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단국대 의대) 교수가 대형사고를 쳤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를 돕겠다는 의도로 한 발언이 평지풍파다. 지난달 31일 자신의 유브 채널 ‘기생충티브’에서 ‘서민 교수 윤석열 후보의 몸보신을 위해 홍어와 맥주를 대접하다’라는 라이브 방송을 했다. 영상을 소개하는 머리화면(섬네일·thumbnail)에 ‘윤석열을 위해 홍어준표를 씹다’라는 문구를 넣었다. 윤석열 후보와 서 교수가 맥주잔을 부딪치며 화사한 미소를 짓는 모습도 연출했다. 윤 후보는 ‘민(서민)이 덕분에 산다’고 하고, 서 교수는 ‘대동단결 윤석열’이라고 화답한다. 홍어는 극우 진영에서 호남을 비하하는 차별적 언어다. 치열한 당내 각축을 벌이고 있는 홍준표와 유승민 후보 측은 즉각 반발했다. 윤 후보에겐 전두환 옹호발언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쓰나미까지 덮친 꼴이 됐다. 윤 후보에겐 치명상을,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겐 울분을 토하게 했다. 말그대로 과유불급이다. 서 교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유튜브를 접는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수습에 나섰다. 전공인 기생충학 연구보다 탁월한 정치 감각이다. 1967년 광주 출생인 그가 이런 발언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서민의 일탈에 언론의 책임은 없을까
역사를 소수 엘리트층에 의한 지배로 본 이탈리아의 정치경제학자 파레토(Vilfredo Pareto)는 대중의 지배는 일종의 환상이라고 했다. 대중들은 그저 자신들을 이끌어줄 새로운 엘리트를 기대할 뿐이기에 그 엘리트가 순환하면서 역사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엘리트의 순환론』(정헌주 역, 간디서원, 2018)에서 사자형(Lion)과 여우형(Fox) 엘리트가 교차한다고 했다. 사자형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강하고 충성심과 힘을 강조하며 용감하고 무모하며 때로는 무식하기까지 하다. 여우형은 현란한 말솜씨와 조작에 능하며 교활하고 주도면밀하며 때로는 유약하고 무능하기까지 한 지도자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의 역대 대통령에 대입해보자. 먼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교활한 여우 성향이 있었지만, 권위주의가 넘쳤던 전형적인 사자형의 지도자였다. 4·19로 2공화국을 출범한 민주당 정권은 의원내각제로 무책임한 장면 총리가 지도자였다. 3번째 지도자는 18년의 철권통치를 했던 라이온형의 박정희였다. 그의 사후 80년의 봄 시절 최규하는 왜 대통령이 되었는지 무능 그 자체의 폭스형이었다. 5번째 광주에서 피의 학살을 자행하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누가 뭐래도 사
파주시 자유로 파주출판단지 휴게소 운영권 이관 문제를 놓고 경기도와 경기도의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관련기사 본보 3일자 1면) 이로 인해 도의회 건설교통위원회가 지난 임시회 기간 중 도 건설국의 각종 안건 심의를 중단했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열리는 행정사무감사에서도 마찰이 예상된다. 지난달 6일 열린 제355회 임시회 제1차 도의회 건설교통위원회 회의에서 도의원들은 자유로 파주출판단지 휴게소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경기도가 파주시 이관을 미루고 있는데다 운영권도 없는 상태에서 휴게소의 신사업자 선정을 위한 위수탁계약 심의까지 진행하고, 도의원을 심의위원에서 배제해 사실 확인을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 건설국이 기존 입장을 고수,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도의회는 임시회 기간에 처리할 예정이었던 도 건설국의 모든 안건을 잠정 보류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 2월 자유로 건설사업이 시작됐다. 자유로를 만든 이후 2003년 해당 도로에 편입된 파주시 문발동 495-122일대 2만5357㎡ 땅에 도가 47억 원을 들여 휴게소를 건립했다. 당시 도가 운영·관리를 직접 맡았다. 이후 2008년 11월 자유로는 국지도에서 국도 77호선으로
일정한 한계를 넘는 자기애(自己愛)는 마음의 병이다. 그것이 극한에 다다르면 이른바 과대망상이라고 하는 정신적 질환이 된다. 사람들은 자기 부정이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자기 부정만이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의 타락한 노예상태로부터 해방함으로써,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준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의 욕심과 번뇌야말로 가장 잔인한 폭군이다. 그것에 굴복하는 날, 우리는 그 비참한 노예가 되어 호흡마저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오직 자기 부정만이 우리를 그러한 노예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다. (페늘롱)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은 정의와 마찬가지로 매우 보기 드물다. 사사로운 욕심이야말로 자기기만, 자기변호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수는 극단적으로 적다. 진리가 자신들에게 불리한 경우, 사람들은 진리에 두려움을 느낀다. 처세 철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진리를 형편에 따라 인생에 적용해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사로운 욕심에서 오는 편견이 이 이기주의의 수법에서 나오는 모든 그릇된 생각을 합리화한다. 인류가 바라는 유일한 진보는 향락의 증대이다. 자기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맞은 1교시 수업은 체육 시간이었다. 종이 울리자 교실 문이 열리고 체육 선생님이 들어왔다. 우리 학교는 운동부 특히 럭비부가 꽤 유명했고, 그 체육 선생님이 럭비부 담당 코치였다. 우람한 체구에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선생님은 천천히 걸어 교단에 서더니, “1번부터 10번까지 일어나 봐.”라고 했다. 참고로 반에서 가장 키가 큰 친구가 1번이었다. 그리고는 “앞에서부터 100m 달리기 몇 초야?” 하고 물었다. 우리는 1번부터 차례로 자신의 100m 기록을 대답했고, 그 당시 4번이었던 나는 본능적으로 “18초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선생님은 열 명의 대답을 모두 들은 후 두 명을 지목했고, 방과 후 럭비부실로 오라고 했다. 선생님이 그렇게 물은 이유는 키와 덩치가 크고 달리기 속도가 괜찮은 아이들을 럭비부로 데려가기 위함이었다. 덩치와 달리기, 기준은 참 간단했다. 내가 그 순간 “13초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더라면, 내 고교 생활은 아마 크게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음악의 경우,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관련 서클은 전무했고, 고교 진학 후에도 교내에서 접해 볼 수 있는 기회라고는 합창단 정도밖에 없었다. 중학교 시절 이미 록키드
환경교육을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재활용이다. 우리가 평소에 분리수거하는 물건들이 어떻게 다시 사용되는지 알면 분리수거를 귀찮아하던 아이들이 흥미를 보이면서 참여한다. 환경 수업에서 페트병을 모아서 새롭게 만든 의자나 소파처럼 큰 가죽을 잘라 지갑이나 가방으로 재창조하는 건 너무 자주 해 온 이야기였다. 새로운 수업 아이템을 찾던 중에 ‘양말목’을 알게 되었다. 처음 ‘양말목’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나무의 한 종류인 줄 알았다. 이름 끝에 ‘목’이 들어가는 행운목처럼 양말처럼 생긴 작고 귀여운 식물을 떠올렸다. 다른 선생님들도 단어를 듣더니 공예품을 만들 수 있는 목재의 종류냐고 되물었을 정도로 생소했다. 글자 자체를 처음 들어보는데 이 아이템으로 어떤 수업을 할 수 있을지 아리송했다. 양말목은 양말을 만들고 남는 천을 말한다. 공장에서 양말을 제작할 때 뚫려있는 앞코를 꿰매고 윗부분을 잘라내면 머리끈 모양의 천이 남는데 이게 양말목이다. 양말 한 켤레에는 양말목 하나가 반드시 탄생하고 대부분 그대로 버려진다. 끈 하나가 얼마나 많은 양이 될까 싶지만 하루에 몇천, 몇만 켤레의 양말이 만들어지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숫자다. 버려지는 양말목 천 조각을 모
독일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아도르노는 말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떠올리면 아도르노의 절규는 상식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는 아우슈비츠 이후 줄기차게 서정시를 써왔다. 아도르노가 살아있다면 얼마나 통탄해했을까. 우리나라의 사정은 더할 것이다. 통계로 잡힌 건 없겠지만 생산되는 시 대부분이 서정시 부류에 속하는 것 같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등식이 성립한다. 서정시는 인간과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문학 장르라는. 이 등식이 맞으면 아도르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도 인간에 의한 인간의 학살을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그렇다. 서정시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서정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아우슈비츠 등 인류의 숱한 학살을 형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명란 시인의 '아우슈비츠 이후'가 좋은 예다.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이후에도 나는 밥을 먹었다/ 깡마른 육체의 무더기를 떠올리면서도/ 횟집을 서성이며 생선의 살을 파먹었고/ 서로를 갉아먹는 쇠와 쇠 사이의/ 녹 같은 연애를 했다/(부분) 그렇다면 서정시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비정규직 근로자의 수가 800만 명을 돌파해 사상 최고점을 찍었다. 1일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지난 8월 기준 국내 비정규직 근로자는 806만6000명을 기록했다. 이는 통계 작성 이후 최고치다. 지난해 8월(742만6000명)과 비교하면 1년 사이 무려 64만 명이 증가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전인 2016년 8월(644만4000명)과 비교하면 162만2000명이 늘었다. 예기치 못했던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치면서 더욱 악화한 결과라지만 상황이 너무나 심각하다. 문제는 형편이 이런데도 정치권은 내년 3월 20대 대선을 앞두고 네거티브 경쟁 블랙홀로만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야의 후보경선 과정에서 어떤 후보도 인상에 남을 만한 그럴듯한 일자리 해법을 말한 이가 없다. 그저 경쟁 후보 흠집 내기에만 여념이 없는 ‘비전 제로’의 흙밭 싸움만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눈 씻고 찾아도 믿고 찍을 만한 후보가 도무지 없다는 한숨 섞인 개탄이 온 천지에 넘쳐날까. 우리나라에서 고용형태를 기준으로 비정규직을 별도로 구분한 건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다양한 근로 형태가 나타나면서부터였다. 2002년 노사정위원회가 노사정 합의에 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