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으로 일상을 멈춘 채 맞는 연말이다. 얼마 전 온라인 좌담회 형식인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제인 구달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류는 이번 재난도 슬기롭게 극복할 것이라고, 자신은 세계 제1, 2차 대전도 겪어본 사람이라고 말이다. 이쯤 되면 인생은 재난 극복의 연속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나와 같은 젊은 세대들에게조차 몇 가지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다. 아직 어린 학생이었을 때, 요즘처럼 추웠던 어느 날 IMF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시거나 하시던 사업이 어려워졌다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자주 들렸다. 뉴스를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가 망하기라도 하는 건가 진심으로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이후에도 세월호, 메르스, 국정 농단, 코로나19에 이르기까지 한 나라 전체가 휘청거렸던 사건을 여러 번 겪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사건들의 직접적인 피해자나 당사자인 적은 없었지만 초조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꽤나 깊은 불안감을 마음속에 키워왔던 것 같다. 얼마 전까지는 사전예약만 하면 방문할 수 있었던 많은 전시 공간들이 지금은 아예 문을 닫아버렸다. 온라인상으로라도 전시 공간을 열심히 방문해보지만 홈페이지에 콘텐츠를 제대로 갖춰놓
필자와 같은 세대는 독립이나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본 적이 없는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새파랗게 젊은 세대이다. 하지만 문화예술계 현장에서 십여 년간 일하다 보니 문득 내 삶의 작은 일부나마 투사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장에서 나는 싸우듯이 일해왔다. 그간 몇 차례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겪었고 변화의 물결을 타기 위해 혹은 그것에 맞서기 위해 몸부림쳤던 것 같다. 한낱 미약한 문화예술계 종사자에게 정치적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작용했고 그 속에서 어떻게든 내 작은 열정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다. 필자와 같은 창작자나 기획자들은 속에 맺힌 것들을 표현하지 못하면 존재가치를 잃고 만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가슴을 치며 안달하는 이들만이 진정 살아있는 창작자들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문화와 예술은 공동체와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말이다. 공동체를 가꾸기 위해 서로 모이기에 힘써야 하고, 문화와 예술은 그러한 도모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언뜻 들으면 옳은 이야기인 것 같지만 결국 문화와 예술을 정치로 옭아매기 위한 주장에 불과하다.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예술 분야에서는 표현하고자 하는 열정이 최우선 되어야 한다.
시대에 가로막혀 재능을 한껏 펼치지 못한 예술가가 있다. 일제강점기 나라의 운은 기울었고 그는 자신의 재능을 가슴에 묻어둔 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투사로서의 삶은 급박하게 돌아갔고 잦은 수감생활, 험난한 여정으로 몸은 병들어갔다. 옥고로 병약해져 하릴없이 방안에 머무를 때면 가슴에 맺힌 시를 썼는데, 그때 완성한 시가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진 <황혼>, <청포도>, <광야> 등이다. 그는 바로 시인 이육사이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가장 한창때인 41세에 순국하기까지 현대시 36편과 시조 시 1편, 한시 3편을 남겼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아 재능을 펼쳤더라면 우리는 <청포도>, <광야>와 같은 빼어난 절창을 훨씬 더 많이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일찍 생을 마감했고 살아생전 자신의 이름으로 낸 시집 한 권 가져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가 이육사 너머 시인 이육사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시뿐 만 아니라 그가 남기지 못한 시까지 바라봐 주어야 한다. 시대의 아픔은 나라를 뺏긴 민족의 설움에도 서려 있고, 진정 나답게 꽃 피지 못한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넋에도 서려 있기 때문이
코로나19가 안겨준 삶의 고민이 전시장 곳곳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들보다 좀 더 일찍 고민을 시작하고 작품을 발표해 주는 작가들 덕분에 내가 가진 고민을 보다 솔직히 털어놓을 용기를 얻었다. 갤러리 라온에서는 7일부터 고강필 개인전 ‘번짐의 흔적’이 진행된다. 고강필은 한지 위에 사람 형태의 선을 가느다랗게 그린다. 배경은 온통 오렌지빛으로 물들었고 그 안에서 사람 형태는 외롭게 서 있다. 작가는 물감이 건조되면서 번지는 효과를 노렸다. 처음 붓이 닿았던 선은 사람 형태의 틀을 잡아주었고 사람을 채우던 물감은 서서히 번지며 조심스럽게 외곽선을 벗어났다. 틀에 갇혀 있지만 자유로워지고 싶은 사람이 그렇게 완성되었다. 이랜드 스페이스에서는 10월 29일까지 김혜영 개인전 ‘아무도 살지 않는 Solitude of mind’이 진행된다. 고독한 풍경 안에 놓인 한 채의 집은 특정한 시공간에 홀로 서있는 이를 연상시킨다. 풍경은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고 음산하다. 집은 독특한 경계에 놓여 있다. 가령 파도가 덮칠 것 같은 바닷가, 숲이 우거진 곳으로 진입하는 길목, 산 능선이 접혀 들어가며 만나는 지점 등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독을 즐기다 못해 고독이 위험수위에 차
교회 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이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다. 소셜미디어 대화방에서 지인들이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건네 때면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수다를 이어가기 어려워진다. 물론 코로나 사태가 터진 이래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일상생활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마다 어쩐지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든다. 며칠 전 대통령이 주최한 회동에 참석한 한 종교 지도자는 이번 사태에 대하여 송구함을 표하는 한편, 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와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했다. 이 자리는 삶의 안전성과 종교적 가치가 극명히 대비되는 자리이기도 했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교인들에게는 예배의 신성함이란 과연 무얼 의미하는지 돌아보게 했던 기회가 됐으리라. 오랜 세월 미술가들에게 예배는 매우 중요한 모티프가 되어왔었다. 예배의 장소에 웅장한 작품이 걸리면 의식의 신비로운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곤 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 시대에는 미술가들이 예배의 장소를 통해 유명세를 떨치는 경우가 많았다. 미켈란젤로의 경우 교황의 권위에 어쩔 수 없이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완성했다. 높은 교회의 천장에 누운
한때 화제가 됐었던 책 ‘90년생이 온다’를 읽고 잠깐 동안 고민에 빠졌었다. 90년대 생들은 긴 글과 골치 아픈 글을 기피한다는 대목에서였다. 독자들이 점점 더 진지한 글을 읽지 않게 되면 직업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90년대 생들이 지루해 하지 않도록 발랄한 문체를 구사해야 할까. 문체야 그렇다 치고 주제 자체가 진지한 경우는 어떤가. 잠깐 동안이지만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이 진지한 글을 기피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너무나 불리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천성이 워낙 진지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몸 담고 있는 비평이란 분야 자체도 진지하다. 이런 유의 글을 쓰는 사람들은 점점 더 설자리가 없겠구나 싶어 애통한 기분이 잠깐 들었었는데, 뭐 이런 유의 글이 인기 없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니까, 그냥 고민을 접어두기로 했다. 글을 쓰는 이들은 시대에 민감한 편이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시대와 동떨어져 보이는 것들에도 매달려야 한다. 일을 하다 보면 역사와 과거를 더듬어야 하고 수많은 개념들과 씨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왜 이 먼 곳까지 왔는지, 현실로부터 시작한 고민이 어찌하여 이처럼 먼 곳으로 나를 이끌었
가슴기 살균제 피해 규모가 당초 발표된 것보다 훨씬 크다는 소식에 충격에 휩싸인 하루였다. 뉴스를 듣는 순간 가슴기 살균제 사건이 터졌던 그때 나는 어떻게 생활하고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볼 수밖에 없었다. 가습기는 쓰고 있었으나 다행히 살균제를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무실이나 공공공간에서 가습기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니 나 또한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몇 년 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는 사람은 필자 뿐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측하지 못했던 재난이 너무나 자주 우리 삶에 찾아오고 있다. 그만큼 사람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운 나날인데 홍수 피해나 가습기 살균제 소식은 어느 때보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같다. 세상은 빨리 변하고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는 상품들은 즐비하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자 만든 장치와 물건들이 오히려 우리들의 삶을 위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오늘은 손때 묻은 할머니의 장롱과 같이 우리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작품 두 가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조혜진의 개인전 ‘한 겹 Blurry layer’은 올해 초 통인보안여관에서 열렸다. 그는 자개농의 문짝을
장마철이다. 집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나니 비 오는 날 창밖 풍경도 그전보다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떨어지는 빗방울에 도로가 저벅저벅 잠기면 세상은 물그림자를 머금은 채 매끈해진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 카미유 피사로가 그렸던 풍경화의 감성이 절로 떠오른다. 당시 피사로는 파리의 숙소에 머물며 창밖에서 바라본 거리와 광장의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시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실내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완성된 작품들이 차분하고 멜랑꼴리한 분위기를 머금고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슬기롭지만 어쩔 수 없는 집콕 생활을 해야 하는 요즘 우리들의 사정에도 잘 들어맞는 작품들이다. 오페라 거리, 몽마르트 언덕, 튈르리 광장 등의 풍경은 시간대별로 그리고 계절별로 각기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작품에 펼쳐지는 시간과 계절의 변화가 어찌나 섬세하고 탁월한지 감성 드라마를 감상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중에서도 1898년에 완성된 ‘비 오는 날의 오페라 거리’는 안개 낀 하늘과 흠뻑 젖은 도로의 표현이 일품이다. 비 오는 날 차분한 감성에 흠뻑 빠지고 싶다면 이 작품을 찾아서 감상해보길 추천한다. 하지만 피사로가 감성적인 표현을 추구한 화가
필자는 어느 한 연극 웹진에 일 년에 세 네 번 공연 관람 후 리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지난봄부터는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안전 수칙을 지키며 조심스레 공연을 올리고 있는 극장이 있긴 하지만, 막 학교를 입학한 딸과 이웃을 생각하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연장을 방문하기가 망설여졌다. 바이러스가 문화행사와 공연, 전시를 멈추게 했다는 소식이 속속 들려왔고 적막감을 느꼈다. 어렵다, 어렵다 했어도 굴러가기는 했던 전시장과 공연장이었는데 그나마도 멈추고 나니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만 멈추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최신 공연 영상이라도 보고 리뷰를 쓰자고 마음먹었다. 그랬더니 ‘극장 용’에서 하는 어린이 작품이 가정의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친김에 온라인 인터넷으로 온라인 공연과 전시 소스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름 모를 가수의 한 유행가 가사가 머릿속을 강타했다. 온라인에서 꽤 많은 콘텐츠들이 나돌아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롯데콘서트홀, 국립현대미술관,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생중계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공연이
며칠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디지털 실감 영상관이 개관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전예약을 하여 얼른 다녀왔다. 다중이용시설이 임시 폐쇄되기 직전이었으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박물관, 미술관 관람에 목말라 있던 중 몇 개 시설은 사전 예약만 하면 방문을 할 수 있다는 소식이 마른 땅에 단비 내리듯 반가웠는데 다시 폐관 소식이 들리니, 그리하는 것이 백번 맞다 싶으면서도 서운함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날 디지털 실감 영상관에서 본 것은 <요지연도>와 <십장생도>를 모티브로 제작된 미디어아트 입체 영상이었다. 대자연 속의 신선놀음이 화려한 색채로 펼쳐지고 있었다. 공간을 두르고 있는 널따란 벽 위에 3D 영상이 시원하게 펼쳐졌고, 바닥에도 화려한 꽃길과 은하수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미세먼지와 바이러스로 외출조차 쉽지 않다 보니, 찌든 현실에서 도피해 대자연의 품속에서 신선놀음을 하는 것이 옛사람뿐 아닌 바로 지금의 나의 로망이 되어버린 요즘이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요지연도>는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기에 완성되었다.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중국의 서왕모와 목왕의 연회가 펼쳐지고 있으며, 초대받은 신선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