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행복학습마을 사업’이란 것이 있다. 도가 소외지역 주민들에게 학습기회를 주기 위해 지원하고 있는 사업이다. 사회·교육적으로 소외된 주민들에게 평생교육을 실시해 행복과 희망을 주기 위해 경기도와 해당 시·군의 협력으로 조성되고 있다. 제 1호 행복학습마을은 지난 2010년에 조성된 포천 장자 마을인데 이곳은 한센인 정착마을이다. 이 마을 행복학습관은 행복위원회 구성, 마을리더 양성프로그램, 어머니합창단, 평생교육 프로그램, 지역자원과 연계한 프로그램 등의 교육 과정을 운영, 2011년 평생학습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경기 행복학습마을은 현재까지 14곳이 조성돼 있다. 한센인 마을을 비롯, 사할린 영구귀국동포 마을인 화성시 향남복사꽃마을, 고양시 원당 재래시장 등에 조성돼 있다. 또 동두천시 보산동 걸산마을에도 조성돼 있다. 미 2사단 영내를 거쳐야만 마을 출입을 할 수 있는 ‘육지 속의 섬’이다. 이 마을은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주민들이 부대 뒤에 터를 잡으면서 형성된 마을로 현재 60여 가구, 130여 명이 살고 있다. 생활불편 때문에 대부분 젊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났고 고향을 떠날 수 없는 주민과 노인들만 남아있다. 이런 실정에서 주민들에게
최근 안산시의 한 조경농장에서 남편에게 살해당한 뒤 암매장된 주부가 상습적으로 가정폭력에 시달려 왔던 것으로 드러나 사회적 파장을 불러왔다. 지난 해 전국 만 19세 이상 남녀 5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성가족부의 2013년 전국 가정폭력실태 조사결과를 살펴보면 응답자 중 18세 미만 자녀를 둔 부모의 자녀에 대한 폭력은 46.1%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신체적 폭력보다 정서적 폭력이 두 배 이상 높게 나와 자식을 종속적인 관계로 인식하는 경향이 큰 것임을 미뤄 짐작케 했다. 또 19세 이상 65세 미만 기혼남녀를 대상으로 한 부부폭력 발생률은 45.5%로 결혼 후 5년 미만이 62.1%로 높게 나타났다. 가정폭력이 빈번한 이유는 가정폭력은 ‘집안 일’이라는 생각해 ‘피해를 입어도 가족이니까’ 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고 이웃에서 아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은 특성상 가정 내에서 은밀하게 일어나 은폐되는 폭력으로 당사자 혹은 주변인들의 신고가 없으면 겉으로 쉽게 들어나지 않는 위험한 범죄의 특성을 갖고 있다. 가정폭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세대 간 대물림되는 현상이 발
요즘 포천이 시끄럽다. 서장원 시장의 성추행 의혹 사건 때문이다. ‘포천시장 성추문’ 논란은 지난 9월 포천시장 집무실에서 여성 B씨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며 시작됐다. 이어 11월 7일, 서 시장이 ‘거짓 성추문’을 퍼뜨렸다며 B씨를 경찰에 고소했고 B씨는 12일 구속됐다. 서 시장은 고소장에서 ‘시장이 청사 집무실로 P씨를 불러들여 성폭행했다는 허위사실 유포로 인해 900여 공직자와 시민들에게 사실이 호도되면서 치명적인 명예훼손을 당하고 있다’며 ‘진실 규명을 위해 사법기관의 도움을 요청하게 됐다’고 고소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하루만에 서시장이 고소를 취하해 석방됐다. B씨가 반성하고 있고 시장으로서 시민을 고소하는 게 적절치 않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B씨가 ‘서 시장 측이 성추행 사실을 무마해주면 거액을 준다고 해 거짓 진술을 했다’며 서시장을 고소했다. 이에 경찰은 시장 집무실 등을 압수수색하고 수사를 통해 서 시장 측이 무마 대가로 현금 9천만원과 9천만원이 적힌 차용증을 B씨에게 전달한 것을 확인했다. 서시장의 비서실장 김 모 씨와 브로커 건설업자 이 모 씨는 구속됐다. 이들은 직접 돈을 건네며 사건을 무마하려한 혐의다. 그리고…
대한적십자사 경기지사와 본보가 새해 아주 의미있는 기획을 준비했다. 양 기관이 공동으로 제1회 경기 헌혈&안전문화 캠페인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2015년 1월 13일 경기도의회 청사 앞 주차장과 1층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이번 캠페인에서는 오전 10시 ‘헌혈&안전문화 캠페인 기념 세레모니’를 시작으로 채혈직원 격려와 헌혈버스 출발, 혈액사업 유공자 표창 등이 이뤄진다. 1천200만 경기도민이 자발적으로 헌혈에 참여하고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목적도 있다. 헌혈 인구는 6~7년째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다행스럽게 지난해 국내 헌혈률은 5.6%를 기록해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혈액을 자급자족하기 위해서는 헌혈률이 최소 6~7%는 돼야 한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매년 30만ℓ 이상의 혈액을 수입하고 있다고 한다. 500억 원이 넘는 금액이다. 국내 헌혈만으로는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헌혈을 하려고 해도 체중미달 성인병 등의 각종 이유로 헌혈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늘고 있어 혈액부족 현상을 가중시키고 있다. 특히 1천200만 명이 넘어 전국 최다 인구를 자랑하는 경기도는 헌혈의…
‘깍지(角指)’라는 것이 있다. 문자 그대로 손가락에 낀 뿔이라는 도구로 우리나라의 전통 활을 쏠 때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다. 그래서 전통시대에는 깍지 낀 손이 무인을 상징하는 도구이자, 그들의 자존심이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국왕들 중 활에 가장 많은 애착을 보인 국왕이 바로 정조다. 그는 틈만 나면 어사대(御射臺)에 올라 커더란 곰의 얼굴인 웅후(熊侯)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생부(生父)인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던 모습을 열살 어린 아이의 눈으로 그저 지켜봐야만 했던 정조.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라는 신하들의 극악한 논리를 넘어 서기 위하여 할아버지인 영조는 호적 정리를 통하여 정조를 이미 수년전에 돌아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비록 성인이 되어 국왕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제대로 된 권력 기반을 갖추지 못해 힘겨워 했던 세월을 화살에 담아 날려 보냈다. 정조는 그 모든 것들을 활을 통해 풀어내었다. 화살을 끼우고 시위를 팽팽하게 당겨 가득 당긴 활을 ‘만작(滿酌)’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잔에 가득 술을 채우고 그것이 흔들리지 않도록…
올 해는 우리에게 닥친 너무나 크나큰 아픔으로 온 나라가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어이없게도 그 고통의 틈에서 우리를 희롱하는 온갖 루머와 당국의 무능한 대처와 비리와 부정의 단단한 결속을 보면서 절망과 분노에 떨었다. 그 비통의 시간을 자신들의 계산 된 목적으로 이용하는 비열함도 있었고 그 틈을 비집고 잇속을 챙기려는 파렴치한도 있는가 하면 진정으로 부둥켜안고 울고 그들의 손을 잡고 일으켜 주고자 하는 갸륵한 모습도 만날 수 있었다. 지난 동짓날에 내가 속한 단체에서 다문화 가정을 위한 문화체험 행사를 후원하게 되었다. 낯선 타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일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짐작은 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깊이를 재기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주민자치위원들과 함께 찾아 온 다문화 가정의 주부들은 곧 낯선 분위기에 빠른 속도로 적응해서 다행이었다. 그들이 우리의 새로운 이웃으로 적응해 가는 모습처럼 보기 좋아 오히려 우리를 안도시켰다. 사전에 귀띔도 없이 나에게 동지에 관해 설명을 해야 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갑작스런 일에 당황했지만 평소 알고 있는 일반적인 내용으로 설명을 하는 도
꽃 /김주대 눈으로만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시집 ‘사랑을 기억하는 방식’(현대시학, 2014)에서 ‘꽃’ 하면 김춘수의 ‘꽃’을 언뜻 떠올리지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서정주가 노래했던 꽃 ‘화사(花蛇)’는 어떤가요? 꿈틀대는 꽃을 만든 시인에게 경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석유(石油) 먹은듯 …석유(石油) 먹은듯…가쁜 숨결이야” 외치는 단말마의 숨소리가 몸을 들뜨게 합니다. 호명할 수 없는 슬픔이 이 짧은 말 속에서 웅웅대고 있습니다. 몸으로 다가가 부딪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서려 있네요.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이 고즈넉한 사랑! /이민호 시인…
새해가 밝았다. 안산에 있는 성호 기념관에 다녀왔다. 성호 이익 집안을 소재로 한 ‘가학의 전통이 빛나다’라는 특별전을 보기 위해서이다. 기념관으로 가는 길가에는 노란 리본이 달려있었다. 세월호의 상처가 안산이기에 아직도 짙게 남아 있었다. 성호 이익은 당대에 하나의 학파를 이루고 당대에 큰 영향을 끼친 경세가이자 철학자였지만, 그는 가슴 속 깊은 곳에 큰 슬픔을 안고 평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아버지 이하진이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갔다가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친형 이잠도 조선후기 복잡한 정치판에서 장살을 당해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익은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 평생을 안산 첨성리에 칩거하며 농사를 짓고 살았다. 이익의 형 옥동 이서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칩거하면서 평생 거문고를 뜯고 살았다. 후에 박세채의 천거로 촬방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서의 글 어디에도 아버지와 형 이잠의 죽음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그 역시 집안의 아픈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듯하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새로운 학파를 만들었고, 서예가 이서는 새로운 예술 세계를 연다 이서와 이익 형제는 세상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