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5 (화)

  • 구름많음동두천 5.5℃
  • 구름조금강릉 9.7℃
  • 박무서울 8.3℃
  • 박무대전 8.0℃
  • 박무대구 4.5℃
  • 박무울산 7.6℃
  • 박무광주 10.2℃
  • 박무부산 11.4℃
  • 구름많음고창 8.2℃
  • 구름조금제주 14.4℃
  • 흐림강화 6.1℃
  • 맑음보은 3.2℃
  • 구름많음금산 3.2℃
  • 맑음강진군 6.8℃
  • 맑음경주시 3.1℃
  • 맑음거제 10.4℃
기상청 제공

[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 태종과 돌다리 광통교

 

원행을묘 백리길의 행차가 지나간 서울의 남북 간선도로는 숭례문-종각의 남대문로다. 그러면 이 도로의 너비는 얼마였을까? 궁금할 수 있다. 그래서 문헌 기록을 살펴보려 하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게 만드는 유적이 있다. 청계천 위의 광통교를 가보면 된다. 지금은 남대문로의 엄청난 교통량을 피해 서쪽으로 150m 정도 옮겨 놓았는데, 이런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1410년 8월 8일, 큰비가 내려 청계천이 넘치고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 죽은 백성이 있었다. 이에 의정부가 임금에게 보고를 올렸다. "광통교(廣通橋)의 흙다리가 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貞陵) 옛터의 돌로 돌다리를 만드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여기서 임금은 태종 이방원(1367~1422)이고, 정릉은 태조 이성계(1335~1408)의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의 무덤이다.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일곱째 아들인 이방번(1381~1398)과 여덟째 아들인 이방석(1382~1398)을 낳았고, 태종의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1337~1391)가 조선의 개국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조선의 1대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 등과 힘을 합해 자신의 둘째 아들 이방석을 세자의 자리에 올려 신의왕후 한씨의 여섯 아들에게 큰 원한이 되었다.

 

1398년에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이복동생인 이방번과 이방석 그리고 정도전 등의 반대파를 모두 죽였다. 이에 태조가 둘째 아들 정종에게 양위했고, 정종은 비록 이복동생이지만 핏줄을 죽인 경복궁과 서울이 싫어서 1399년에 개성으로의 재천도를 단행했다. 하지만 1400년에 신의왕후 자손들 사이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정종은 실질적인 실권자 태종에게 임금의 자리를 양보했다.

 

태조 이성계는 스물한 살이나 어린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를 매우 어여삐 여겼고, 1396년에 사망하자 경복궁에서 남쪽으로 아주 가까운 지금의 정동에 무덤을 만들고는 정릉(貞陵)이라고 했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에는 가만히 있었지만 1408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다음 해에 도성 밖인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버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정릉의 정자각을 헐어서 명나라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의 누각을 만들었고, 봉분의 자취를 없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했다. 여기에 무덤 앞의 석인(石人)을 비롯하여 모든 석재는 땅에 묻었다.

 

하지만 아직도 태종의 원한은 다 해소되지 않았고, 이를 잘 알고 있던 의정부에서 큰비로 흙다리 광통교가 무너지자 옳거니 하면서 땅속에 묻은 정릉의 석재로 돌다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 다닐 수 있도록 건의했다. 태종은 모른 척하며 그대로 따랐다. 광통교 아래의 양측 축대에는 각종 문양이 아름답게 다듬어진 널찍한 사각형의 돌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태조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인 정릉의 석재를 옮겨 활용한 것이다. 조강지처의 여섯 아들을 제치고 자신의 둘째 아들 이방석을 세자의 자리에 앉힌 신덕왕후 강씨에 대한 태종 이방원의 분노가 진하게 담겼다고 널리 회자된다.

 

현존 광통교의 폭이 곧 조선시대 남대문로의 너비다. 꽤 넓지만 그렇다고 엄청 넓지는 않다. 14.4m라고 한다. 왕복 4차선 도로 정도이거나 약간 넓다.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