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빠름’에 대한 생각과 행동이 무심코 생활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지는 않은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방향성 없이 빠르기만 해서는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 엄청날 수도 있고 또 진정으로 중요한 부분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칠 수도 있다. 얼마 전 급한 용무로 택시를 탔다. 수원 시내 특성상 도로 위 차량이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여유 있게 움직이는 정도였다. 이때 내가 탄 택시 옆으로 다른 택시가 빠르게 지나갔고 차선을 급하게 바꾸며 위험천만하게 운전을 했다. 사실 수원 시내 도로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기에 무심코 지나가려 했는데 택시 기사는 ‘택시를 운전하다 보면 빨리 도착해야 한다고 재촉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택시기사는 ‘빨리 달려 승객이 원하는 시간 안에 목적지까지 도착하는 것이 택시 운전사의 능력’이라 생각하는 이도 더러 있다며 ‘안전운전 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인 것 같다’며 껄껄 웃었다. 내가 운전자일 때는 급하게 가는 택시를 나무라다가도 내가 승객일 때는 안전을 먼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신속함을 최고의 선(善)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경기도 내 택시운수종사
코로나 사태는 우리네 일상 풍경을 여러 면에서 성형했다. 그중 하나가 여행. 해마다 연말연시나 설 또는 추석 연휴, 그리고 여름휴가철이 되면, 얼마나 많은 인파가 공항으로 몰렸던가? 하늘이 막히니 공항도 비었다. 대신에 ‘차박’(차 안에서 잠을 자는 캠핑)이나 ‘랜선 여행’(일명 ‘방구석 여행’) 같은 새로운 트렌드가 등장했다. 아무리 그래도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맛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 항공여행의 추억에 몸살을 앓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편의점에서 손쉽게 살 수 있는 기내식 도시락이 나왔다. 제주행, 뉴욕행, 프라하행 도시락을 사 먹으며 항공여행 ‘갬성’을 누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여행에 ‘진심’인 사람들은 ‘무착륙 비행’을 즐기기도 한다. 목적지 없는 항공 비행 상품을 이용한 고객의 수가 지난 6개월 동안 1만 6000명에 달할 정도다. 이 대목에서 거시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분석이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부자들은 결혼생활이 곤경에 빠지면 파리로 호화 여행을 떠나는 게 정석처럼 되어 있지만, 고대 이집트의 부자 남편들은 그러지 않았다는 거다. 그들은 아내를 데리고 바빌론에 쇼핑하러 간다거나 페니키아에서 스키 휴가를 보낼 생각은 전혀 하
1. 조국은 유죄인가 오랫동안 내심 동지라고 믿었던 친구와 대화가 틀어진 것은 조국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정치검찰과 수구 언론에 의해 난도질당한 게 맞다. 우리 죄를 대신했으니 희생양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죄라고 말했다. 친구는 조국이 어떤 실정법을 어겼느냐며 분노했다.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진 까닭은 이삼십 대가 현 정권과 기성세대에게 분노했기 때문인데, 사회가 공정하지 않다고 판단한 결과다. 실제로 가난하고 힘이 없는 흙수저들은 집을 살 가능성도 없고,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없지 않으냐. 저 수많은 비정규직과 자영업자들을 보라. 그들이 과연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고 느끼겠는가. 우리가 그런 세상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재벌과 정치검찰, 수구 언론을 포함한 기득권층들이 반성하지 않으면, 우리라도 반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집권 여당 아닌가.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차원에서 조국이 유죄란 말이지, 그가 실정법을 어기고 비도덕적인 인물이란 말이 아니라고 답했지만, 친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삼십 대, 더 나아가 대중들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며, 그들이 잘못된 판단을 할 때 우리는 그들을 정론으로 이끌어야
수용소 건물들은 모두 단층이지만, 마치 우리들 가운데 바벨탑이 세워진 것처럼 바이에른과 그로닝겐, 작센과 림뷔르흐, 헤이그와 동 프리슬란트의 다양한 엑센트를 들을 수 있어. 또 폴란드 악센트의 네덜란드어, 네덜란드 악센트의 독일어도 들려, 워터루플라인과 베를린 방언도 들리고. 단지 0.5㎢ 밖에 안 되는 곳에서 이 모든 소리가 들린다. 이 강제수용소에 부족한 것 중 최악은 확실히 공간이 부족한 거야. 급히 만든 거대한 막사들 안을 보면 분명해, 외풍이 심한 널로 만든 격납고 같은 건물 안에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수백 명이 널어놓은 빨래로 이루어진 낮아진 하늘 아래 철제 침대가 3단으로 쌓여 있어. 사람들은 철제 침대 위에서 살고, 죽고, 먹고, 병들고, 밤새 잠들지 못한 채 누워 있기도 해. 우는 애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혹은 어째서 이미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보내진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서 전혀 소식을 들을 수 없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야. 대도시의 문화계, 정치계의 유력 인사들도 이 넓은 불모의 황야 위에 좌초했다... 한 번 강력한 격변이 일자 그들이 살던 무대 배경은 모두 허물어졌고, 이제 그들은 베스터보르크라는 바람 쌩쌩
지난달 9일 오후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4구역 재개발사업 부지에서 철거 중인 5층 건물이 넘어지면서 정류장을 덮쳤다. 이때 멈춰 선 버스가 건물 잔해에 매몰돼 승객 17명 가운데 9명이 숨지고 8명은 중상을 입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이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생존자와 유가족의 정신적 고통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악몽과 불면증, 우울증, 공포, 압박감, 식욕 부진 등의 증상을 앓고 있다. 참사 현장에서 구조작업을 펼친 소방관과 사고 현장을 지켜본 시민들도 후유증으로 심리 상담을 받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경찰은 건물 붕괴 사고의 원인으로 건물 지지용 쇠줄 미설치, 해체계획서를 무시한 작업절차, 과도한 물 뿌리기 등을 꼽고 있다. 아울러 철거공사 이면계약, 조직폭력배 연루설, 정관계 로비설 등도 수사하고 있다. 그러나 사고 원인의 중심에 서 있는 문 모 씨가 미국으로 도피해버려 수사는 장기화될 전방이다. 문 씨는 조직폭력배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건물 붕괴사고가 발생한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한 ‘안전불감증’이다. 사고가 발생하자 정부는 전국 해체공사 현장에 대한 안전점검을 벌였다. 이 결과
야당이 주장하기 시작한 ‘여성가족부, 통일부 폐지론’을 놓고 여론이 갈리고 있다. 정부 부처나 예하 기관의 기능을 추적 감시하여 상시적으로 성과를 측정하고 문제점 해소책을 논하는 것은 정치권의 책무다. 그러나 당파적인 관점에 매몰돼 걸핏하면 ‘폐지론’부터 들고 나오는 것은 어리석고 섣부른 행태다. 설치 목적을 재점검하여 부실한 부분,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역할을 개선할 방안부터 모색하는 게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국민의힘 대권 주자들의 의견을 받아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통일부·여성가족부 폐지론을 꺼냈다. 이 대표는 13일에도 “여가부와 통일부는 특임 부처이고, 생긴 지 20년 넘은 부처들이기 때문에 그 특별 임무에 대해 평가할 때가 됐다”고 전제하고 “수명이 다했거나 애초 아무 역할이 없는 부처들”이라고 규정해 폐지주장을 거듭 부르댔다. 이 문제를 ‘작은 정부론’과 결부시키며 내년 대통령 선거의 이슈로 만들 태세로 읽힌다. 여당 더불어민주당이 발끈하고 나섰다. 김영배 최고의원은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대표에 대해 “빈곤한 철학뿐 아니라 귀를 닫고 ‘아무 말’이나 하는 모습을 보면 ‘박근혜 키즈’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다”고 맹비판했다. 강병원 최고의원도 “이
사회개혁을 통한 원칙과 공정을 요구하는 촛불 시민에 의해 탄생한 것이 현 정부다. 또한 요즘 MZ세대도 원칙과 그에 따른 공정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여러 조사로부터도 잘 나타난다. 그런 MZ세대가 사회 적폐 청산의 시도로서 검찰 개혁을 하려던 정부와 인권 말살의 추태마저 보이며 저항한 검찰 권력 간의 갈등을 보면서 오히려 현 정부를 원칙과 공정을 지키지 않는 내로남불 정부라고 말한다. 이렇게 서로 원칙과 공정을 말하고 있음에도 전혀 같이 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젊은 MZ 세대와 촛불 정부 간의 공정과 원칙의 차이는, 촛불혁명으로 인해 야당으로 전락해 20대 총선에서마저 대패한 국민의힘당과 조중동이라고 하는 주류언론이 앞장서서 왜곡 조장하는 면이 있지만, 단지 그런 외부 선동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것은 서로 요구하는 공정과 원칙의 역사 인식 차이에 기인한다. 사회의 주어진 규칙이나 틀을 강요받으며 당장 사회 기존 체제에 안착해야 할 MZ 세대에게 사회 규칙이나 틀을 지켜달라는 요구는 자연스럽고 또한 절박하다. 한편, 해방 이후 미군 점령군의 치안 유지 목적에 의해 청산되지 못하고 면면히 내려온 일제 부역자 집단이 형성해온 사회 기득권…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였다. 운동장 기억의 대부분은 교장 선생님이 구령대 위에 서서 훈화 말씀하시던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 말의 구체적인 내용이 떠오르는 건 아니다. 훈화 말씀 시간은 곧 흙장난을 치는 시간이었다. 한참 서 있으면 곧 지루해져서 발끝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친구에게 흙을 튀겼다. 바닥에 앉을 수 있는 운수 좋은 날에는 손으로 흙을 모아 쌓거나 지나가던 벌레를 장난감 삼아 놀았던 것만 생생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거 같아 고개를 들어 구령대를 쳐다보면 아직도 누군가가 일장연설 중이었다. 구령대는 늘 선생님들 것이었다. 운동회 때 유일하게 그늘이 생기는 구령대 아래에는 대회 본부석이 차려졌다. 우리는 옆쪽에 위치한 스탠드에 자리를 잡았다. 운동회를 시작하는 타이밍엔 스탠드에도 그늘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해가 움직이면 여지없이 직사광선이 내리 꽂혔다. 그때는 학생들이 햇빛을 받는 게 너무 당연해서 한껏 찌푸린 채 손 그늘과 손부채를 만드는 게 전부였다. 요즘은 분위기가 반전됐다. 운동회 때 학생들을 위해 각 스탠드마다 천막을 쳐서 햇빛 가리개를 만들어 주는 건 기본이고, 교사들의 전유물이었던 구령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