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만일 도덕적인 삶을 추구한다면 결코 진리를 떠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학문이 있거나 없거나, 어떤 인간도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사람을 존경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말라. 너의 이성이 너에게 계시하는 진리를 추구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신념에 충실하라.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기대하지 말라. 진리를 향한 목소리가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더 목소리를 높여라. 진리가 미망이나 편견, 정욕보다 강하다는 것을 믿고 정의를 위한 수난을 각오하라. 진리는 장소와 시간에 제약받는 것이 아니며, 영원하고 불변한 것, 어떠한 세계에서도 동일한 것, 신과 하나가 되어 그 권능을 지니는 것임을 기억하라. (채닝) 진리를 잡기(雜記)의 책에서가 아니라 사상 속에서 찾아라. 달을 보려거든 웅덩이가 아니라 하늘을 쳐다 보라. (페르시아 격언) 네가 진리로부터 떠나는 순간, 태어난 이후 네가 쌓아온 선행의 성과는 모두 사라져 버린다. 네가 너 자신과 한 몸이라는 것을 아는 지극히 높은 정신이, 모든 곳에서 네가 행하는 선과 악을 관찰하고 있다. (마누 법전) 진리는 단순한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활
폭력이란 무지하고 야만적인 자가 민중들에게 그들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을 강요하기 위한 무기이다. 그러나 그 무기가 작동을 중지하면 그 효과도 중지된다. 반대로 설득은 마치 강물이 우리의 관심이나 노력 없이도 스스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기울어져 있는 강바닥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활동을 지도하는 방법에 단 두 가지밖에 없다. 그 하나는 인간에게 그 사람의 성향과 판단과는 반대로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성향을 다스리며 이치로 설득하는 방법이다. 하나는 무지하고 야만적인 방법이므로 그 결과는 환멸뿐이지만, 다른 하나는 경험이 증명해 주는바 반드시 성공을 거둘수 있는 방법이다. (콩브) 강자의 권리는 권리가 아니며, 항의와 저항을 만나지 않는 동안만 권리로 통할 뿐이다. 그것은 마치 난방과 조명과 지렛대와 같이 없는 동안은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추위와 어둠, 무게 같은 것이다. 인류의 모든 산업은 거친 자연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정의의 진보는 바로 강자의 폭력이 제한되어 온 역사적 과정이다. 의학의 목적이 질병의 극복에 있듯이, 인간의 행복은 맹목적인 동물성의 극복, 곧 무분별한 욕망의 극복에 있다. 이리하여 나는 늘 하나의 법칙을
기도의 보람은, 네가 가장 선한 순간에 도달했을 때, 네 가슴속에 삶의 의의에 대한 최고의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신에게 봉사하는 내적 형식으로서, 신의 은총을 구하는 수단으로 이해되고 있는 ‘기도’란 공허한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래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인 신에게 언어로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도에 의해서는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며, 또 신의 계율로서 우리의 마음에 각인된 의무의 하나를 수행한 것도 아니므로, 결국은 실제로 신에게 봉사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를 통해 신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으로부터의 소망,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행위가 바로 신에게 봉사하는 거라는 마음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 속에는, 우리의 마음에 절대적으로 내재해야 하는 기도의 정신이 들어 있다. 이 소망에 언어와 형식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에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수단일 뿐이다. (칸트) 이따금 어린아이처럼 누군가에게(신에게) 호소해 도움을 청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것은 좋은 감정일까? 아니다. 좋지 않다. 그것은 나약한 마음이고 믿음이 없는 것이다. 뭔가를 간절히 소망하는 기도
인생은 운동이다. 따라서 인생의 행복은 어떤 일정한 형태가 아니라 좋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 방향은 자신에 대한 봉사가 아니라 자신을 보낸 자(신)에 대한 봉사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복과 쾌락을 권력 속에서 찾고, 또 어떤 사람은 학문에서, 또 어떤 사람은 육욕에서 찾는다. 그러나 참으로 행복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은, 행복이란 특정한 일부 사람들만 소유할 수 있는 것 속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참된 행복이란 모든 사람이 차별이 없고 부러워할 필요도 없이 다 함께 소유할 수 있는 것이며, 누구나 스스로 잃어버리려 하지 않는 한 잃어버릴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알고 있다. (파스칼) 행복(幸福)이란 인간이 자기 개인을 위해 바라는 것이고, 선복(善福)은 모든 사람과 함께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다. 행복은 투쟁을 통해 얻을 수 있고 선복은 오직 사랑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진정한 행복은 아무 데나 흔히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은 오직 모든 사람에게 행복하고 선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해롭지 않고 유익한 존재가 되고 싶으면 만인의 행복과 일치하는 것만 하라.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행복을 얻을
네가 좋다고 여기는 일을 할 경우에도, 남에게 적의를 느끼거나 남이 자신에게 적의를 느낀다면 즉시 그 일을 그만두는 것이 현명하다. 결국 너는 아직 그 일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무슨 일을 하면서 신체의 어딘가가 아프다면, 너는 그 일을 잠시 중단하고 어떻게 하면 고통을 제거할 수 있는지 연구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좋지 않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 같으면 잠시 중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너에게 그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아직 없다는 증거이므로 더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남이 베푸는 선은, 설령 그것이 표면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그들이 사람들의 존경을, 그것도 어쩌면 부당한 존경을 받을지 모르는 일시적이고 거짓된 선으로부터, 결국엔 뭔가 진지한 것이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칸트) 선을 행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선을 베풀어야 했는데 하며 늘 아쉬워함이 선을 행하는 자의 마땅한 도리이다. 선한 성품은 정신의 기본적 성격이다. 만일 사람이 선하지 않다면, 그것은 그가 어떤
우리는 단순히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와 정신적 유대에 의해 하나로 굳게 이어져 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사람이든 그 내부에는 뭔가 매우 선한 것, 박애적인 것이 잠재되어 있지만, 동시에 또 뭔가 매우 악한 것, 악의에 가득 찬 것이 있어서,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어느 한쪽이 얼굴을 내밀기도 하고, 또 다른 쪽이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정말 옳은 말이다.! 나는 나 자신도 때로는 마음으로부터의 동정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때로는 매우 냉담하게, 또 경우에 따라서는 증오심이나 상대방의 불행을 즐기는 기분으로 바라볼 때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분명히 우리에게 두 개의 다른, 아니 완전히 대조적인 인식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하나는 고립과 분열, 소외의 원리에 의한 인식 방법으로, 그 경우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있어서 완전한 타인, 나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이때 우리는 그들에 대한 냉담, 질투, 증오, 악의 외에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과 하나가 되는 의식에 의한 인식 방법이다. 이 방법에 의하면, 모든 존재가 우리의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는 하느님의 의지를 나타내는 긴 세로 부분과 인간의 의지를 나타내는 짧은 가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와 같은 방향으로 향하게 하면 십자가는 없어질 것이다. 외면적인 행운 속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다. 진정으로 견고한 행복을 주는 것은 내적 생활과 신의 의지의 일치뿐이다. (류시 말로리) 우리에게는 늘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섞여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언가를 목표로 나아갈 때에는 그렇지 않다. 신의 의지에 따라 나아갈 때는 모든 것이 선이며, 신의 의지와 일치하지 않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나아갈 때는 모든 것이 악이다. 운명은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멸망시킨다. 하나는 우리의 희망을 거부함으로써, 또 하나는 그것을 이룸으로써, 그러나 신이 원하는 것만을 원하는 자는 그 어떤 불행도 피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복이 된다. (아미엘) 만일 네가 타인에게 어떠한 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 무엇도 받으려는 생각이 없다면, 너는 그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 행복이 타인의 수중에 있다면 너는 반드시 그들을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삶의 끝에서 홀로 죽어 가듯, 자신의 내면적, 정신적 생활에서도 항상 고독한 존재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문제는 그가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자기 인식에 있다. (쇼펜하우어) 인간에게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만이 진정한 자신의 것이다. 누구든,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것, 자기 속에서 자신의 생명과 함께 성장하는 것 외에는, 결코 영원한 선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에머슨) 스스로 죄를 지으면 스스로 더러워지고, 스스로 죄를 짓지 않으면 스스로 깨끗하다. 깨끗함과 더러움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아무도 남을 깨끗하게 할수는 없다. (법구경)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해로운 미망은, 세상에 자신들의 자유와 행복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나 신이 자기를 도와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은 그의 선한 생활뿐이며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각자 그 본질을 남에게 전할 수 없는 깊은 내면 생활이 있다. 때로는 그것을 사람들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그보다 앞선 어떤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현재라는 시점에서 행동하고 있으며, 현재는원래 시간의 밖에 있고, 과거와 미래라는 두 가지 시간의 접점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재의 시점에서는 인간은 언제나 자유로운 것이다. 자신의 신상에 뭔가 불쾌한 일이 일어나거나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종종 자신과 상관없는 외적인 것에 불쾌함과 번거로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 자신 속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을 탓하거나 운명(運命)을 한탄하기 쉽다 (에픽테토스) 인간에게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만이 진정한 자신의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것, 자기 속에서 자신의 생명과 함께 성장하는 것 외에는, 결코 영원한 선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에머슨) 스스로 죄를 지으면 스스로 더러워지고, 스스로 죄를 짓지 않으면 스스로 깨끗하다. 깨끗함과 더러움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아무도 남을 깨끗하게 할 수는 없다. (법구경) 사람들의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해로운 미망은, 세상에 자신들의 자유와 행복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나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고 무슨 일에 있어서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면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 (세네카) 인간이 알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자기부정과 사랑의 경지이다. 이성은 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을 인간에게 계시하고, 감정은 인간을 그 길로 향하게 한다. 개인의 행복을 목표로 노력하는 것은 우리 내부의 동물적인 자아를 지속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참다운 인간 생활은 동물적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시작된다. (아미엘) 네 마음속의 등불이 꺼지면 어둠이 너의 길을 뒤덮을 것이다. 그 무서운 어둠을 조심하라. 그대의 마음속에서 모든 이기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성의 어떠한 빛도 네 마음에서 생기는 어둠을 몰아낼 수 없다. (바라문의 금언) 우리가 자기 부정이라고 하는 것은 동물적 자아에서 정신적 자아로 의식을 옮겨가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의식이 옮겨가면, 그때까지는 부정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꼭 부정인 것이 아니라, 단지 필요 없는 것으로부터 당연히 떠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은 까닭이 있어 사는 것 아니다. 그저 살고 싶어 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