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에 물든 모란 미술관의 정원은 아늑했다. 인적이 드문 평일 오후, 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 옆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니 미술관 정문이 나왔다.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서자 평범한 검정색 의상에 뿔테 안경을 쓴 안형남 작가가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1957년생 안형남 작가는 17세 때 미국에 건너가 설치조각 작가로 명성을 쌓았다. 어느덧 흰 눈이 내린 머리카락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얼굴 주름에서 어떤 경지를 초월한 고수의 향기가 느껴졌다.
‘조각 전문 미술관'으로 잘 알려진 모란 미술관에서는 다음 달 28일까지 '불가분: 안형남의 서사' 기획전이 계속되고 있다. 2014년 이곳에서 전시를 한 후 회고전으로 열리는 대형 기획전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Windrock'(윈드락)은 제멋대로 휘고 구부러진 알루미늄 철재 오브제들과 자연물이 혼합된 설치 작품이다. 오밀조밀한 구조와 기이한 형태를 통해 작가의 위트와 익살이 보이고 그 뒤에 숨겨진 자연과 일치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안작가는 "그저 구부리고 접는 모든 과정이 재밌다"고 말하면서도 "윈드락은 자연과 나의 합작품"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 속에 흔히 보이는 '돌'과 같은 모든 것이 결국 나와 같은 존재"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스케치도 하지 않고 생각없이 떠오르는대로 만든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는 인간의 실존과 인류의 영원한 종교적 관심사와 같은 것들을 알루미늄과 철재 소재들의 휨과 구부림, 자르고 붙임을 통해 사물과 공간, 인간과 신의 경계를 담아낸다.
특히 안형남 작가의 작품은 장르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키네틱한 설치 작품부터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벽면을 가득 채운 캔버스, 숯으로 그려낸 장소특정적 드로잉 '착각의 현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어쩌면 착각 속에 사는 것일 수도 있음을 역설한다. 그는 "영원만큼이나 광대하고 무한한 시간 속에서 찰나의 순간을 사는 인간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다투고 경쟁하는 현실, 그 자체가 착각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오랜 세월 그의 작업은 어떤 틀에 갇히지 않고 실험적이면서도 과감한 행보를 계속해 왔다. 이번 전시를 위해 안작가는 지난 여름 2개월 간 모란 미술관에 머물며 새로운 도전을 구상하고 실행했다.
모란 미술관 옆 절터를 도화지 삼은 안작가는 수많은 자갈을 쌓아올린 7개의 큰 봉우리와 작은 동산들을 만들고 이를 감싸고 도는 굽이 굽이 길을 만들어냈다. 작품명 '굽이 굽이' 프로젝트는 걷고, 견디고, 성찰하는 과정을 통해 감사와 치유, 진리로 향하는 여정을 창조해냈다.
안작가는 "그 길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고 걸어왔던 길"이라며 "산 넘고, 물 건너 먼 길을 굽이 굽이 돌아 자녀와 가족을 위해 기도하러 다니던 부모의 모습을 이 작품에 담았다"고 밝혔다.
굽이 굽이 돌아 다다른 발길 기도이 닿은 곳은 사찰의 기도처. 그 안에는 미디어 아트 '존재의 회복'이 상영된다. 삼원색의 몽환적인 빛이 분리와 결합을 통해 태고적 어딘가로 안내한다. 안작가는 "빛의 이런 움직임은 삶의 모호함 속에서 구원의 길을 찾고 나의 존재를 회복한다"고 설명했다.
안형남 작가의 넓은 작품 스펙트럼은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 한 안 작가의 가족사와 연결된다.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던 조부모. 일제강점기 평양에서 아동 선교에 앞장섰던 부친 안성진 목사는 공산당의 핍박을 피해 월남 후 미국으로 이주해 현지 선교와 아동사역을 이어왔다.
동방의 작고 가난한 나라.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시절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고된 삶을 살았던 안작가와 가족의 삶은 그의 작품의 자양분이 됐고 그의 작품을 설명해주는 열쇠가 됐다.
특히 2012년 백남준 탄생 80주년 기념 소마미술관 초대전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작품 '핏줄'은 안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단순한 혈연관계의 가족을 넘어 여전히 갈등하고 대립하고 있는 남북의 상황을 한민족의 혈연적 유대로 조명한다.
안형남 작가의 시선은 과거 가족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지금 그의 시선은 현재를 넘어 미래로 이어진다. 틀에 박힌 구습을 깨고 새로운 미래를 향한 '이브와 아담', 새로운 도전과 높은 곳을 향해 뻗어나가는 '야곱의 사다리'에 드러난 그의 시선이 그렇다. 그것이 지금까지 안형남 작가를 이끌어온 진정한 힘이다.
[ 경기신문 = 우경오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