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전 日·유럽 등 1백 50만본 수출 기록
고향이 충남 예산인 소년은 사과농사를 짓는 아버지를 곧잘 따라다니며 과수원에서 뛰놀았다.
머리가 조금 커지면서 일손을 보탰고 빨갛게 잘 익은 과일이 참 아름답다고 느낀 것도 그 즈음이었다.
서울유학(遊學)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나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한 선택은 착각이란 것을 곧 느꼈다.
사회진로를 고민하던 청년의 머리를 스친 것은 어릴 적 하늘아래 드넓게 펼쳐진 수천그루의 사과나무였다.
기울어진 가세로 과수원을 없어졌고 차선책으로 서울 종로5가에 10평도 채 되지못한 가게에 묘목판매상을 차렸다.
현재 국내 최대규모의 원예업계로 부상한 영농조합법인 미림원예종묘의 태동은 그렇듯 초라했다.
숙명처럼 받아들인 나무사업이 올해로 37년째로 접어든 미림원예종묘 인태평(印泰平·61)대표이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아마도 묘목상을 차린 것은 전국 최초였을 거예요. 그저 나무가 좋아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남보다 한발 앞서간다는 자부심과 사업성이 과연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교차했지요.”
그의 우려와는 달리 운수가 맞아 떨어졌는지 다음해 용인자연농원에 조경수목과 수목종자의 대량납품으로 기반을 잡았다.
이후 1973년 주목묘목 국내 최초 양산체제 구축을 시작으로 32년간 국내 최초란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
메타세쿼이아 삽목묘 국내최초 양산체제 돌입, 일본 개량원과 기술제휴 및 묘목 종자 거래, 대만 50만본 수출, 플라워 가든센터 오픈 등등.
그의 이 같은 노력은 70년대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원예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13년 전 대만, 일본, 미국, 유럽에 1백50만본을 수출한 실적은 지금도 깨지지 않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과천에 자리 잡은 것은 지난 1994년으로 주암동 3천평 부지에 본사 및 전시판매장을 마련했고 이 자리에 평소 소망했던 유리온실(6백평)과 묘목 저온저장보관시설(60평)을 재작년 건립했다.
실내외를 망라해 미림원예 본장이 보유한 묘목은 7백여 종에 무려 80만 그루.
이런 그에게도 시행착오는 있었다.
“협력농가에 히트상품이란 예상으로 권고해 심은 묘목이 판매가 부진해 심한 항의와 배상을 요구할 때 마음고생이 심했지요. 이런 실패가 종목선택에 신중을 기하는 반성의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요.”
그러나 자신이 정성스럽게 관리한 어린 과수가 성목이 돼 수확한 과실을 농가가 고맙다는 표시로 한 아름 들고 올라치면 하루의 피곤은 싹 가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