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수'검색결과
상세검색샤갈전을 보고 왔다. 샤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색체의 마술사’라 불리는 그의 그림 속 화려한 색들이 아프다고 말한다. 1, 2차 대전을 살아낸 유태인의 삶, 부인과의 사별, 병마 등 어두웠던 삶은 꿈과 환상 속으로도 피하게 만들었고 이를 화폭에서 살아나게 했다. 전시회 벽에 쓰인 ‘나는 초현실주의자라는 말이 싫다. 나는 나의 현실만을 그린 것이다’라는 샤갈의 말 역시 그래서 아프다. 샤갈의 말은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Frieda Kahlo/1907-1954)를 떠오르게 했다. 샤갈과 동시대를 살았던 그녀 역시 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고통도 무게 잴 수 있다면 샤갈은 프리다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하지 않을까. 평생, 흘린 피를 찍어 그림을 그렸다고 할 정도로 고통의 극지를 오체투지 했던 프리다. 1907년, 멕시코에서 태어난 프리다는 말도 배우기 전 어머니를 잃었고 6살에는 소아마비를 앓아 평생 다리를 절었다. 10대 때 대형 버스 사고로 중상( 강철봉이 여린 배를 뚫고 관통하고 다리, 골반, 쇄골 등이 부러지는 등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을 입어 30회 넘게 수술했지만 장애와 불임의 몸이 된다. 20살에 21살 많은 남자,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했으나 바람둥이 남편(심지어 처제와도!) 때문에 지옥을 산다. 이혼 후 자살시도, 사고 후유증으로 발목절단 등 불운의 연속이었던 삶은 47세 나이에 폐렴으로 막 내린다. 고통의 롤러코스터를 탄 프리다의 삶은 2002년 미국 감독 줄리 테이머에 의해 영화화됐다. 프리다에 빙의된 듯한 멕시코 배우 셀마 헤이엑(Selma Heyek)의 연기, 눈을 호사하게 한 곳곳의 걸작 그림 배치 등으로 기대 이상의 충족감을 주지만 멕시코 민중음악에 눈뜨게 한 배경음악들이 압권이다.(2003년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음악상 수상) 그중 프리다 칼로가 생전, 자신의 삶을 노래한 것 같다며 좋아했다는 곡이 있다. ‘라 요로나(La Llorona/흐느껴 우는 여인)’. ‘모든 사람이 나를 우울하다고 해/ 명랑하지만 얌전한 나를 우울하다고 해/ 나는 푸른 고추를 닮은 요로나/ 맵지만 맛있지/아! 나의 우는 여인, 요로나/ 어제 나는 멋진 요로나였지만 지금은 그 그림자만도 못해 (중략)...... 네가 나를 더 사랑해주기 원해/ 나는 너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어/ 아직도 원하는 게 있나?/당신은.... 더 이상!’ 아마 프리다 평생의 사랑, 평생의 ‘웬수’였던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프리다는 민중화가, 공산주의자로 멕시코 영웅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의 그늘에서 평생 ‘디에고의 아내’로 불렸다. 둘 다 세상 떠난 지금 디에고는 ‘프리다의 남편’으로 더 많이 불린다. 세상은 디에고의 천재성보다 프리다의 고통에 더 주목했다. 화가 프리다가 아닌 인간 프리다를 알리는데 영화가 한몫했을 것이다. ‘라 요로나’는 영화 속에서 ‘무려’ 차벨라 바르가스가 나와 직접 부른다. 차벨라 바르가스는 멕시코 대표적 민속음악 란체라(Ranchera)의 대표주자로 우리로 치면 트로트계의 여왕 이미자급 된다 하겠다. 삶의 고통, 향수, 사랑의 아픔 등을 주 내용으로 하고 가수의 흐느낌, 울음이 노래 속에 들어가는 란체라. 중성적 저음으로 절규하며 부르는 차벨라 바르가스의 목소리는 프라다의 고통을 가슴을 후벼대며 이식시킨다. 차벨라 바르가스가 양성애자였던 프리다의 애인이었다는 것을 덧붙이면 사족이 될까.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에릭 사티(Erik Satie)를 알게 된 것은 소설가 Y 씨를 통해서다. 20년 전의 이야기. 경기도 일산에 사는 문학인, 예술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날은 문화부 기자 한 명과 함께 Y 씨의 아파트에 초대받아 가서 맥주를 마셨다. Y 씨가 떨어진 안주 대신이라며 음악을 틀었다. 소설가와 기자, 방송작가 셋이 문학, 예술 시사를 오가며 벌이던 격론의 힘을 빼고 술잔마저 내려놓고 귀 기울이게 하던 피아노 소리. 담담하면서 쓸쓸하고 또 기이했던. ‘에릭 사티의 그노시엔느(Gnossienne)’라고 소개한 Y 씨가 한마디 덧붙인다. ‘김 작가가 이쪽 필(Feel)이었구만.’ 그 주 주말, CD를 구입해 종일 들으면서 에릭 사티를 탐색했다. 프랑스 대혁명과 파리 코뮌에 이르는 약 80년의 정치적 격변 이후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으로 문화, 예술이 만개했다)에 활동했던 아방가르드 작곡가. 파리 예술가들(예를 들면, 작가 알퐁스 도데, 기 드 모파상, 에밀 졸라, 작곡가 샤를 구노, 화가 클로드 드뷔시 같은!)의 아지트였던 카페 ‘검은 고양이’에서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던 사티는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똑같은 모양의 열두 벌 검은 벨벳 슈트만 돌려 입고 수백 개 소지해 매일 들던 우산을 정작 비 오는 날에는 젖는다고(우산이!) 접고 다녔으며 흰색의 음식만 먹었고 심지어 일인 종교를 창시해 교주이자 유일 신자로 살았다. 사티의 악보는 또 얼마나 별났던지. 대개 안단테, 모데라토, 알레그로 등이 적혀 있을 지시어 자리에 ‘치통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난 담배가 없네......’등을 써놓았다. Y 씨 집에서 처음 들은 그노시엔느(고대 그리스인을 뜻한다), 그 유리알같이 명징한 피아노 곡 악보에도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라고 써놓았다. 그나마 정상(?)스러운 표현을 하나 덧붙였으니 ‘확신과 절대적 슬픔을 가지고’. 그 지시어는 영화 ‘엘레지(Elegy)’를 떠오르게 했다. 그노시엔느를 남자 주인공의 독백처럼 들리게 했던 영화. 2009년 개봉된 이자벨 코이젯트 감독의 이 영화는 문학평론을 하는 대학교수 데이빗(벤 킹슬리)과 서른 살 어린 제자 콘수엘라(페넬로페 크루즈)의 사랑 이야기이다. 이혼 후 독신남의 자유를 마음껏 구가하며 사는 데이빗. 환갑 앞둔 그에게 다가온 콘수엘라는 성(性)적 대상이고 관계는 일회적 이벤트였다. 그것이 어린 연인에 대한 배려이고 자신에게도 늙어 추해지지 않을 예방책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콘수엘라는 그의 인생과 사랑 문법에 엇나가는 존재였다. 상처 많은 데이빗과 달리 대가족 집안에서 충분히 사랑받고 성장한 그녀는 정직하고 계산 없는 사랑을 한다. 노년의 자격지심은 결국 어린 연인을 떠나보냈고 뜻밖에(왜냐하면 그의 사랑은 이벤트였으므로) 극심한 상실감에 방황한다. 몇 년 후 다시 찾아온 콘수엘라는 말기 유방암 환자가 되어있었다. 데이빗은 그토록 탐했던 젊고 아름다운 가슴을 절제한 콘수엘라, 그보다 먼저 죽을 수 있는 콘수엘라 앞에서 ‘절대적 슬픔’을 느낀다. 데이빗이 느낀 절대적 슬픔은 사랑의 다른 말일 것이다. 에릭 사티의 그노시엔느는 제자로부터 사랑을 배우는 과묵한 노교수의 감정을 세밀화처럼 전한다. 에릭 사티의 음악 외에도 아보 페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 카운터테너 필립 자루스키의 목소리로 듣는 비발디의 오페라 지우스티노(Giustino) 등도 배우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음악 한 곡이 인생을 바꾼다. 열아홉 살까지 음악과 무관하게 살았다는 연주자 K. 대입이 코앞이던 어느 날, 방과 후 버스 정류장의 음반가게에서 들린 악기 소리에 ‘온몸이 빨려 드는 듯한’ 경험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보기도 배우기도 힘든 악기라는 것을 안 K는 대입 준비를 던지고 독일 유학을 떠난다. 단지 그 악기를 배우기 위해. K의 무모함과 용기에 공감됐던 것은 나 역시 그 악기와의 만남이 전율이고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그 악기,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 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30년 전, 프랑스 영화 ‘ 세상의 모든 아침’을 통해서다. 영화에는 17세기 중반, 프랑스를 배경으로 비올라 다 감바와 운명의 늪에 빠진 세 사람이 나온다. 아내가 죽자 오두막을 지어 비올라 다 감바와 함께 죽는 날까지 칩거한 천재 연주자 쌩뜨 꼴롱브, 꼴롱브의 제자로 궁중음악가가 되었으나 평생 스승의 음악혼을 탐하고 질시하며 고통받는 마랭 마레, 아버지처럼 연주자가 됐으나 아버지보다, 비올라 다 감바보다 더 사랑했던 마레에게 배신 당해 죽음을 선택한 딸 마들린. 영화는 이 세 사람, 운명의 불협화음을 비올라 다 감바에 실어 예술의 비밀을 일러준다. 위대한 예술은 인생의 고통과 고독을 담보로 한 것이라는. 마랭 마레가 평생 몸부림쳐 분투해도 스승의 연주에 가닿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꿈꾼 세속의 성공과 부귀영화가 준 안락이었다. 스승은 천상의 소리를 얻기 위해 삶의 온갖 악조건, 자폐적 성격으로 인한 고독, 세속의 희로애락에 감응하지 못하는 결벽성, 아내와 딸의 죽음이 할퀴고 간 끔찍한 고통 등을 담보해야 했다.(아, 인생은 그렇게 엄정하다. 모든 것을 갖게 하지 않는다. 당신이 아는 누군가 ‘모든 것을 갖고 있다’ 생각되는 이가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잘 모르는 것일 듯!) 비올라 다 감바의 현 위에서 연주된 세 사람의 인생 이야기라 영화 내내 그 낮고 무겁고 애절한 음률이 점령한다. 내내 듣다 보니 처음 접한 낯선 악기라는 것도 잊게 된다. 비올라 다 감바는 약 500년 전인 16세기에서 17세기, 유럽 귀족사회에서 연주되던 고악기다. 첼로의 전신이라고 하지만 줄이 더 많이 달리고 (첼로는 4현, 비올라 다 감바는 5-7현) 기타처럼 지판에 프렛이 달려있는 등 다른 점이 많다. ‘감바’란 무릎이란 뜻으로 비올라 다 감바는 ‘무릎 사이에 놓고 연주하는 비올라’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음량이 작아 화려한 음색의 첼로에 밀려 음악 역사의 밤으로 사라졌는데 알랭 코르노 감독이 세상의 모든 아침으로 다시 끌어냈다. 영화는 프랑스 국내 영화제로 최고 권위를 갖는 세자르 영화제 7개 부문 수상, 골든 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르며 명실공히 월드무비가 됐다.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청춘이었다. 그때는 음악만 들렸다. 몸의 통점을 모조리 찾아 건드리는 그 소리에 미칠 것 같았다. 이제 중년의 나이에 다시 보니 사람이 보인다. 천재 쌩뜨 꼴롱브가 특별한 재능 없는 제자 마랭을 받아들인 이유가 그의 고통을 읽고 나서라는 것, 딸이 죽자 생의 전부이던 활을 놓아버린 것 등의 장면이 비올라 다 감바 소리보다 크게 다가온다. 인생보다 예술이 위대하다는 것을 사랑 없는 예술은 공허하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덮어버렸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한 순간, 생의 모든 것이 지나가는 눈빛’이란 말을 이해한 것은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감독: 노먼 주이슨)’에서 신부 아버지로 분한 차임 토폴을 통해서다. 신기하고 존귀한 선물이면서 애간장을 끓게 하는 십자가, 자식이란 존재를 통해 겪은 희노애락애오욕의 길고 긴 세월을 단 몇 초로 표현해냈다. 명배우의 눈빛만이었을까. 그 눈빛을 더 빛나게 했던 것은 결혼식 장면 내내 흐르던 노래였다. 선라이즈 선셋(Sunrise Sunset), 그 노래는 사춘기 때 라디오 심야방송을 통해 처음 들었고 자주 들었다. 카카오 함량 높은 초콜릿처럼 달콤하기보다 쓰고 음울했던 멜로디에 콧날 시큰했던 기억도 나는데 사춘기의 감상만은 아니었다. 작사가 셀든 하닉은 처음 노랫말을 쓴 후 작곡가 제리 복의 부인에게 보여주었는데 부인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작사가의 누이 역시 노랫말을 보고 울었다. 이 소녀가 내가 키운 그 아이인가/ 이 소년이 놀고 있던 그 아이인가/이 아이들이 커가는 걸 기억 못하겠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언제 그 소녀가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나/ 언제 그 소년이 저렇게 키가 컸나 /저 애들이 작았던 때가 어제가 아니었나 /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해가 뜨고 해가 지고 / 쏜살같이 흘러가는 나날들 / 어린싹들이 밤새 해바라기로 변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중에도 꽃을 피우네 ‘선라이즈 선셋’의 히트로 주가를 더 올린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시작은 뮤지컬이었다. 숄렘 알레이헴(Cholem Aleikhem)의 소설 ‘테비에의 딸들’을 원작으로 한 이 뮤지컬은 1964년 초연, 8년에 걸쳐 3242회 공연했을 정도로 대중의 폭발적 사랑을 받았고 토니 어워즈 최우수상을 포함, 총 9개상을 받아냈다. 영화 역시 72년 아카데미 어워즈에서 3개 부문, 골든 글로브 어워즈에서 2개 부문을 수상했다. 뮤지컬에서 아버지 테비에로 나온 이스라엘 배우 차임 토폴(Chaim Topol, 1935년생)은 영화에서도 같은 역으로 나온다. ( 결혼식 장면의 ‘늙은 아버지 눈빛’으로 나를 흔든!) 테비에의 눈빛이 더 가슴 저린 것은 러시아에서 탄압받던 유대인 가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은 1900년대 초기의 우크라이나. 홀로코스트 이전,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러시아의 참혹한 유대인 박해 시기다. ‘선라이즈 선셋’이 흘렀던 장녀의 결혼식 마지막은 러시아 정부군의 난행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전통 유대방식에 반한 세 딸들의 결혼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테비에 가족의 이야기다. 세 딸을 모두 출가시키고 가슴도 집도 텅 빈 것 같은 아비 테비에 앞에 러시아 맹추위 속에 떨어진 유대인 추방령. 눈 내리는 진창길을 달구지 끌고 떠나는 테비에의 모습은 때마침 지는 석양으로 슬픔이 더해지는데 영화 포스터에 나온 바이올린 주자가 지붕에서 내려와 그의 뒤를 따르며 위무하듯 연주한다. 그게 마지막 장면이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이미지는 화가 샤갈의 그림들에서 따왔다. 그의 그림에서 바이올린이 많이 나오는 이유를 아는가. 바이올린은 디아스포라의 삶을 산 유대인이 즐겼던 악기다. 2000년 유랑한 유대인이 피아노나 하프를 들고 다닐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샤갈도 유대인이었다. 그러고보니 영화 속 바이올린을 직접 연주한 아이작 스턴, 감독 노먼 주이슨, 주인공 차임 토플도 유대인이다. 원작자 숄렘 알레이헴도!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한 곡의 노래가 200명 가까운 사람을 죽게 했다. 1930년대 헝가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충격적이고 불가해한 사건은 소설로 쓰였고 소설은 영화를 탄생시켰다. 1988년, 독일 작가 닉 바로코프가 쓴 소설도 1999년 롤프 슈벨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도 노래와 제목이 같다.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도대체 어떤 노래이길래 수많은 이들을 자살로 치닫게 했을까. 모두 나 같은 물음표를 달고 영화를 보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 내용보다 노래가 궁금했다. 영화 전반부는 삼각, 아니 사각 관계의 러브 스토리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작은 레스토랑을 무대로 펼쳐지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여자와 그녀를 둘러싼 네 남자의 소리 없는 난투극. 레스토랑 사장 자보, 그곳에서 피아니스트로 고용된 안드라스, 고객 독일인 한스...... 모두 일생을 걸고 일로나를 사랑한다. 애인 자보를 두고서도 안드라스와 사랑에 빠진 일로나. 두 남자는 일로나의 ‘질투금지, 싫으면 떠나든가’라는 통첩에 ‘당신을 잃느니 당신의 한 조각이라도 갖겠다’며 기이한 삼각관계를 받아들인다. 거기다 더해 일로나에게 청혼했다 차인 독일인 한스가 나중 나치 점령하 부다페스트의 독일군 대령으로 권력을 업고 나타나면서 치명적인 사각관계가 만들어져 모든 사랑이 절벽을 향해 달려간다. ‘글루미 선데이’란 음악은 영화 초반부, 피아니스트 안드라스가 첫눈에 반한 일로나에게 헌정한 것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예감했는지 장송곡 같으면서 기묘하게 아름다운 이 멜로디는 일로나뿐 아니라 레스토랑 고객을 사로잡고 나중 음반으로 만들어져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문제는 이 음악을 들은 이들의 자살행렬. 이제 영화를 떠나 실제로 가보자.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실제 글루미 선데이를 작곡한 이는 헝가리 피아니스트 셰레시 레죄(Seress Rezso)로 1933년, ‘세계의 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는데 2년 후인 1935년, 야보르 라슬로(Javor Laszio)가 노랫말을 붙일 때 ‘글루미 선데이’로 바꾼다. 영화 속에서는 피아니스트 안드라스가 구애곡으로 만들었다고 나오는데 실제는 셰레시 레죄가 연인과 헤어진 뒤 만든 곡이다. 위험한 노래라고 판단한 헝가리 정부는 금지곡으로 지정한다. ‘자살가의 찬가’라는 별칭을 달고 나라 밖까지 퍼지자 영국도 금지곡으로 묶었고 미국 뉴욕 타임스는 이 희한한 사건을 기사화한다. 잊혀질 듯하던 이 사건은 1968년, 작곡자 셰레시 레죄의 자살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정말 노래 하나가 멀쩡한 인간을 극약같이 죽음으로 이끌 수 있는가. 죽음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실제 과장되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 노래가 만들어진 30년대, 헝가리 국민은 세계대전의 전운과 대공황 속에 지옥을 살고 있었다. 1933년, 부다페스트 시민의 18%가 기아상태에 빠졌고, 실업률은 36%까지 올랐다고 한다. 삶의 벼랑 끝에 매달렸던 이들이 손을 놓기 전 마지막으로 본 꽃이 이 노래 아니었을까.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 낡은 외투를 입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터키의 옛 노래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노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먼 북소리’를 통해 알려졌다. 심신이 지쳐있던 하루키는 내면의 북소리에 펜을 던지고 유랑길에 올랐고 3년간의 유럽여행 후 그 책을 썼다. 북소리를 번역기로 돌리면 ‘ 힘들고 외롭고 지친 당신, 변화가 필요하다. 떠나라!’ 정도가 아닐는지. 내게는 노래가 먼 북소리다. 헝가리 가수 마르타 세베스첸(Marta Sebestyen)의 목소리가 대표적이다. 세베스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이슬람교의 아잔 소리가 떠올랐다. 신도들에게 예배시간을 알리기 위해 울리는 아잔은 인간만사, 희노애락에 오욕을 품어주면서 초탈로 이끈다. 폐부를 긁으면서 종내 세상 끝에 선 것처럼 쓸쓸하게 만드는 그 소리. 아잔소리같은 마르타 세베스첸의 목소리는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통해 처음 만났다. 1996년도 나왔으니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옛날 영화’겠지만 지금 봐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이탈리아 북부 한 수도원에 이름도 국적도 잃은 채 죽어가던 화상환자가 있었다. ‘영국인 환자’로 불리던 남자. 그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기막힌 사랑이야기가 광활한 사막을 무대로 펼쳐진다. 전쟁 전 사막지도를 제작하던 헝가리 탐험가 알마시는 동료 제프리의 부인 캐서린과 사랑에 빠진다. 이를 안 그녀의 남편은 경비행기를 이용해 보복을 가하는데 이는 사고로 이어져 남편은 즉사, 알마시와 캐서린은 크게 다친다. 알마시는 목숨이 경각에 달한 캐서린을 사막의 동굴에 두고 그녀를 살릴 비행기 연료를 얻기 위해 떠난다. 극비 사막지도를 적에게 넘겨가면서 연료를 구해 돌아온 알마시. 그러나 이미 캐서린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캐서린 없는 세상은 무의미했던 알마시에게 비행기 추락으로 입은 치명적 화상은 저주였을까, 은총이었을까. 수도원에서 그를 돌보던 간호사 한나는 알마시의 간절한 원대로 치사량의 모르핀을 주사해 그의 고통을 끝내준다. 간호사 한나역을 맡은 이는 무려 줄리에트 비노쉬. 영화 속 비중이 작지 않으면서 존재감이 떨어진 것은 알마시와 캐서린의 사랑 이야기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무대로 펼쳐진 사막의 드라마 또한 두 시간 넘는 상영시간이 짧게 느껴지게 만든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제6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 조연상, 각색상, 미술상, 촬영상, 의상상, 편집상, 음악상, 음향상 등 9개 부문을 석권해 감독 앤소니 밍겔라를 명장의 반열에 올렸고 원작소설인 ‘잉글리쉬 페이션트’를 부각했다. 작가 마이클 온다체는 이 소설로 영국의 맨부커상을 받았는데 지난 50년간 최고 작품에 주는 ‘골든 맨부커상’까지 받았다. 영화를 본 후 바로 소설을 밤을 지새며 보았던 나는 영화 역시 세 번이나 보았다. 지금 이 순간 작품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르타 세베스첸의 목소리다. 인도와 미국의 사막여행 후 ‘사막에 미친 여자’가 되었던 내 심장을 두드리는 먼 북소리, 그 환장할 목소리. 영화의 모든 것을 담은 그 목소리를 영화의 초입에 넣은 음악감독 가브리엘 야레(Gabriel Yared)에 찬사를.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축제 끝난 이른 아침을 기억하는가. 광란의 밤이 훑고 간 취기 남은 몽롱한 눈앞에 펼쳐지는 일상이 갑자기 낯설다. 어깨 비듬을 털며 지하도로 내려가는 사람들, 상가 셔터를 올리고 째지게 하품하는 상인들, 도로를 메워가는 자동차들...... 꿈이었던가. 지난밤이 전생인 듯 하다. 그 생경한 아침의 감정을 말과 글로 풀면 반이나 전할까. 그럴 때 도와주는 음악이 있다. 영화 흑인 오르페(Black Orpheus)의 주제곡 ‘카니발의 아침’. 인생에서 몇 번 안 될 그 생경한 순간의 감정을 넘치게 표현해준다. 영화 ‘흑인 오르페(감독 마르셀 까뮈)’는 1959년에 만들어져 우리나라에는 60년대 들어왔다. (손가락 하나로 모든 영화,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겠지만) 80년대 청춘을 보낸 나는, 지난 영화는 볼 수가 없어 심야 라디오를 통해 영화도, 음악도 처음 알게 되었다. DJ가 영화 소개를 장황하게 했는데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의 비극에서 소재를 따왔으며 무대를 브라질로 옮겨 만들었다’ 정도만 기억난다. 음악이 나오자 공기가 달라졌다. 전주에 기타소리에 맞춰 여가수의 허밍이 나오는데 절로 눈이 감겼다. 허밍은 1분 넘게 이어진다. 노랫말이 시작되면서 ‘세상에 이런 목소리가 있었던가’ 하는 찬탄이 터졌다. 쓸쓸하고 애절하면서도 씁쓸하고 감미로운..... 영화가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뒷날 (지금 젊은 세대에게 또 한 번 생소하겠지만) 대여점에서 빌린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겨우 보게 됐다. 관람 직전에는 기대가 더 높았다. 알고 보니 59년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60년 아카데미 영화제, 골든 글로브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등 유수의 영화제를 휩쓴 화제작이었다. 본 감상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 평론가들은 서양인의 서사를 브라질 삼바축제를 무대로 그려낸 이색적 아이디어, 또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도발적 시도에 주목했을 것이고 더불어 올로케이션으로 찍었다는 삼바 축제, 삼바, 보사노바 등 브라질 음악의 매혹 등에 점수를 주지 않았을까 싶다. 그 점엔 동의하지만 (신화 소재라 클리셰는 피할 수 없었겠지만) 사랑의 기승전결이 너무 쉽고 뻔했다. 50년대 제작한 시대 상황을 감안해야 하나? 아니다. 그 전 흑백영화 중 탁월한 작품이 얼마나 많은데! 어쨌든 내게 흑인 오르페는 나자리노(레오나르도 파비오 감독), 빌리티스( 데이비드 해밀턴 감독)같은 영화처럼 음악만큼은 좋지 않았던 작품으로 남았다. 그래도 영화의 실망이 ‘카니발의 아침’의 격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광기와 환락의 축제가 어둠과 함께 물러간 아침 이미지와 보사노바 리듬의 협주는 어떤 걸작도 쉽게 남기지 못할 명장면이다. 보사노바는 삼바에 재즈를 섞어 만든 음악장르로 브라질에서 50년대에 탄생했다. 이 영화에 참여한 음악가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은 보사노바 창시자 중 한 사람. 보사노바의 매력이 세상에 알려진데는 흑인 오르페의 주제곡 ‘카니발의 아침’의 영향이 컸다. 엘리제테 카르도소(Elizete Cardoso)의 목소리가 주는 전율을 바로 경험해보시길!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불륜과 혼외자. 드러나는 순간 사회적 인간으로서 종신형에 처해진다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했다. 더불어 민주당이 대선 영입 인재 1호로 내세운 조동연 씨가 전국에서 날아든 돌팔매를 못 견디고 결국 사흘 만에 자진 사퇴했다. 조 씨 사퇴 후 ‘선출직 공직 후보자도 아닌데 과거의 사생활로 전 국민 앞에서 공격받고 망신당하는 게 온당한가’라는 질문을 곱씹는다. 정치와 국민정서의 냉엄한 현실이라고 하자. 이제 그 현실에 손절한 이후의 조 씨와 아들의 삶은 어찌할 것인가. 사회적 사건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게 문학과 예술이다. 삶은 수학처럼 공식과 정답이 있을 수 없고 모든 문제는 시대, 문화에 따라 달리 해석되며 인간의 죄 역시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이주일 이상 걷지 않고서는 그 인간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인디언 속담처럼 속단하지 말라는 게 문학과 예술이다. 사랑과 불륜 이야기가 넘쳐나는 영화에서도 걸작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힌다. 배경음악 때문에 나를 미치게 한 페드라(Phaedra)가 떠오른다. 남편의 전처 자식을 사랑한 비극, 그리스 신화 파이드라와 히폴리투스 이야기는 1962년, 미국 천재 감독 줄스 다신에 의해 영화화됐다. ‘천재 감독’이라는 찬사는 내가 붙였다. 영화광인 나의 걸작 선정기준은 ‘단 한순간도 클리셰 (과거 썼던 진부한 방식이나 내용)를 드러내지 않는 작품’인데 영화 페드라도 그랬다. 신화 속 파이드라처럼 그리스 해운업계 실력자 타노스의 아내인 페드라는 전처 아들인 런던 유학생 알렉시스와 사랑에 빠진다. 부귀영화와 남편의 끔찍한 사랑에도 삶이 가치 없었던 페드라에게 알렉시스와의 사랑은 살아갈 이유였는데 이를 꿈에도 모르는 남편이 아들을 정략결혼시키려 한다. 이 결혼을 막기 위해 남편에게 모든 비밀을 폭로해버리는 페드라. 분기탱천한 남편에게 폭행당한 아들은 충격 속에 차를 몰고 질주하다 추락사한다. 이를 알게 된 페드라, 그 길로 삶을 놓아버린다. 영화 페드라의 이야기를 신문 보도식으로 전하면 ‘ 남편의 전처 아들과 불륜행각 끝에 모두 자살’ 정도가 될 것이다. 막장 불륜 자살녀를 안나 카레니나란 소설을 통해 인간 이해를 확장시킨 톨스토이처럼 감독 줄스 다신은 페드라를 통해 성공한 영웅담이 아닌 정직하게 패배한 인간의 삶도 감동과 의미를 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페드라는 세상의 잣대가 아닌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대로 행동했고 그로 인해 세상이 내린 죄와 벌을 받아들였다. 저주받은 삶과 사랑을 페드라 방식으로 맞섰다. 줄스 다신은 그 메시지를 인물의 입을 통해 말하지 않는다. 예상되는 전개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스의 부서지는 태양, 계절과 밤낮에 따라 달리 보이는 백사장과 바다, 그리고 줄스 다신이 만들고 선곡한 음악이 인물이 말하지 못한 것, 드러내지 않는 것을 전한다. 그게 관객을 설득시켜 영화 페드라를 막장 불륜 이야기가 아닌 인간 이해를 확장시킨 걸작으로 만들었다. 알렉시스와 사랑을 확인한 후 피아노 앞에서 부르는 페드라의 주제곡 ‘아가피 무(Agapi Mou)’가 사랑의 명곡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난데없이 떠오른 음률. 그런데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려운 곳을 긁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하루 종일 기억의 재를 뒤지다 아하! 하는 탄성을 내뱉는다. 영화 속 음악이었다.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탈리아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마지막 사랑(The Sheltering Sky, 1990)’. 데보라 윙거가 나왔을 거야. 사막이 무대였어. 줄거리가 어떻게 됐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일본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작곡한 장엄한 주제곡, 처연한 느낌의 아프리카 음악들의 가슴을 적신 기억은 선연하다. 그 기억이 오래전 영화를 호출해 다시 보게 만든다. 영화 ‘마지막 사랑’의 무대는 아프리카 모로코다. 부부관계 권태와 작품 창작의 벽을 만나 여행길에 오른 작곡가, 작가 부부 포터와 키트. 그들 곁에는 부유하고 잘생긴 동행자가 있어 삼각관계를 예상하게 했는데 돌연 동행자는 다른 길로 새 버린다. 일단 러브 스토리는 아니라는 이야기. 영화 첫 장면부터 나와 심장을 강타하더니 중간중간 배경에 흘러 감정을 뒤흔들던 아프리카 토속 목소리들이 있었다. 가장 강렬했던 목소리에 대해 영화 속에서도 대화가 나온다. 부부에게 비극의 광풍이 불기 전 평화로운 카페에서 나누던 주연 세 사람의 대화 “계속 나오는 이 노래는 뭐죠?” “아브 델 와하브(Abdel Wahab)란 가수의 ‘당신 무덤 앞에서 울다’란 노래” 노래 제목은 불길한 예언이었다. 여행 중 말라리아에 걸린 남편 포터는 사막 한가운데서 죽고 만다. 키트는 완전히 길을 잃는다. 사막의 모래바람을 따라 흐르다 사막 대상의 행렬에 휩쓸린다. 사랑도 길을 잃는다. 낙타몰이꾼 사내가 이끄는 대로 그의 오두막에 끌려 들어가 그의 욕망에 몸을 내맡긴다. 그때까지 품고 있던 일기장을 찢어 줄 위에 주렁주렁 널어놓으며 작가로서의 삶도 사막 바람에 날린다. 미모와 고급의상으로 빛나던 모습이 점차 늙은 낙타처럼 변해버린다. 길을 잃었는가. 마지막 장면에서 현자의 잠언 같은 질문을 받는 키트. ‘네’하고 답하는 그녀 얼굴에 미소가 지나간다. 미국 중산층의 안락한 삶에서 나올 수 없었을 미소. 그녀는 길을 잃기 위해 길을 떠났다는 역설을 깨닫는다. 그 깨달음을 위해 삶은 잔인하게도 남편의 죽음, 사막의 고행을 요구했다. 인도와 미국에서의 두 번의 사막여행으로 ‘사막에 미친 여자’가 된 나는 이 영화와의 재회로 일주일은 행복할 것 같다. 기억의 무덤 속에 있던 영화를 끌어낸 음률, 아브델 와하브의 노래를 다시 찾아 듣는다. 내게 있어 영화 ‘완전한 사랑’의 주연은 아브델 와하브의 목소리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글 쓰다 막힐 때는 시집들이 꽂혀있는 책장 앞으로 간다. 그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 아무 시집이나 꺼내 들어 아무 곳이나 펼쳐 든다. 날카롭게 벼린 시어 하나가 툭 튀어나와 막힌 생각을 뚫어줬으면 하는, 주술에 기대는 듯한 마음으로 뒤적인다. 오늘 손에 잡힌 시집은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좍 펼쳐지는 부분은 닳도록 읽은 시 ‘그대가 늙었을 때(When You are Old)’가 담긴 쪽이다. 예이츠가 평생 사랑했던 운명의 여인 모드 곤(Maud Gonne)에게 바친 시인데, 내가 아는 사랑의 시 중 이 이상의 절창이 있을까 싶다. 이탈리아의 가수이자 작곡가인 안젤로 브란두아르디(Angelo Branduardi)도 이 시에 반해 노래로 만들었다. 기타 전주는 사랑 고백을 앞두고 떨리는 사내의 심장 소리 같고 노래는 오랫동안 삭힌 그리움, 두려움을 들킨 순정한 사내의 마음이 느껴진다. 노랫말은 예이츠 시를 거의 그대로 썼다. ‘그대 늙어 머리 희고 졸음이 많아져 /난로 앞에서 고개를 꾸벅일 때/ 이 책을 가져가요/ 그리고 천천히 읽으며/ 그대 눈이 한때 지녔던 부드러운 눈빛, 깊은 그림자를 꿈꿔봐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대의 기품을 사랑했으며 /거짓이든 진실이든 그대 아름다움을 사랑했는지/ 그러나 단 한 사람, 그대 안의 순례하는 영혼을 사랑한 이가 있소/ 또한 그대 얼굴의 변화에 깃든 슬픔을 사랑한 이가......(후략) 가사 초반 나오는 ‘책’은 예이츠가 사랑 시들을 담아 모드 곤에서 선물한 노트라는 것. 모드 곤을 향한 예이츠의 사랑이 무려 30년 세월이었다는 것을 알면 시가 다르게 읽힐 것이다. 시인이 시에 담아 하고 싶었던 말은 ‘먼 훗날, 나 예이츠가 선물한 책 속의 시를 보면서 기억해 주시길 바라오. 숱한 사내들이 당신의 청춘과 아름다움만을 사랑했지만 나 예이츠는 당신의 영혼을, 그리고 늙음과 슬픔까지 사랑했다는 것을 말이오!’ 정도일 것이다. 예이츠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난다. 그가 사랑에 빠진 1890년대는 고국 아일랜드가 영국 통치 아래 신음하던 때였다. 배우였던 모드 곤은 아일랜드 자치, 독립을 위해 혁명에 투신, 예이츠와의 낭만적 사랑 대신 혁명동지 존 맥브라이드와의 결혼을 선택한다. 독신으로 살던 예이츠는 그의 나이 51세인 1916년, 모드 곤 남편이 투쟁 도중 잡혀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한 해, 예이츠의 기행이 이어진다. 남편 잃은 모드 곤에게 찾아가 재차 청혼했다 거절당한 예이츠는 이후 그녀의 21세 양녀에게 청혼했다 역시 거절당한다. (롤리타를 사랑해 가까이 있고 싶어 그녀 어머니와 결혼한 험버트 교수 같은 심사였을까) 그해가 가기 전 예이츠는 소개로 만난 25세 여성과 결혼한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여자에 대한 30년 넘는 사랑. 젊음도 아름다움도 모두 보낸 여인의 영혼과 슬픔만이라도 갖고 싶었던 사랑, 끝내 버림받은 상처투성이 영육으로 해버린 결혼. 60편 넘는 사랑 시는 그 산고의 대가일 것이다. 글 좀 안 풀린다고 재능 없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학하던 마음이 좀 가벼워진다. 머리 나쁜 게 머리 아픈 것보다 낫지 않을까.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첫눈이 내렸다. 감정은 나이 들지 않는다고 하던가. 첫눈......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눈사람 되도록 걸었던 스무 살로 돌아간다. 첫눈 오면 내 어린 시절부터 청춘시절까지, 라디오와 거리의 음반가게에서 종일 틀어대던 노래, 프랑스 샹송 가수 아다모(Salvatore Adamo)의 눈이 내리네(Tombe la neige)가 환청처럼 들린다. 고등학교 불어 시간에 처음 들었던 샹송도 아다모의 그 노래였다. 팝송보다 샹송에 더 빠졌던 그때, 에펠탑 아래에 샹송을 들으며 앉아있는 꿈을 꾸곤 했다. 코르시카를 듣지 않았다면 지금도 프랑스 노래는 샹송으로만 알았을 것이다. 노래가 넘쳐나는 세상, 대개의 노래는 나뭇가지에 잠시 앉았다 뜨는 새처럼 귓가를 맴돌다 멀어진다. 그런데 심장으로 직진하는 노래가 있다. 페트루 구엘푸치(Petru Guelfucci)의 코르시카(Corsica)가 그랬다. 지중해에 떠있는 프랑스령 섬, 코르시카. 나폴레옹과 콜럼버스가 태어난 곳이며 스페인 카탈루냐처럼 분리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지엽적인 곳의 지엽적인 역사로 알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성스럽고 웅장하면서도 비애 서린 페트루 구엘푸치의 목소리를 듣고서 노래 제목이면서 그의 고향인 코르시카가 궁금해졌다. 천년의 한을 품은 소리라고 했던가. 코르시카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저 수식이 아님을 알게 된다. 현재 프랑스령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지중해 주변 강국들의 점령과 지배, 전쟁 속에 만신창이가 된 코르시카. 기원전 카르타고의 지배를 시작으로 로마, 아랍 제국, 이태리 제노바 왕국 등이 코르시카를 지배했다. 프랑스령이 된 것은 18세기, 지중해 무역의 쇠퇴로 세력이 약해진 제노바 왕국이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매각하게 되면서다. 하루아침에 프랑스 영토로 넘어가게 된 코르시카인들의 지난한 독립투쟁이 시작됐다. 언어와 문화, 인종이 다른 프랑스에 동화될 수 없다며 코르시카의 애국가, 코르시카의 국기를 만들어 오늘까지 싸우고 있다. 3년 전인 2017년 치러진 선거에서 민족주의 정파 ‘코르시카를 위하여’가 승리했다. 이들은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코르시카 언어 존중, 자치권 확대, 정치범 사면 등을 요구하며 마크롱 대통령을 골치 아프게 하고 있다. 식민지배의 한, 독립투쟁의 결기가 코르시카만의 폴리포니(Polyphony 다성 음악)를 만들었다. 코르시카 폴리포니 속에서 유럽 가톨릭의 성스러움, 음을 길게 늘여 부르는 아랍풍 멜리스마 창법 등 여러 문화권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을 그들 역사를 돌아보면서 이해했다. 폴리포니 스타 페트루 구엘푸치의 목소리의 감동은 더해졌다. 그 이후 나는 프랑스 하면 샹송이 아닌 폴리포니를 먼저 떠올린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손에 들려 잠 못 들게 하는 책은 ‘세 여자’다. 작가 조선희는 잊혀진 여성독립투사 허정숙, 고명자, 주세죽 세 여자의 일대기를 소설 형식으로 되살려 놓았다. 2017년 나온 책을 읽은 이들은 ‘3년 전 화제가 됐을 때 안 읽고 왜 이제야?’ 하고 물을 수 있겠다. 그에 대한 답이 오늘 글의 주제다. 작가에게 미안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녀의 전작들을 제목만 보고 내 스타일이 아니라 고 지레짐작, 독서목록에서 제외시켰었다. 또 그 기억으로 ‘세 여자’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내 독서모임 다음 책이 ‘세 여자’로 선정돼 내 의지 없이 잡게 된 것이다. 소설은 나를 단박 100년 전, 역사의 격변 속에 떨구었고 세 여자의 파란만장한 운명의 회오리에 휘몰리게 했고 이틀 밤을 꼬박 새우게 만들었다. 근거 부실한 순간 감정의 선입견을 반성한다. 그 같은 선입견으로 놓친 음악이 얼마나 많았을까. 뒤늦게 듣기 시작한 그리스 출신 미국 작곡가 야니(본명 야니스 흐리소말리스 Yannis Hrysomallis)와의 만남도 그랬다. 음악광 친구와 대화하다 ‘왜 야니 음악에 관심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들었다. ‘전자음악 쓰는 뉴에이지 음악가잖아. 몇 곡 들어봤는데 가벼워서 내 스타일이 아니었어’ 라는 내 대답에 야니 광팬인 친구의 장광설이 터졌다. ‘야니 음악은 뉴에이지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변화무쌍, 예측불허야. 이력도 독특하지. 수영선수였었고 심리학도였는데 음악에 빠져 독학으로 피아니스트, 작곡가가 됐어. 세상을 돌면서 만난 민속 음악가, 민속 악기들을 자기 음악에 녹여 작곡을 해왔어. 그게 야니만의 아주 독특한 컬러를 만들어냈지‘ 야니 사랑에 눈먼 친구가 눈앞의 우정에 초를 친다. ‘가벼운 건 네 입이지 야니의 음악이 아니야’ 감정이 살짝 상한 나는 ‘아무리 위대한 음악도 취향을 넘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다. 친구는 내 열변에 배경음악을 깔 듯 야니 음악 하나를 틀어준다. 입을 닫는다. 얼어붙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전자음악과 함께 나오는 대피리 같기도 하고 첼로 같기도 한 소리가 가슴을 두드린다. 이어 나오는 바이올린 활이 심장을 그어댄다. 눈을 감는다. 한바탕의 회오리가 지난 듯한 연주 끝에 ‘이게 야니 음악이었다고?’라고 물으려다 또한 입을 닫는다. 음악을 들은 감동을 얘기하려는 심사보다 야니의 연주가 가볍다고 속단한 내 가벼움을 입가림 하려는 심뽀를 들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친구가 들려준 음악은 야니 작곡의 프렐류드(Prelude/ 전주곡)였고 나를 감전시킨 소리는 아르메니아 악기 두둑(Duduk)이었다. 세계 일주하듯 연주회를 열어온 야니는 콘서트에 머물지 않고 각 나라의 민속음악과 악기를 자신의 작곡에 끌여들여 ‘세상의 없는 소리’를 만들어온 음악가였다. 세 여자를 완독한 후 야니의 음악세계를 탐험해야겠다. (인터넷ㅍ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하얀색으로 덮어. 끝’ 인생 첫 집을 장만해 들떠있는 친구의 인테리어 조언 요구에 대한 나의 답이다. "병실이냐? 하얀색으로 도배하게? 요즘 병실도 '꽃가라‘로 예쁘게 하더만!" 내 말을 질투(?)로 받는 친구에게 진의를 전하기 위해 오래전 경험담을 풀었다. 10년 전, 뉴질랜드 남섬 최대 도시인 크라이스트처치에서 2주간 현지살이를 한 적이 있다. 열다섯 평 정도 되는 작은 연립주택은 렌트 전용이라 소파, 침대, 옷장, 오븐이 다였다. 도착 첫날, 저녁을 해먹기 위해 세컨핸드 샵(우리로 치면 중고가게)에서 식기를 사오면서 생경하고 불안한 기분에 휩싸였다. ‘2주간이지만 그래도 먹고 살 집인데 뭔가 더 사고 들여야 하지 않나’ 같은 강박적 생각들이 올라온 것이다. 2주가 지난 후의 깨달음은 내 반평생에 내려친 불가의 죽비였다. ‘아무것도 없어도 아무렇지 않구나!’ 내 아파트가 떠올랐다. 방 4개는 물론, 현관부터 늘어선 생활용품, 장식품, 언제 쓸지 몰라 일단 쟁여놓은 물건들...... 모두 필수품이라고 생각해 수 차례의 이사 동안 끌고 다녔던 것이 다 무엇이었나. 매일이 산만하고 인생이 복잡했던 게 혹 그 적재물들 때문 아니었을까. 뉴질랜드 집의 벽처럼 하얀 소파에 앉아있으면 마치 햇살 따스한 흰모래밭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생각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제일 먼저 집 안을 비우리라. 오래된 벽지와 커튼을 하얀색으로 바꾸리라. 결론부터 말하면 대성공. 매일 뉴질랜드 거실처럼 희고 텅 빈 공간에서 맞는 아침은 반생을 ‘이 평화를 모르고 살아온 날들’을 억울하게 한다. 한 달 후 인테리어 공사를 끝낸 친구의 초대를 받았다. 희고 텅 빈 공간 한쪽에 놓인 푸른색 의자가 사막도시에서도 자라는 박하풀처럼 보였다. 빈 손으로 온 것을 타박하는 친구에게 (갑자기 호출한 자신의 호들갑은 잊고) 음악 선물을 했다. ‘ 친구야. 희고 텅 비어서 신비롭게까지 보이는 이 공간에 어울리는 곡이야’ 핸드폰을 통해 영국 리베라 소년 합창단의 ‘ Always with you’가 흐른다. 친구가 내리는 커피향과 함께 빈 거실을 가득 채운다. 리베라 소년들이 이 노래 부를 때 모습처럼 흰 커튼 아래 흰 커피잔을 들고 고개 숙여 차를 마시던 친구의 눈가가 젖어온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도 그랬다. 왜 순수는 인간을 울리는가. 세상의 때를 씻어주는 회당에서 세상의 때 묻지 않은 소년들이 찌들고 다치고 부서진 어른들에게 ‘Always with you’라고 속삭인다. 곡이 끝나면 마음 세탁기에 탈수 코스까지 마치고 나온 느낌이다. 영상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I am the day나 Ave Maria도 좋다. 리베라 소년합창단 노래들의 후유증은 ‘당분간 다른 노래들을 듣고 싶지 않게 만든다’는 것. 친구의 하얀 집에 눈 내릴 때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그때는 집들이 선물과 함께.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몰도바에서 6년 유학했다는 아티스트를 만났다. ‘한 남자’ 때문에 죽기 전 가고 싶은 여행지 목록에 올라있는 나라, 몰도바.(‘한 남자’가 궁금하실 당신. 뒤에 풀 예정이니 일단 몰도바 이야기로 직진 부탁한다.) 내 주변에 몰디브를 다녀왔다는 사람은 차고 넘치지만 몰도바 여행자는 없었다. 꿈의 여행지 몰도바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내게 아티스트는 찬물을 퍼붓는다. ‘볼 거 별로 없어요. 갈 데도 특별히 없구요.’ 그의 말은 내게 ‘ 만난 사람이 별로 없어요. 특별했던 사람도 없구요’로 번역돼 들렸다. 번역기는 서른 개 넘는 나라를 배낭여행하며 떠돈 내 경험이다. 올해 초,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작업실을 만들자 ‘심심하던 차에 건수 생겼다’며 많은 지인들이 놀러 왔다. 환대의 마음으로 헤이리의 ‘나의 최애 공간’을 데려가 구경시켰다. 들꽃 장식으로 디저트를 내주는 피사로의 시간, 융으로 커피를 내려주는 서양화가의 작업실 소금 항아리, 집시처럼 살고 싶은 욕망을 불 지르는 스페인 맥주집 츄로바 등. 헤이리 일주 후 지인들은 ‘헤이리가 이런 곳인지 몰랐다’고 말했다. 그 말에 번역기를 돌린다. ‘예술마을이라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다른 유원지와 비슷하더라. 실망만 안고 돌아갔다. 그런데 너를 통해 숨은 보석 같은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니 헤이리가 특별해졌다’ 돌아보면 내 나라건 외국이건 그곳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은 여행지의 인연들이었다. 그 인연들은 그만의 이야기를 품은 그만의 장소로 데려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사했다. 행복학 전문가들은 외향적인 사람이 내향적인 사람보다 행복지수가 높다고 말한다. 사람 사귀는데 능한 외향적인 이들에게 그만큼 정보, 기회, 이벤트가 많이 주어져 인생이 풍부해진다는 이야기다. 6년간이나 머물렀는데 ‘볼 것 없고 갈 데 없었다’고 말한 몰도바 유학 출신 아티스트는 혹시 내향적 성격 아니었을까. 아니면 공부만 죽도록 한 걸까. 몰도바를 죽기 전 꼭 가보고 싶은 나라로 만들어준 ‘한 남자’이야기로 넘어간다. 20년 전, 작업실에서 밤을 샌 후, 피폐해진 내 귀를 바이올린 활이 날카롭게 그어버렸다. 지혈을 바라지 않았던 행복한 자상(刺傷). 꿀잠 자고 출근하던 후배 작가가 자신이 듣고 있던 음악을 이어폰으로 들려준 것이다. 4분 34초의 광풍이 끝난 후 후배가 생경한 세 단어를 전했다. ‘세르게이 트로파노프예요. 몰도바.’ 동유럽 루마니아 옆에 위치한 소국, 몰도바 공화국 태생 바이올린 연주가 세르게이 트로파노프(Sergei Trofanov)의 몰도바(Moldova)라는 곡이라는 것. 세르게이 트로파노프. 그 집시 바이올리니스트로 인해 몰도바라는 나라를 알게 되고 몰도바 명물 와인보다 진하다는 집시문화와 팬플룻 소리에 취했다. 오랫동안 깨고 싶지 않던 취기. 몰도바 여행을 꿈꾸며 정보를 찾아보면 눈에 들어오는 게 별로 없다. 유럽의 최소국, 최빈국이란 단어들이 눈에 거슬린다. 그래도 꿈은 시들지 않는다. 몰도바를 특별하게 만들어줄 인연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누군지 모를 그와 몰도바 와인을 마시며 몰도바 연주까지 듣는다면!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한옥 마당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오실래요?’ 지난 주말, 피아니스트 지인으로부터 하우스 콘서트 초대장을 받았다. 비로소 코앞에 다가온 ‘위드 코로나’가 실감되었다. ‘좁은 공간에서 다닥다닥 붙어 앉아 관람하는 것이 특징’인 하우스 콘서트라 엄중한 코로나 시기에 숨 죽을 수밖에 없었다. 1년 넘게 갈 수 없었던 하우스 콘서트 소식에 기대와 설렘이 교차했다. 처음 하우스 콘서트를 알고, 찾아다니던 때도 같은 감정이었다. 20여 년 전, 유럽 배낭여행 중 ‘하우스 콘서트’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음악회라 하면 공연장은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을, 무대는 클래식 연주를 떠올렸던 내게 개인 집 정원이나 동네 카페, 성당 등 작은 공간에서 소수의 사람이 모여 가볍게 여는 하우스 콘서트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월드뮤직 무대도 자주 열렸다. 이탈리아 지방 바닷가 마을 오시모에서 만난 하우스 콘서트장은 개인집의 마룻바닥 거실이었다. 대여섯 평 됐을까. 스무 명 가까운 관람객은 옆 사람과 붙어 앉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관람석 바로 앞에 선 연주자의 숨소리와 땀냄새가 느껴졌다. 악기 소리가 마룻바닥을 타고 온몸에 전해져 감전되는 경험을 하면서 ‘최고의 무대는 대형공연장 로얄석’이라는 고정관념을 깼다. 귀국한 뒤 몇 곳 안되는 전국의 하우스 콘서트장을 수소문해 찾아다니다 마니아가 되었다. 대개 만원, 이만 원이었던 착한 입장료가 매력을 더했다. 하우스 콘서트의 부작용은 ‘중독되면 일반 공연장은 재미없어 못 가게 될 수 있다’는 것. 일반 공연은 객석에서의 연주 감상이 전부지만 하우스 콘서트는 붙어 앉은 옆사람과 쉽게 대화친구가 되고 공연 후의 와인파티 같은 뒤풀이를 통해 연주자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음악을 사랑하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오랜만이라 추억까지 소환하며 들떠 찾은 종로 한옥에서의 하우스 콘서트는 피아노 공연이었다. 한 시간 정도의 공연시간 내내 한 악기만 연주하면 관객들이 지루해할까 봐 특별출연자를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그날 특별무대는 플라멩코 기타와 팬 플롯. 특별무대는 늘 선물 상자 안 또 다른 선물상자를 발견한 느낌을 준다. 더군다나 기타 연주곡은 ‘탱고 앤 스카이(Tango and Ski)! 플라멩코의 나라 스페인에서 공부했다는 기타리스트 이준호의 연주는 곧바로 심장을 퉁겼다. 20년 전 배낭여행하던 펄떡대던 청춘의 심장이 살아나는 듯했다. 아무리 좋은 음악도 자주 들으면 질린다. 그런데 오래되어도 자주 들어도 늘 같은 전율을 주는 음악이 있다. 내게 탱고 앤 스카이가 그렇다. 콘서트에서 만난 여러 기타리스트에게 최애곡을 물으면 탱고 앤 스카이가 빠지지 않았다. 작곡자는 튀니지 출생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롤랑 디용(R.Dyen 1955-2016). 스카이는 하늘을 뜻하는 게 아니라 프랑스 속어로(Skai) 가짜라는 뜻이다. 즉흥 연주를 즐겼던 롤랑 디용이 한 파티에서 지루해하는 이들을 춤추게 하기 위해 즉석에서 만들었으며 그래서 제목도 장난스레 지었다나. 장난스레 지은 음악이 장난 아닌 위대한 세계적 기타 명곡이 되었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요즘 사는 재미 중의 하나가 대선 토론회다. 그런데 지지하는 당과 상관없이 여당보다 야당 방송을 더 재미있어하는 나를 본다. 홍준표 씨와 하태경 씨 때문이다. 두 사람의 정치철학과 정책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연예인 같은 매력이 있어서도 아닌데 왜일까. 모범생 같은 말을 하는 다른 후보와 대별되는 튀는 말, 센 말 때문이다. 심리학의 행동경제학의 ‘절정- 결말이론’이 떠오른다. 절정과 결말을 주로 기억하는 인간 심리.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맹수 등 가혹한 자연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가장 화급한 문제, 당면한 문제 처리부터 해야 했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절정과 결말을 각인하면서 살아남은 조상의 후예라는 것이다. 홍준표 씨와 하태경 씨 두 사람 다 토론 내내 튀는 말, 센 말을 하다가 끝으로 가면서 순화된 표정과 말을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두 사람의 성정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캠프 내에 혹은 조력자 중에 그 같은 행동경제학 이론을 조언해 주는 이가 있는가도 혼자 생각해봤다. 음악도 나를 사로잡은 곡들은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식으로든 ‘튀기’ 때문이었다. 특히 월드뮤직은 비영어권이 대부분이라 가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음률이 튀거나 가수가 튀거나 퍼포먼스가 튀거나 아니면 음악에 얽힌 배경 이야기가 튀는 등 일단 눈길을 사로잡아야 더 찾아보게 된다. 내 핸드폰 알림음으로 쓰고 있는 노래 ‘Yo soy Maria’가 대표적인 예다. 탱고의 강렬한 선율, 그보다 더 강렬한 목소리에 도대체 누가 만들고 누가 부르는. 어느 나라 노래인가를 궁금하게 했다. 작곡자는 탱고를 클래식의 반열에 올린 아르헨티나의 아스트로 피아졸라 (1921- 1992). 중년의 피아졸라는 1967년, 우루과이의 시인 호라치오 페레르(1933-2014)와 함께 레너드 번스타인이 만든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속 곡들 같은 음악을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한다. 그 결과 2막 구성의 탱고 오페레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리아’가 탄생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빈민가에서 태어나 카바레와 사창가를 돌던 마리아의 사랑, 고독, 구원에 대한 이야기. 이 오페레타에서 마리아가 부른 ‘Yo soy Maria’가 대히트한다. 오페레타 무대에서 주인공 마리아는 뭇 남성들의 갈망을 쥐고 흔드는 팜므파탈의 모습으로 이 노래를 부르는데 가사의 유혹은 더 타오른다. ‘나는 마리아. 내가 누군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탱고의 마리아. 빈민가의 마리아. 밤의 마리아. 치명적인 정열의 마리아. (중략) 여자들은 모두 나를 질투하고 남자들은 모두 내 발밑에 있어 그들은 언제나 내 낚시에 걸리고 말지. 나는 노래하며 사랑을 하는 아주 지독한 마녀. 당신이 반도네온으로 나를 유혹하면 난 당신을 힘껏 물어줄거야. 내 안의 경련하는 꽃으로...’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건 지난 4월 세상을 뜬 이탈리아 칸초네 가수 밀바(Milva 1939-2021)를 통해서다. 튀는 빨간 머리 가수로 유명세를 더한 그 밀바 말이다. 튀는 노래를 월드뮤직 명곡으로 만든 건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작곡 덕일 것이다. 대개 월드뮤직은 처음에 튄 음악들의 경우 많이 들으면 질린 경우가 많았다. 처음 튀어서 재미 본 정치인 중 정작 괜찮은 사람이 드물었던 것처럼....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영화 평론가 정성일 씨의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 외계인이 실제 있어 내게 지구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것 하나만 말하라 한다면 음악을 소개 하겠다” 청중 한 사람이 왜 영화가 아니고 음악인가 물었다. 그의 답 “ 영화는 너무 말이 많아요” 그런데 음악도 소음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세상과 인간에 치여 혼자 있고 싶은데 무심코 튼 음악마저 신경을 긁는다. 음악을 끄면 정적이 고통을 새로 부각시킨다. 그럴 때 카를로스 나카이를 찾는다. 아! 그의 플루트 소리. 내 사는 하늘 아래 다른 세상이 있고 문명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초원이 있어, 새벽이슬 머금은 나뭇가지 하나 뚝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분다면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신비로운 주술가가 만든 신기한 진통제가 몸에 듣는 듯 편해진다. 카를로스 나카이의 이름에 붙는 ‘북미 인디언 나바호족 전통 플루트 연주자’라는 소개. 그 한 줄 소개는 아메리카 땅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와 원래 그 땅의 주인인 북미 원주민의 참혹했던 고통을 품고 있다. 유럽인이 아메리카 땅에 발을 디디며 퍼뜨린 전염병과 원주민의 땅을 빼앗는 과정에서 자행한 대량 학살은 북남미 원주민 종족의 씨를 말렸다. 미국은 얼마 안 남은 원주민들을 위한 답시고 인디언 보호구역을 따로 만들어 강제이주시켰다. 현재 약 200만 명의 북미 원주민 중 25% 정도가 300개 넘는 보호구역에서 거주하고 있다. 미국 헌법은 보호구역의 자치권을 보장하고 있어 인디언들은 나라 이름을 만들고 정부와 법도 새로 만들었다. 나바호족 카를로스 나카이는 자신의 나라를 미국이 아닌 나바호국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말만 독립국이지 인디언들은 농업, 단순 노동 등으로 먹고살기 힘들어 극빈자 보조금으로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황량한 땅에서 피폐하게 살다 술, 마약, 도박에 빠진 이들도 적지 않다. 극심한 인종차별, 대책 없는 사회격리가 낳은 미국 내 인디언 자치국의 현실이다. 카를로스 나카이는 이 같은 현실에서 사라지고 잊혀가는 과거 인디언 문화를 플루트 하나로 세상에 일깨웠다. 1946년에 태어난 나카이는 교육 현실도 척박할 수 밖에 없는 인디언 사회에서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미해군 근무까지 마쳤다. 트럼펫 주자를 꿈꾸며 미국 주류에 속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불의의 사고로 트럼펫을 불 수 없게 되었다. 나카이는 원주민 전통 악기 삼나무 피리 연주를 독학으로 배우며 플루트주자로 변신한다. 1983년, 그의 나이 30대 후반에 나온 첫 앨범 Changes로 ‘이 세상에 없는 소리’, ‘영혼의 소리’라는 찬사를 받으며 세계 무대에 서기 시작한다. 나카이는 이후 월리엄 이튼, 필립 글래스, 폴 혼, 나왕 케츠그 등 세계적인 음악인들과 협주 무대를 갖고 협주 앨범을 내는 등 명실공히 세계적인 월드뮤직 스타가 된다. 그러나 카를로스 나카이의 음악은 독주로 듣는 게 최고다. 93년 발표된 ‘Canyon Trilogy’음반부터 들어보시기를.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명상으로 탈모를 치료한 남자가 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는 더 된다. 늙어가던 피부가 아이처럼 희고 뽀얗게 변하고 배도 들어갔다.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다는 이야기다. 내 주변에서 일어난 ‘세상에 이런 일이’의 주인공은 전직 언론사 기자였던 60대 중반의 남성. 매일 새벽 5시에 기상, 한 시간 넘는 명상을 십 년 넘게 하면서 생긴 변화란다. 남편의 변화를 보고 신기해하다 명상을 따라 하기 시작한 부인이 고민에 빠졌다. 남편처럼 ‘긴 침묵 가운데 오래 앉아있는 짓을 좀 쑤셔서 못해먹겠다’는 이야기다. 그녀에게 음악명상을 권했다. 명상은 좌선 상태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다. 걷기명상, 차명상, 춤명상도 있다. 음악명상은 10여 년 전의 놀라운 체험 후 지금까지 수행하고 있는 내 식 명상법이다. 장소는 서울 구로에 소재한 불교대학이었는데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2박 3일 음악 명상캠프를 열었었다. 수업은 이론과 체험으로 진행되었는데 첫날부터 ‘한 소식 얻는’ 경험을 했다. 그저 편안히 앉아서 눈을 감고 강사가 틀어주는 음악을 듣는 게 다인 음악명상. 잡념이 올라오면 흘러가게 놔두라는 말까지 들으니 하나도 어려울 게 없었다. 처음 듣는 음악들은 어찌나 하나같이 편안하면서도 매혹적인지! 어느 순간, 반복되던 리듬이 다르게 들렸다. 몸과 마음이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듯하더니. ‘단 한 번도 경험 못한 황홀지경’에 휩싸였다.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참석 사흘 동안 그 놀라운 경험을 수차례 했다. 이후 명상을 꾸준히 하게 되었는가라고 묻는다면 앞에 이야기한 회춘남성처럼 ‘매일 새벽 한 시간 이상’은 아니지만 심신이 지칠 때마다 수시로 해왔다. 공간은 대개 파주 헤이리의 작업실인데 방해받지 않는 조용한 공간 어디든 상관없다. 음반 하나를 플레이어에 올린다. 명상캠프 이후 꾸준히 수집한 명상음반들이라 고르는 것부터 행복하다. 그리고 가장 편한 이완상태를 만들어주는 흔들의자에 앉아 눈을 감는다. 음반 한쪽이 다 도는데 드는 시간은 대략 40분 정도. 눈을 뜨면 세상도 나도 낯설다. 에너지를 뺏던 공기와 공간이 마치 행복을 위해 세팅된 무대처럼 보이고 자신이 해피엔딩극의 주인공 배우처럼 느껴진다. 명상에 들기 전 품고 있던 고민과 난제들은 ‘성숙과 성장을 위한 과정’처럼 여겨진다. 명상에 관심 있는, 어렵고 지루할까 봐 미루는 모든 이들에게 권한다. 그렇다면 어떤 음악을 들을 것인가. 내가 제일 처음 접한 명상 음반이며 지금도 최고로 치는 ‘The indian Road’ 시리즈로 시작하시기를. 국내에 3집까지 나와 있다. 국내 처음 들여온 북미 인디언 음반이기도 하다. 지하 180 피트 동굴 속, 인디언 플루트 연주를 담은 첫 곡 ‘기도(The Offering)’부터 전율이 일 것이다. 뒤에 이어지는 ‘대답 없는 사랑, 노란 숫양의 노래, 독수리가 날 위해 기도하네.....’ 등 시 같은 제목들이 감흥을 더한다. ‘The Indian Road’를 통해 북미 인디언 음악에 관심이 생겼다면 1집 6번째 곡으로 나온 ‘탈주의 노래(Flight Soing)’에서 플루트를 연주한 카를로스 나카이(R. Carlos Nakai)를 만나야 한다. 북미 인디언 플루트 주자 중, 단연 독보적인 카를로스 나카이는 미국 역사 이전, 그 땅의 주인 중 한 부족이었던 나바호족의 후예다. 구름과 물, 나무처럼 인간도 자연의 한 존재로 생각하고 살았던 멀고 먼 시절의 아름다운 원시성, 야성의 숨결이 그의 연주에서 뿜어 나온다. 나바호족과 카를로스 나카이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다. 다음 호에 이어진다.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옛날 아프리카의 한 왕국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를 받던 산파는 아이를 떨어뜨릴 뻔합니다. 흑인의 나라에서 태어난 하얀 피부의 아이. 백인보다 더 희디흰 피부였습니다. 부모는 아이를 숨겨서 키우기로 합니다. 왕국에서 ‘하얀 피부 인간’은 저주였습니다.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얀 피부 인간의 신체, 혹 신체 일부를 지니면 돈과 행운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문 사냥꾼들이 돌아다니며 하얀 피부 인간을 납치해 주술사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주술사는 주술의식 후 시체를 잘라 팔았습니다.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숨겨 키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저주는 계속됩니다. 아이는 피부뿐 아니라 털까지 하얀색이었는데 눈동자마저 하얗게 변하더니 시력이 나빠졌습니다. 글을 읽기 힘들게 되자 여러 악기들을 갖고 놀게 된 아이. 어느 날 아이는 부모에게 가수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눈물 마를 날 없었던 부모는 아이의 손에서 모든 악기를 빼앗습니다. 왕국에서 가수는 천민이나 하는 짓이었습니다. 설사 가수가 되더라도 왕국 밖으로 나간 알비노를 기다리는 것은 납치에 의한 불구, 혹은 죽음뿐일 테니까. 숨어 자라던 아이, 친구도 없던 아이는 악기를 빼앗기자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어느 날 아이가 사라집니다. 아이의 방에는 가수가 되기 위해 길을 떠난다는 편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잔혹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실 당신. 꾸밈은 있지만 실제 이야기다. 이야기 속 나라는 아프리카 서부 내륙, 말리(Republic Of Mali)고 하얀 피부 인간은 실제 13세기에 말리 제국을 세운 순자타 케이타의 직계 후손, 살리프 케이타(Salif Keita). 그의 별난 하얀 피부는 알비노(albino)라 칭하는 선천성 색소 결핍증으로 유전질환이다. 실제로 가수가 되고 싶어 집을 나가 프랑스로 간 살리프 케이타는 하얀 피부의 저주를 딛고 꿈을 이룬다. 작사, 작곡까지 하는 싱어 송 라이터 살리프 케이타의 재능은 2002년 앨범 Moffou에서 빛을 발한다. 전곡을 그가 만들었다. 이 앨범은 무명의 그를 ‘말리의 황금 목소리 ’라 불리게 했고 세계적인 스타의 반열에 올린다. ‘Yamore’라는 곡을 들어보라. 대체 불가능한 목소리, 이 세상에 더는 없을 목소리를 들어보라. 알비노로서 탄생이 저주였고, 시력감퇴로 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도망치듯 유럽으로 갔으나 무일푼 떠돌이로 쉰 넘어까지 살던 그가 어떻게 거장이 될 수 있었는지 담박 느끼게 될 것이다. 지하 수 천 미터에서 끌어올린 듯한 깊은 목소리의 정서에 나는 슬픔, 고독, 고통 같은 상투어를 붙여 훼손하고 싶지 않다. 천형 알비노 얼굴을 오히려 빛나게,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그 목소리에 경배. 그런 그가 3년 전, 돌연 가수 은퇴를 선언했다. 자신 같은 알비노들을 돕기 위해 2006년 살리프 케이타 국제 제단(Salif Keita Giobal Foundation)을 만들어 지원해 온 그는 2018년 5월, 발생한 ‘라마타 디아라 사건’ 이후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말했다. 엄마 품에 잠자던 다섯 살 알비노 아이는 갑작스레 나타난 알비노 사냥꾼에 의해 끌려가 선거철 제물로 목 잘린 채 발견되었다. 살리프 케이타는 남은 인생을 알비노의 비극을 막는데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새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5년 전인가, SNS를 통해 퍼진 기괴한 사진이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한 여대 의과대학 졸업식 사진으로 스무 명 남짓의 여성들이 눈만 내놓은 검은 부르카 위에 검은 졸업가운을 단체로 뒤집어쓰고 서있었다. 스무 명의 복제인간 같다고나 할까. 사진을 함께 보던 친구가 ‘설마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조작 사진일 것이다’라고 했고 나 역시 동감했다. 이슬람은 지구 상 18억 명이 믿는 보편 종교이고 불교, 기독교처럼 사랑과 자비를 내세운다. 신 앞에 누구나 평등하기에 여성 억압, 폭력은 교리에 반하는 것이며 몰상식한 행태들은 이슬람 문화가 아닌 지역별 오랜 관행이거나 어느 종교에나 있는 시대착오적 근본주의, 광신이 문제다......라는 게 내가 알고 있는 ‘오해를 걷어낸 이슬람 문화’였다. 미군 철수로 탈레반이 장악한 후 생지옥 된 아프가니스탄 실상에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전쟁도 아닌데 백주대낮, 탈레반의 총탄 앞에 스러져가는 민간인들의 모습은 비현실적이다. 내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은 부르카 쓰지 않고 집 밖을 나왔다 바로 사살당한 여성의 사진이다.(사우디 아라비아 사진이 실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들의 거리가 된 나라. 여자들은 모두 죽지 않기 위해 집이라는 부르카를 쓰고 스스로를 유폐하고 있다. 핸드폰을 통해 속속 접하는 뉴스와 아비규환을 전하는 동영상 탓에 더 이상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여성 박해가 먼 나라 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인 중 한 사람이 ‘ 이슬람 국가에도 월드뮤직 스타가 있는가’ 하고 물어왔다. 집 밖으로도 자유롭게 못 다니는데 (실제 남성 없이 외출 못하는 이슬람 국가가 많다) 대중 앞에 얼굴 드러내고 춤추고 노래하는 게 가능할까, 제 나라를 넘어 ‘세계적으로 얼굴이 팔리는’ 스타가 되는 것 또한 가능할까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소개하는 이가 북아프리카 알제리 출신의 수아드 마씨(Souad Massi)다. 이슬람 국가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여성에게 음악재능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타고난 음악의 피는 어린 시절, 오빠의 기타를 탐하게 했고 열일곱 살 그녀를 음악밴드로 이끈다. 플라멩코 음악밴드에서 록밴드로 넘어간 그녀는 히잡을 벗고 머리카락을 자른 후 티셔츠, 청바지 차림으로 전국 공연을 다니고 음반까지 낸다. 당연지사, 과격 남성 단체로부터 수없이 살해 협박을 받으며 쫓겨 다닌다. 결국 그녀 나이 스물여섯인 1999년, 도망치듯 고국을 떠나 프랑스로 이주한다. 살기 위해, 노래 부르기 위해 고국과 가족을 떠나야 했던 기막힌 한과 슬픔 서린 목소리, 알제리 전통음악인 라이와의 록음악, 플라멩코, 포르투갈의 파두 등이 혼합된 정서, 알제리 원주민인 베르베르족의 언어와 영어 불어등이 섞인 노래는 수아드 마씨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녀가 낸 음반들은 프랑스는 물론 유럽을 넘어 세계 월드뮤직 팬들을 사로잡았다. 고국을 떠날 때 청순했던 이십 대의 그녀는 이제 쉰 살 중년이 되어 여전히 프랑스에 거주 중이다. 동영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노래 부르는 나이 든 그녀는 세련된 유럽 여성의 모습이고 과거를 잊은 듯 담담해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비극적 현실 때문일까. 그 담담함이 가슴 아프다. 수아드 마씨의 노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Ghir Enta(당신만을 사랑해요)’다. 사랑은 정말 종교를 넘어 이념을 넘어 세계 공통어인데...... (인터넷 창에서 www.월드뮤직. com을 치면 기사 속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