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이 되기 전에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해서 떠날 거라 했다. 서른세 살에는 미치지 않으면 자살하게 될 운명이라 했다. 인도 뉴델리 파하르간즈 골목에서 만난 예언자라는 이의 말이었다. 스무 해 전, 나는 한국을 떠났다. 중국에서 터키까지 두 해에 걸쳐 길 위에서의 삶을 살았다. 사랑하던 이를 잃고 힘겨운 마음으로 견디던 여정(旅程)이었다. 그 한 복판에서 듣게 된 끔찍한 예언이었다. 탁류(濁流)에 휩쓸려 깊고 어두운 강 아래로 내가 가라앉는 일시정지 화면이었다. 화가 치밀어 좌충우돌 목적지도 없이 버스를 탔다.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못했다. 사흘 밤낮 의자에 꼿꼿이 앉아 스스로를 괴롭혔다. 그러다 도착한 곳이 히말라야 산맥 해발 2천 미터 고도에 위치한 마날리였다. 해가 저물기도 전인데 버스는 끊겼다.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묵어야 했다. 더군다나 알고 보니 온천 마을.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않는 자학 프로그램”이 버스 끊긴 산속 온천 마을에서 자동 종료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나는 고행을 이어가기로 했다. 무작정 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며칠을 굶어 쓰러지기 직전이었지만 사과나무의 탐스러운 열매에 눈길조차 주지 않을 만큼 가혹
지금 내 손에 들려 잠 못 들게 하는 책은 ‘세 여자’다. 작가 조선희는 잊혀진 여성독립투사 허정숙, 고명자, 주세죽 세 여자의 일대기를 소설 형식으로 되살려 놓았다. 2017년 나온 책을 읽은 이들은 ‘3년 전 화제가 됐을 때 안 읽고 왜 이제야?’ 하고 물을 수 있겠다. 그에 대한 답이 오늘 글의 주제다. 작가에게 미안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녀의 전작들을 제목만 보고 내 스타일이 아니라 고 지레짐작, 독서목록에서 제외시켰었다. 또 그 기억으로 ‘세 여자’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내 독서모임 다음 책이 ‘세 여자’로 선정돼 내 의지 없이 잡게 된 것이다. 소설은 나를 단박 100년 전, 역사의 격변 속에 떨구었고 세 여자의 파란만장한 운명의 회오리에 휘몰리게 했고 이틀 밤을 꼬박 새우게 만들었다. 근거 부실한 순간 감정의 선입견을 반성한다. 그 같은 선입견으로 놓친 음악이 얼마나 많았을까. 뒤늦게 듣기 시작한 그리스 출신 미국 작곡가 야니(본명 야니스 흐리소말리스 Yannis Hrysomallis)와의 만남도 그랬다. 음악광 친구와 대화하다 ‘왜 야니 음악에 관심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들었다. ‘전자음악 쓰는 뉴에이지 음악가잖아. 몇 곡 들어봤는데 가
-비르투스와 포르투나 ‘비르투스(Virtus)’라는 라틴어는 ‘미덕(美德)’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virtue’의 뿌리가 되는 말이다. 전쟁을 통해 국가의 힘을 확장했던 고대 로마에서 비르투스는 우선 전사(戰士)의 주력부대일 수 밖에 없는 남성들의 “용기”를 뜻했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에 대한 용기였을까? <로마사 논고(論考)>를 쓴 마키아벨리는 역사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군주론>을 썼는데 그가 돌파하려 했던 것은 “운명”이었다. ‘포르투나(fortuna)’라고 불린 운명은 이미 신에 의해 정해진 경로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처지를 말하는 것이었고, 용기는 이와 대결해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역사를 스스로의 힘으로 새롭게 만들어 내는 ‘자질(qualita)’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따라서 바로 이 지도자의 자질에 대한 제왕학(帝王學)이었다. 1469년에 태어나 1527년에 세상을 떠난 그가 살았던 당대의 이탈리아는 외세에 휘둘려 분열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민중들의 삶은 따라서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고 재난이 겹치면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가혹한 폭정”에 시달렸다. 그러니 이탈리아의 독립과 그에…
제1 야당인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오늘 결정된다. 이로써 내년 3월 9일 치러지는 여야 대선후보들이 사실상 모두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주요 변수가 하나 남아있다. 바로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다. 안 대표는 대선을 불과 4개월여 앞둔 지난 1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대권 3수에 나서는 안 대표의 도전은 기존 대선구도, 특히 야권의 대선판을 흔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는 “국민의힘 후보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1대 1로 붙어서 이길 수 없다”면서 동시에 대선전 ‘야권 통합 불가’ 입장도 밝혔다. 하지만 안 대표의 이같은 발언은 오히려 야권내 후보단일화에 불을 지피며 화두로 급부상하고 있다. 국민의힘 유승민, 원희룡 경선 후보 등이 잇따라 단일화 추진 의지를 강하게 피력하고 나섰고, 김재원 최고위원은 안 대표 지지율이 3%만 나와도 위협적이라며 역시 단일화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준석 대표는 안 대표 측과 단일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거간꾼’ ‘해당(害黨) 행위’라며 “당이 정치공학에 매몰되는 모습을 보이면 필패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선출되는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어떤 방향을 잡을지는 예단할 수 없다. 하지만 후보 선출을 앞두고 야권…
역사를 소수 엘리트층에 의한 지배로 본 이탈리아의 정치경제학자 파레토(Vilfredo Pareto)는 대중의 지배는 일종의 환상이라고 했다. 대중들은 그저 자신들을 이끌어줄 새로운 엘리트를 기대할 뿐이기에 그 엘리트가 순환하면서 역사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엘리트의 순환론』(정헌주 역, 간디서원, 2018)에서 사자형(Lion)과 여우형(Fox) 엘리트가 교차한다고 했다. 사자형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강하고 충성심과 힘을 강조하며 용감하고 무모하며 때로는 무식하기까지 하다. 여우형은 현란한 말솜씨와 조작에 능하며 교활하고 주도면밀하며 때로는 유약하고 무능하기까지 한 지도자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의 역대 대통령에 대입해보자. 먼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교활한 여우 성향이 있었지만, 권위주의가 넘쳤던 전형적인 사자형의 지도자였다. 4·19로 2공화국을 출범한 민주당 정권은 의원내각제로 무책임한 장면 총리가 지도자였다. 3번째 지도자는 18년의 철권통치를 했던 라이온형의 박정희였다. 그의 사후 80년의 봄 시절 최규하는 왜 대통령이 되었는지 무능 그 자체의 폭스형이었다. 5번째 광주에서 피의 학살을 자행하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누가 뭐래도 사
서민(단국대 의대) 교수가 대형사고를 쳤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를 돕겠다는 의도로 한 발언이 평지풍파다. 지난달 31일 자신의 유브 채널 ‘기생충티브’에서 ‘서민 교수 윤석열 후보의 몸보신을 위해 홍어와 맥주를 대접하다’라는 라이브 방송을 했다. 영상을 소개하는 머리화면(섬네일·thumbnail)에 ‘윤석열을 위해 홍어준표를 씹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윤석열 후보와 서 교수가 맥주잔을 부딪치며 화사한 미소를 짓는 모습도 연출했다. 윤 후보는 ‘민(서민)이 덕분에 산다’고 하고, 서 교수는 ‘대동단결 윤석열’이라고 화답한다. 홍어는 극우 진영에서 호남을 비하하는 차별적 언어다. 치열한 당내 각축을 벌이고 있는 홍준표와 유승민 후보 측은 즉각 반발했다. 윤 후보에겐 전두환 옹호발언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쓰나미까지 덮친 꼴이 됐다. 윤 후보에겐 치명상을,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겐 울분을 토하게 했다. 말그대로 과유불급이다. 서 교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유튜브를 접는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수습에 나섰다. 전공인 기생충학 연구보다 탁월한 정치 감각이다. 1967년 광주 출생인 그가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서민의 일탈에 언론의 책임은 없을까
얼굴은 밖으로 드러나는 마음의 표정이다. 삶의 뿌리에서 오는 형상이며 영혼의 풍경이다. 그래서일까 첫인상은 첫사랑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흉한 인상은 범인으로 의심받기도 한다. 한세상 나그네 길에 여권 같은 얼굴과 이름이라는 고유명사와 함께 운명적인 성격과 인격을 안고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 대변인 같은 게 얼굴이다. 재 너머 사래 긴 밭이랑 같은 얼굴의 주름살 속에는 오늘의 그 사람만 내재되어 있는 것 아니다. 태어나 살아온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황에 따른 마음가짐에 있어서의 표정의 변화가 세월이라는 이름과 함께 용해되고 축적되어 있다. 또한 그 위에 오늘의 일들이 얹히고 있다. 생물학적인 면에서 볼 때 얼굴은 운명적으로 타고난 바탕이 있다고 한다. 이어서 환경과 교육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후천적인 면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타고난 면은 어찌할 수 없다 할지라도 후천적으로 교육받고 공부하면서 가꾸고 닦아 참한 모습으로 가꾸어 가는데 힘쓰는 것 아니겠는가. 선한 얼굴과 고운 얼굴에는 차이가 있다. 선한 얼굴 편안한 얼굴은 수도승이나 구도자의 얼굴이 될 것이다. 고운 얼굴은 타고난 심성이 고운데다, 생활인으로서 사계절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묻어나는 탁함을 끊임
나의 삶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겸허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도 어떠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사명을 두고 있는 사람은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자신이 아직 모든 사람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너희들 가운데 누가 농사나 양치는 일을 하는 종을 데리고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어서 와서 밥부터 먹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오히려 ‘내 저녁부터 준비하여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예수) 참으로 선량한 사람들의 겸양은 무의식 중에 나타난다. 그들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열중한 나머지 이미 한 일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다. (중국 속담) 까치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오래 서 있을 수 없다. 스스로 과시하는 사람은 스스로 빛날 수 없다.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은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 자신의 공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좋은 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