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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온고지신] 어머니

 

어머니께서 7년째 병원신세를 지며 힘들게 사시다가 하늘나라로 돌아가셨다. 1935년생 88세, 미수(米壽)시다. 아들과 마지막 통화하시고 한 시간 뒤에 눈을 감으셨다. 나는 그 이틀 전 병원측의 협조로 어머니 곁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행운이었다. 임종의 도리도 지키기 힘든 시대다.

 

돌이켜보면,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빠르고 현저하게 어머니의 체력이 약화되었다. 어머니는 마침내 혼자서 걸을 수 없어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만 짧은 거리나마 어렵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는 화장실 출입이 고난도 프로젝트가 되었다. 최근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서 식사나 자잘한 목적을 위하여 움직이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기능이 전반적으로 제로로 향하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최근에는 구급차를 불러야할 응급상황이 빈발했다. 특히 승하차 과정이 정말 위태로웠다.

 

그 길고 험난한 시간을 동생이 24시간 보초병처럼 어머니를 보살폈다. 큰 상금이나 무공훈장을 준다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명을 자발적으로 감수한 그 아들에게 어머니는 큰 복을 주실 것이다. 그 특별한 보살핌이 자발적이지 않다면 이는 단지 억울한 희생이고 노예 노동일뿐이다. 이 미담을 세상이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 자랑이 아니다.

 

부모님은 나를 포함하여  2남 2녀를 두셨다. 어머니의 투병기간을 회고해 보니 장남인 나의 기여도가 맨 아래였다. 사는 게 고단한 두 동생이 가장 헌신적으로 도리를 다했다. 그토록 무거운 짐을 지고도 항상 밝은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의료진이 연명치료 여부를 상의하자 단호히 거부하셨다. 이 의연함은 가슴을 저민다. 죽음의 공포보다 최악의 상태를 연장하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는 간절한 하소연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모셔올 때 그 긴 시간을 온 가족이 그토록 힘들게 감당하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좋은 병원 실력 있는 의료진의 도움으로 쾌유하여 귀향하실 어머니가 상여 탄 망인의 신분으로 낙향한 것을 그저 인생무상이라고 말하고 속으로 울음을 삼키며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나는 어머니가 고향으로 내려가서 텃밭도 가꾸며, 들녘을 산책하고, 아버지를 찾아가서 자식들 사는 얘기도 하며 평화롭게 지내실 걸로 예상했다. 순진한 건지 미련한 건지 병적인 낙관론자인지... 어머니는 끝내 한 줌의 재를 자식들 손에 쥐어주고 빛 보다 빠르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셨다. 우주 자연의 순환 원리다.

 

어머니 잘 모시고 돌아와서 깊은 잠에 들었다. 새벽에 동생이 전화로 엄마가 대장의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셔야 한다고 말했다. 꿈이었다. 놀라서 깨어났다. 큰 슬픔이 작아지는 데는 긴 시간을 요할 것 같다.  세상은 머지않아 나를 어머니 기일도 잊고 사는 자로 추락시킬지도 모른다. 


9할의 어머니들은 유능함 보다는 크든 작든 올바름을 따르는 아들을 원하실 거다. 우리 어머니도 여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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