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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역사가 머무는 세계의 가을 절경 ] 프랑스인의 영원한 왕 앙리 4세와 그의 고향 포

 

프랑스 파리에는 세계적인 명문고가 두 개 있다. 앙리 4세(Henri IV)와 루이 르그랑(Louis Le Grand)이 그것이다. 전자는 종교전쟁의 소용돌이를 살다간 앙리 4세를 기리기 위한 것이고, 후자는 태양왕 루이 14세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그중 전자는 브르봉 가(家) 최초의 왕이자 평화의 사도로 현재까지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그러나 앙리 4세는 안타깝게도 통치 기간 동안 20여 차례의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끝내 살해당했다.

 

1610년 5월 14일 앙리 4세는 쉴리 고문(顧問)의 병문안을 위해 그의 충신 에페르농 공작과 몽바종 공작을 대동하고 파리 아르스날(Arsenal) 지구로 향했다. 그러나 성금요일 오후의 거리는 너무나 혼잡했다. 왕의 마차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만 수도의 중심부 페론느리(Ferronnerie) 거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이때 한 남자가 뛰어오르더니 왕에게 세 차례 칼을 들이대다 결국 목을 쳤다. 급하게 루브르궁으로 옮겨진 왕은 “별일 아니야”라고 말했지만 끝내 눈을 감아야 했다.

 

암살자 프랑수아 라바이악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1577년 앙굴렘에서 태어난 그는 가톨릭 수사인 삼촌들의 보호 아래 성장했다. 수도사를 꿈꿨지만 심리적 불안 장애로 그 길을 가기는 불가능했다.

 

라바이악은 신의 계시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위그노(개신교도)인 앙리 4세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을 만나려고 했지만 연락이 잘되지 않자 그만 살해 계획을 세웠다.

 

 

앙리 4세 왕의 신성한 임무는 합스부르크와의 전쟁으로 강화되었다. 그는 로돌프 2세 황제에 대한 일부 개신교 왕자들을 지지할 계획이었다. 라바이악은 이 전쟁이 교황과 가톨릭 신자들을 직접 향하고 있고 프랑스 왕이 개신교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확신했다.

 

라바이악은 파리 형무소인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로 이송되기 전 레(Ré) 호텔에 이틀간 갇혀 파리 의회의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처형은 1610년 5월 27일 단행됐다. 이날 저녁 무렵 네 마리의 말은 그를 능지처참했다. 살인자가 순교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왕관은 당시 여덟 살이던 루이 13세에게 계승됐지만 왕이 어린 관계로 앙리 4세의 미망인 마리 드 메디시스의 섭정이 시작됐다. 낭트 칙령은 유지되고 합스부르크와의 싸움은 계속돼 유럽은 곧 끔찍한 종교전쟁의 블랙홀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앙리 4세의 죽음을 둘러싼 가설은 지금도 난무하다. 누가 정말 평화의 왕을 죽였을까? 과연 광신자의 돌출 행동이었을까? 라바이악은 네덜란드의 군주 알베르 도트리슈와 같은 고위직 인물에게 놀아났다. 도트리슈는 프랑스 왕이 자기 나라를 침략하고 싶어 한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예수회 음모의 흔적도 언급된다. 가톨릭교회의 쇄신에 대항한 예수회는 앙리 4세와 팽팽한 긴장 관계에 있었다. 암살 전 라바이악은 이들의 집에 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가설은 질투에 사로잡힌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가 남편의 여성편력을 참을 수 없자 남편을 청부살해한 것은 아닌가? 혹은 왕비와 예수회의 열렬한 친구 에페르농 공작이 왕이 자기의 조언을 듣지 않자 좌절하고 벌인 짓인가? 앙리 4세 왕의 죽음은 경찰의 진정한 수사를 불러일으켰지만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은 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한 달 반 동안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1610년 7월 1일 생-드니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앙리 4세의 시신은 미라가 돼 왕들의 묘지인 생-드니 수도원 성곽에 안치됐다.

 

하지만 1793년 10월 혁명가들은 이 무덤을 파헤쳤다. 앙리 4세뿐만 아니라 루이 14세 등 여러 왕들과 왕비들의 시신을 꺼내 머리를 자르고 시신을 군중들에게 전시한 후 공동 구덩이에 내던졌다. 다행히도 20세기 초에 앙리 4세 왕의 두개골은 발견되었고, 미라로 만들어져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리 4세는 프랑스 영령이 된 최초의 왕으로 역사에 길이 보전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어언 400년. 하지만 그의 존재는 여전히 살아있는 전설이다. 특히 그의 고향 포(Pau)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산맥 자락에 위치한 포는 베아른(Béarn)의 수도였다. 이곳은 1512년 나바르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 왕국의 왕인 앙리 달브레는 프랑수아 1세의 조카 마르그리트 당굴렘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 그 공주인 잔 달브레는 앙투안 드 부르봉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1553년 12월 13일 새벽 앙리가 태어났다.

 

아기의 할아버지는 마늘로 손주의 입술을 문지르고 쥐랑송 몇 방울을 그 위에 적셨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고 아버지 앙리 2세는 감격하며 이렇게 외쳤다. “너는 진정한 베아른 사람이 될 거야!” 왕비는 그 옆에서 아들이 소심하지도 주저하지도 않는 왕이 되도록 기도했다.

 

왕자는 태어날 때 거북이 껍데기에 안겨 있었다고 한다. 인도양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진 이 껍데기는 프랑스 혁명 중에 사라졌다 간신히 되찾았다. 이 거북 껍데기는 해마다 생 루이의 날인 8월 25일에 종교 행렬에 둘러싸여 포의 거리를 행진한다. 그의 요람은 힘과 장수의 상징인 포 성에 지금도 여전히 전시돼 있고 그에 얽힌 전설도 생생히 회자되고 있다. 쥐랑송 와인과 마늘 세례식은 베아른 식으로 지금도 전해진다. 쥐랑송 와인은 아이의 생존을 위해 마늘 정향은 악마의 눈으로부터 아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바스크 해안과 대서양에서 가까운 포는 왕의 도시답게 프랑스 제1의 절경을 뽐내고 있다. 시인 라마르틴은 피레네 대로에서 내려다보이는 파노라마 뷰가 너무도 눈부셔 “나폴리가 바다의 가장 아름다운 경치라면 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라고 칭송했다.

 

 

피레네 대로는 피레네산맥을 바라보는 2km 길이의 파노라마 산책로이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피레네 산봉우리들이 물결친다. 그러다 우뚝 선 오소의 미디 정상이 눈에 쏙 들어온다. 그 순간 탄성을 지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피레네 대로는 보몽 공원까지 계속된다. 54개의 작은 표지판은 다양한 피레네산맥 봉우리의 이름들을 알려준다.

 

이 대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덕에 생겨났다. 1808년 피레네 산을 넘던 나폴레옹은 이 산맥의 탁월한 전망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으로 개발에 들어갔다. 그 후 1820년대부터 부유한 외국인들이 이곳으로 겨울철 관광을 오면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1863년 기차가 들어오면서 이는 더욱 활기를 띠었고 유럽 전역을 넘어 전 세계의 특권적인 휴양지로 각광을 받게 됐다. 오늘날에는 많은 관광객과 현지인 모두 피레네산맥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이 길을 걷고 있다.

 

가을에는 피레네산맥이 황토색과 황금색으로 물들어 더욱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앙리 4세의 생가인 포 성은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100년 된 케이블카를 타고 피레네 대로를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들의 숨 막힌 절경이 펼쳐진다.

 

특별한 경험을 원하는 분들이 있다면 주드폼(Jeu de Paume) 레스토랑에서 산 너머로 지는 일몰을 감상하며 현지 요리를 맛볼 수도 있다. 그때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곳이 또 있을까!라고 경탄이 저절로 나오게 될 것이다.

 

[ 글=최인숙 논설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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