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추석, 버스가 시골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 문이 덜컹하고 열리자 알싸한 황토 냄새와 함께 흙먼지가 훅 차안으로 밀려들어왔다. 한껏 멋을 낸 옷에 번들거리는 구두를 신은 사람들이 밝은 표정으로 버스에서 쏟아져 내렸다. 손에는 선물보따리가 가득했다. 터미널에 마중 나온 어린 동생은 제일 먼저 누나가 사온 운동화를 받아 들고 벌써 포장을 뜯고 있었다. 나는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서 내렸다. 내 손에는 공장에서 준 식용유 선물세트가 하나 들려있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었다. 당산나무를 지나 방앗간 터를 지나갈 때 승용차가 빵빵 거리며 나를 비켜 지나갔다. 성공한 아랫집 자식들이 오는 모양이었다. 나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승용차를 타고 오지 못했다. 바리바리 선물꾸러미를 가져오지도 못했다. 겨우 결혼은 했으나 결혼식은 하지 못했고 아내가 아파서 아들은 집에 두고 혼자 찾아오는 길이었다. 어머니에게 용돈이라고 드릴 얇은 봉투가 겨우 하나였다. 이미 집에 와 있을 동생들을 볼 면목도 없었다. ‘큰 형이 집안을 위해서 한일이 뭐가 있는가?’ 전번에 집에 왔을 때 어린 동생이 나에게 한 원망이 여전히 귀에서 맴돌았다. 그냥 여기서 발길을 돌려 돌아가고…
1974년 2월 소인이 찍힌 5원짜리 관제엽서는 초등학교 은사인 황인각 선생님이 봉담초등학교 재직 중에 보내주신 고등학교 합격을 축하하는 편지다. 세필 붓으로 “축! 합격, 진심으로 합격을 축하합니다”라고 정성스럽게 적어 보내주셨다. 이 엽서를 앨범에 넣어두고 간직하다가 10년 전부터 자랑을 시작했고 지금도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인들에게 보이곤 한다. 요즘에는 손 편지를 거의 보내지 않으니 우표값을 알지 못하겠지만 1998년에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를 다시 찾아보니 우표 170원이 붙어있다. 2003년 6월에 아이들이 수련회가서 보낸 편지의 우표는 190원이고 2006년 편지에는 220원, 2018년 엽서는 330원이다. 요즘에는 편지보다 소포가 많은데 책 한권 보내는데 4000원을 지불한다. 안산 소재 직장을 다닐때는 가끔 아내와 아이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서 손편지 쓰기를 확대하자는 의견을 SNS에 올렸다. 기자가 보고 기사로 올렸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평소 하지 못한 진심을 담은 편지를, 자리를 옮긴 동료에게는 의례적인 문자메시지 대신 손편지를 통해 축하인사를 전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손편지 사랑은 언
20여년 전부터 한방전문의 과정이 실시됐다. 나는 인턴 1년 레지던트 3년의 전문의 과정을 거쳐 한방내과전문의 자격을 취득했고, 그로부터 15년이 넘어가는 많은 기간을 한의사 역할로 진료실에서 채워갔다. 그 과정에서 치료를 하는 일은 오히려 쉽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현실에서 넘어야 될 벽들을 마주할 때였다. 한약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게끔 돕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전문의 교육병원이 그러하듯 그때의 한방병원은 양방병원과 협진형태의 시스템으로 임상병리실과 영상검사실을 두었고 여러 검사들에 제약이 없었다. 재직했던 한방내과는 특히 환자군도 다양하고 중한 환자의 입원이 많아 MRI, CT 뿐아니라 혈액검사와 소변검사, 심전도, x-ray, 초음파 등 검사가 다양하게 필요했다. 병동주치의로서 양방병원에 진료의뢰를 해서 입·퇴원시 뿐만 아니라 입원기간 중에도 검사의뢰를 했고 대부분 당일내로 결과를 확인했다. 수련기간 동안 혈압, 당뇨, 심장질환, 중풍, 간질환, 파킨슨, 치매 등을 비롯한 다양한 질환 환자의 증상에 따른 검사영상, 수치를 확인하고 변화 양상을 관찰했다. 대부분의 입원환자들은 양약을 복용중이었다. 간염, 간경화, 간암환자들이 입원하는 경우도 있
언젠가 모 대학의 신입생을 상대로 한 강연을 부탁받아 다녀왔다. 의뢰를 받고 나서 갓 대학에 입학한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며칠 밤을 고민했던 것 같다. 내가 저 나이로 돌아간다면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또 지금에 와서 보면 여태까지의 나는 어떠했는지에 대하여 깊은 생각에 빠졌다. 강연 날 강당에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의 오프닝이 지나고 그 자리가 편해졌을 무렵, 그곳의 학생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그중 내가 가장 힘을 주어 당부했던 대목은 “지금 손에 잡고 있는 꿈의 가지를 하나라도 쉽게 놓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살면서 선택과 집중을 하지만, 그 상황과는 별개로 꿈이라는 것은 충분히 꾸고 담아두어도 좋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시절 같이 음악을 듣던 친구가 있다. 그 녀석과는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지만, 록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꽤 자주 어울렸다. 당시 주변의 록 음악을 듣는 친구 중 대부분은 헤비메탈이나 얼터너티브 록을 많이 들었지만, 이 친구는 특이하게도 올드 록이나 프로그레시브 음악을 주로 선호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생이 어디서 그런 정보들과 음반을…
북한의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과 김정은의 연설 모두가 예상을 뛰어넘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신형 다탄두 ICBM(대륙간 탄도탄)과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이 공개됐다. 남한에 가장 위협적인 무기들도 수두룩하게 나왔다. 그러나 김정은은 연설에서 인민들에게 ‘미안하다’며 펑펑 울었다.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이라며 남북대화도 강조했다. 우리는 국방력 강화와 남북대화 그 어느 것도 놓쳐서는 안 된다. ‘위협’과 ‘기회’에 모두 적극 대처해야 한다. 이번 열병식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북한 지도자로는 이례적으로 김정은이 공식석상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은 북한 주민들에게 “고맙다” “감사하다”고 12번이나 말하고 “면목이 없다”며 자세를 낮췄다. 김 위원장은 이어서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보낸다. 보건 위기가 극복되고 북과 남이 다시 두 손을 잡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은 김정은 위원장의 ‘사랑’ 한마디에 방점을 찍는다. 열병식이 있던 날 청와대는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NSC 긴급 상임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상임위원들은 북한의 신형 무기에 대한 우려의 메시지는 따로 내지 않았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10일 페이스북에 그룹 방탄소년단(BTS)과 그들의 팬클럽 ‘아미’를 언급하며 “그들의 뜻은 최근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인 공정이라는 가치에 더없이 부합한다”고 말했다. 최근 정치권이 한국 대중음악(케이팝)의 신화를 쓰고 있는 BTS의 병역특례 문제를 놓고 이런저런 견해를 쏟아내는 데 대한 비판적 소감이다. 유명세를 이용해 숟가락을 얹으려는 얄팍한 속셈으로 인기 발언을 서슴지 않는 정치인들은 자중해야 한다. 이재명 지사는 ‘BTS만큼 멋진 아미를 응원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병역의무는 대한민국 모든 남성에게 있다. 권력과 군 면제가 비례하는 사회를 보며 우리는 얼마나 큰 박탈감에 빠졌나. 아미는 군 복무를 회피하지 않고 원칙대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상기했다. 이 지사는 “이런 팬을 둔 BTS는 참으로 행복할 것 같다. 아버지뻘 아저씨가 한 수 배운다”고 덧붙였다. 민주당 노웅래 최고위원은 며칠 전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방의 의무는 사명이지만 모두가 반드시 총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BTS 병역특례 문제의 공론화에 불을 지폈다. 6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 BTS에게 특례 혜택을 줘야 한다는 주장은 빌보드 1위로 1조7000억 원
◇ 일본 사료에 안 나오니 가짜라는 주장 일제강점기 한국사를 연구했다는 일본인 학자들의 논문들을 보면 그들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된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내용을 그렇게 많은 학자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하긴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864~1946)처럼 칼 들고 명성왕후 시해에 가담했던 낭인깡패가 붓을 잡은 후 한국사 연구의 대가로 대접받았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일본인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창했는데, 그 중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1868~1942)라는 인물이 있다. 마에마 교사쿠는 조선총독부의 통역관이었는데, 1925년 ‘신라왕의 세차(世次)와 그 이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썼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삼국사기』 소지왕(炤知王) 이전의 기사를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은 확고부동의 단안(斷案)으로 믿는다”라고 말했다. 이마니시 류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21대 소지왕(재위 479~500) 이전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을 따른다는 것이다. 소지왕의 재위연대는 서기 479년부터 500년까지이니 이를 따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500년 이상 가짜가 된다. 그런데…
지역사회에 있어서 사회적경제의 정체성은 사회적가치에 있으며, 지역의 공공이익과 지역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사회적가치를 지역사회의 운영 원리로 삼는다. 사회적경제는 윤리적 소비시장 기반의 경제이며 공정시장을 지향하고 소비자 삶의 질 개선에 앞장선다. 적정기술과 윤리적 생산과 공정무역을 표방하는 사회적경제기업은 균형 잡힌 사회적 가치창출과 경제적 가치창출을 목표로 인권, 환경, 자원순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가능한 경제주체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들어 도시재생사업은 앵커시설 확보 등 하드웨어 중심의 ‘주거복지’ 사업에서 주민이 주도하는 ‘사람복지’ 지향의 사업으로 진화해 가고 있으며, 마을공동체 회복과 활성화를 통해 주민이 주도하는 지속가능한 사회적 도시재생(social urban regeneration)사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2020년은 도시재생사업 예산지원이 종료되는 지역이 생겨나는 첫해이자, 도시재생사업 지역 내에 많은 ‘마을관리 사회적협동조합(마을조합)’이 설립 중인,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있어 중요한 전환기이다. 2019년 4월부터 도시재생뉴딜사업 지역에 ‘마을조합’이 설립되기 시작하며 주민들이 방관형에서 참여형으로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도시재생대학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매주 한차례 이상 현 정부(대통령) 국정지지도를 비롯해 차기 대선 선호도 등에 대한 여론조사가 발표된다. 그때마다 이해당사자를 중심으로 희비가 엇갈리며, 그것을 둘러싼 의미를 읽느라 술렁인다. 그런데 지난 9월과 최근, 주요 국가 국민들을 상대로 미국과 중국에 대한 인기투표(?)를 실시한 결과가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의 퓨리서치 여론조사기관은 지난 6일 한국을 비롯해 미·일·호주·영국·독일 등 14개 주요 국가 국민들에게 중국에 대한 호감을 물은 결과물을 내놓았다.(6월10일~8월3일 성인 1만4276명) 핵심 내용은 부정적 인식(73%)이, 긍정적인 평가(24%)에 비해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해마다 실시하는 이 조사에서 중국에 ‘호감이 가지 않는다’는 응답이 역대 최고치를 나타냈다고 한다. 아마도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팬데믹과 국제관계 악화 등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또 퓨리서치는 지난달 15일에는 동일한 시기, 같은 국가(미국 제외한 13개국)를 상대로 한 미국에 대한 호감도를 발표한 바 있다. 여기서 미국에 대한 호감도는 34%였다. 한국인은 59%(2019년 77%)가 ‘호감’이라고 답해 13개 동맹국 중 1위를 기록
수원시립미술관은 개관 5주년 기념전 ‘내 나니 여자라,’를 9월 8일부터 11월 29일까지 개최한다.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비(妃)였던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5)의 자전적 회고록인 ‘한중록’을 매개로, 올해 미술관의 기관의제인 ‘여성’에 대한 동시대적이고 다양한 정서를 13명(팀)이 발표했다. 전시 제목 ‘내 나니 여자라,’는 ‘한중록’에서 발췌한 구절이다. 고정된 여성성에 대하여 회화, 설치, 미디어 등의 총 48점의 작품은 여성이라는 존재와 정체성 그리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제안한다. 현재 최전선에 있는 작가들인 만큼 여성에 대한 대서사시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전임 김찬동 미술관장이 이번 전시를 기획한 신은영 큐레이터에게 현재 한국 최고의 여성작가로 구성하자고 제안하면서 수원작가로 ‘흑-Back project 2020’ 285점으로 전시에 참가 했다. 1997년부터 2006년까지 근 10년간 한국 섬유예술의 현대미술화를 마음 깊이 담고서 국제적 진출을 목표로 흑색만 가지고 380점을 그렸다. 작년 초겨울 프랑스 개인전 때 몇 개의 작품 사진을 보내 달라고 했을 때에도 ‘흑-Back project’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