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식탁에서 빠질 수도 없고 빠져서도 안되는 것이 수저다. 수저(匙箸)란 두말할 것도 없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아울러 하는 말이다. 수저는 그릇에 담긴 밥이나 반찬을 입에 넣기 위해 옮길 때 쓰는 식생활 용구이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는 이른 바 수저 국가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의 몇 나라에 불과하다. 수저를 가장 먼저 쓴 나라는 중국이다. 기원전 천년에서 기원전 6세기에 걸쳐 보급된 가요를 집성한 ‘시경(詩經)’에 황후와 귀족들이 숟가락으로 밥을 먹었다라는 기록이 나오고, 젓가락은 기원전 3세기 경의 기록에 비로소 등장한다. 그런데 지금은 젓가락을 주로 쓰고 숟가락은 국물 따위를 먹을 때 보조 용구로 쓰고 있다. 일본은 신화 시대에 수저가 있었다고 하지만 신빙성이 덜하고, 5~8세기 경에 꾸민 ‘만요집(萬葉集)’에 나오는 젓가락과 나라(奈良)시대의 수저 유물이 확증적이다. 일본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젓가락이 주이고 숟가락은 보조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4~5세기 경에 조성된 경북 칠곡군 구암동(鳩岩洞)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제 숟가락이 최초인데 숟가락과 젓가락을 함께 쓰는 세계 유일의
모양이나 하는 짓이 같잖거나 우수워서 참아 볼 수 없는 것을 꼴불견이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에는 꼴불견이 있게 마련이다. 당나라는 그 후기 때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갖은 불법 행위가 만연돼 국가 질서가 말이 아니였다. 정치가는 나라를 바로 세울 생각보다는 대세를 눈치 보고, 백성들은 될대로 되라며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지식인들 조차 침묵을 지켰는데 유미주의(唯美主義) 시인 이상은(813-858)만은 몰락하는 세태를 개탄하는 고발의 글을 썼다. ‘잡찬(雜簒)’이란 책에 ‘눈 뜨고 참아 볼 수 없는’ 꼴불견 여섯 가지 사례를 발표했는데 다음과 같았다. ‘청천탁족(淸泉濁足)’ 약수터에서 발을 씻는 것은 자기만 좋을 뿐 남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니 독선이다. 둘째 ‘화상건군(花上乾裙)’ 꽃 위에 빨래를 말리는 것은 꽃을 꺾는 것보다는 났지만 생명과 아름다움을 경시한 것이니 세상의 도리를 망각한 짓이다. 셋째 ‘배산기루(背山起樓)’ 산을 등지고 누각을 세웠으니 이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차단한 폭거다. 집은 산을 등지고 물
시장(市場)이란 용어는 19세기 말 개항 이래 생긴 용어로 예전에는 ‘시전(市廛)’ 또는 ‘장시(場市)’ ‘장터’ ‘저자’라고 불렀다. 전(廛)은 삼국 시대부터 그 역사를 볼 수 있는데 490년(신라 소치왕 12) 서울에 처음으로 개설돼 사방의 물화를 유통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우리나라 시장 역사가 1500년이 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옛날 장터에는 상인과 소비자 사이에 끼어들어 흥정을 붙이고 나서 중간 이문을 챙기는 ‘여리꾼’이란게 있었다. 처음에는 가게 앞에 줄지어 서 있다고 해서 ‘열립(列立)꾼’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이익을 남겨 먹는다하여 ‘여리(餘利)꾼’으로 바뀐 것이다. 이들은 상인이 받고자 하는 물건 값에 자기 이문을 얹어 흥정을 성립시키고, 여리(餘利)를 챙겨야 하기 때문에 상인과 저들만이 알 수 있는 암호(暗號)를 만들었는데 그 암호가 다름 아닌 한자의 획을 분합한 파자(破字)였다. 예컨대 하나는 ‘천불대(天不大:天에서 大를 빼면 一)’, 둘은 &ls
관혼상제는 물론 명절과 아기 백일이나 돌, 또는 생일·회갑·칠순 따위의 잔치 때 빼놓을 수 없는 음식 가운데 하나가 떡이다. 올 설에 너나없이 가래떡으로 만든 떡국을 먹었을 것인데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하여 첨세병(添歲餠)이라했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말이 있었다. 옛날 무반(武班)은 서울 남산 밑에 살고, 고관과 부자들은 북촌에 살았다. 무반은 구차한 생활에 불만이 많아 이를 달래기 위해 술을 빚어 마셨고, 북촌의 고관과 부자들은 여유가 많아 여러가지 떡을 만들어 먹은 데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나라 떡은 가지수도 많지만 계절과 고장에 따라 만드는 법과 맛도 다르다. 설날의 흰떡과 인절미(引切米), 보름날 약식, 음력 매달 초하루의 삭일송편(朔日松餠), 삼진날(음력 3월 3일) 두견화전, 한식의 쑥떡과 쑥단지, 초파일(음력 4월 초여드레)의 느티떡과 장미화전, 단오(음력 5월 5일)의 수리치떡과 도행병(桃杏餠), 유두일(음력 6월 15일)의 증편, 칠석날(음력 7월 7일)의 백설기, 추석(음력 8월 15일)의 오려송편, 중양절(음력 9월 9일)의 국화전, 상달(음력 10월)의 시루떡 등이 있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정월 초하루 설을 맞는다. 정월은 바른 ‘정(正)’자와 ‘달월(月)’자가 합쳐진 한자어로 원월(元月) 또는 인월(寅月)이라고 한다. 정월이란 중국 상고 시대의 하(夏), 은(殷), 주(周) 나라의 경우와 같이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왕조가 바뀔 때마다 역법(歷法)을 그에 맞게 고친 데서 생긴 말이다. 설은 새해 첫머리인 까닭에 세수(歲首), 세시(歲時), 세초(歲初), 연두(年頭), 연시(年始)로 부르는데 중세 국어에서는 ‘한설날’이라 했고, 섣달 그믐날을 ‘아 설날’ 이라하였다. ‘한’은 크다는 뜻이고 ‘아 ’은 작다는 뜻이다. 설날은 신화에서 새로운 시작 또는 천상과 지상이 결합하는 재창조의 시간으로 나타난다. 천지왕이 총맹부인과 합궁한 다음 다시 천상으로 오르면서 “자식들이 태어나 아버지의 종적을 묻거든 이 박씨를 심게 하되 정월의 정해진 날에 심도록하라.”고 일렀다. 얼마 뒤 대별왕과 소별왕이 태어나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종적을 묻길래 총맹부인은 박씨를 정월 정해진 날에 심게 하였다. 마침내 싹이 트고 하
설도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이미 귀성전쟁은 시작됐고 너나없이 설 분위기에 들떠 있다. 특히 설 대목을 노려온 재래시장과 대형매장, 백화점은 그간의 판매 부진을 만회하려고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설 대목은 1년에 한 번 뿐인 호기(好期)인 까닭에 상인과 기업으로서는 진검 승부를 할 수밖에 없다. 재래시장은 덤과 에누리를 무기로, 대형매장과 백화점은 가격파괴와 고품질로 판촉을 벌이고 있지만 소비자들이 지갑을 쉽게 열지 않아 애간장이 탈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93년 전인 1916년의 세모 풍경은 어떠했을까. 12월 13일자 ‘매일신문’의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조선인 상가는 종로에 집중되어 있고, 일본인 상가는 진고개(泥峴)에 몰려 있는데 조선인 가게는 위 아래 가게가 같은 물건을 팔아 손님을 끌 노력보다는 상인끼리 경쟁하는데 신경을 쓰다보니 장사가 될리 없다. 반면에 일본 상인들은 같은 물건을 팔지 않기 때문에 상인끼리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고, 물건을 눈에 뜨이게 곱게 진열한데다 경품까지 끼워 파니까 일단 가게 안에 들어섰던 손님이 빈손으로 나가는 일이 없다. 거기다 친절까지 겹치니까 진고개 상가는 활기가
일본은 장수 국가 가운데 하나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100세이상 노인이 1만 8000명 가량된다. 그들은 어떻게 백세 인생을 살았을까. 언론인 마쯔오히데스키(松尾秀助)씨가 10명의 백세인을 만나 보았는데 그들은 ‘그냥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 보람, 자연에의 순응을 생활의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건강을 위해 적합한 운동을 거르지 않고, 살아 있음을 늘 고마워하며 더 오래 살기위해 욕심내는 일없이 모든 것을 자연에 맡기고 있는 공통점이 있었다. 사람과 환경, 성격이 제각각이다 보니까 개인마다의 식생활, 취미활동, 건강법 등도 다를 수밖에 없으나 무리하지 않는 것은 동일했다. 10인 중 한 사람인 98세의 미가미미와(三神美和) 여의사는 자신의 장수 비결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고 올리는 것이 건강의 바로 미터다. 이 때 고통없이 거뜬히 해내면 오늘은 건강하다는 증거다. 매일 마당과 대문밖의 청소를 하는데 이 때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상대에게 알리고, 이웃 사람과의 소통에 도움이 된다. 혼자 살면서 소홀히 해서 안되는 것은 식사인데 세끼밥과 육류, 생선, 야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