 홍명희의 ‘임꺽정’을 잉태시켰다면 문학산은 비류백제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세종실록지리지 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문학산이 아니고 남산(南山)이라고 기록돼 있는
8일 인천시청 중앙홀에서 열린 '제23회 2021 인천건축문화제' 개막에서 박남춘 시장과 신은호 시의장 등 내빈들이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 사진 = 인천시 제공 )
개항기 당시 복장을 입은 외국인들이 2021 개항장 문화재 ‘야행’이 열리고 있는 중구 개항장 거리를 거닐며 방문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행사는 중구 개항장 일원에서 5일부터 7일까지 다채롭게 펼쳐졌다. ( 사진 = 인천시 제공 )
화동(化洞) 마을은 백령도 남동쪽에 위치하며, 2021년 1월 기준으로 94가구 117명이 거주하고 있으나 1970년대 한때 100여 가구 560여 명에 달했던 비교적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 마을 동쪽은 군수골과 오군포(五軍浦) 해안, 서쪽은 서사골을 경계로 가을2리(소가을리)와 접한다. 남쪽은 해마당재를 중심으로 장촌 부락과 경계를 이루며, 북쪽은 과거 갯골 건너 북포2리인 신화동 지역을 마주하고 있다. 장촌이나 소가을리 방면을 제외하면 대부분 바다와 접한 살기 좋았던 아늑한 포구 중심의 마을이었다. 지형을 중심으로 보면 남포리 산 1번지인 가진물뿌리(화동마을농장이 있던 지역)가 길게 북서쪽으로 돌출돼 있고, 그 서쪽에 선창뿌리와 마주보고 있다. 이 끝에 과거에는 초가집이 2채 있었으며, 현재는 그 집터에 호수펜션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 거주했던 최상윤씨가 뱃사공이었으며 개머리(신화동)와 차넘이(車踰, 신화동), 당뒤(당후동, 북포리), 대가을, 사곶 등을 왕래했다. 1950년대 전쟁 후 먹거리 해결을 위해 장촌, 화동, 중화동 주민들에겐 해산물, 농산물을 비롯해 솔가리 등 땔감 3~4묶음을 지게에 지고 나룻배를 통해 진촌까지 왕래했다고 하니 무성영화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