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 통나무의자에 앉았다. 편백나무 사이로 비껴드는 아침햇살이 금빛 비단 폭 같다. 날마다 보아도 늘 신비롭다. 숲속 아침 시간은 고요히 맑게 밝아온다. 내 문학의 뿌리 의식일까. 고인이 된 박완서 선생의 「트럭 아저씨」라는 수필이 떠오른다. 거기에 작가에 대한 답이 있어서일 것이다. 박완서 선생이 서울을 떠나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 때의 일이다. 매일 두 번씩 트럭에 채소를 싣고 오는 채소 장수 아저씨가 있었다. 멀리서 그 아저씨가 트럭에 싣고 오는 온갖 채소 이름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선생은 뭐라도 좀 팔아줘야 할 것 같아 마음보다 먼저 엉덩이가 들썩였다고 한다. 그 마음을 알아주는 채소 장수 아저씨는 손이 컸다. 그 때문에 선생은 “이렇게 싸요?” 하면, 물건을 사면서 싸다고 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는 듯 웃는다고 했다. 그렇게 정이 든 아저씨는 평일에는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동안 트럭 아저씨는 박완서 선생을 할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나타나서 새삼스럽게 존경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선생님’이라고 부르더란다. 순박한 감정에 곧이곧대로 나타낸 존경과 애정을 거부할 수 없어 선생께서는 “내 책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으니, 책을
세상은 온통 바이러스 질병으로 숨이 막히고 보행의 자유마저 제한되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손자들 학교 가는 발걸음마저 불안하다. 그런데 6월의 캘린더마저 붉은빛이다. 1일의 ‘의병의 날’로 시작해 6일은 ‘현충일’ 10일은 ‘6·10 민주항쟁기념일’과 뒤를 이은 25일의 ‘6·25 한국전쟁’으로 되어 있다. 캘린더 곳곳에서 한국인의 가슴 속 신음이 들리는 듯하다. 우리 조상들은 5천 년 역사를 통해 크고 작은 외침을 천여 번 아니 정확히 931번을 당했다. 5년에 한 번꼴로 침입자들과 싸우며 죽어갔다. 성폭행은 물론 형제와 찢어져 사는 아픔을 겪으면서 굶주림에 허덕였다. 어찌 피난 갈 준비에 바쁘지 않았겠는가. ‘빨리빨리’의 정신적 습관의 근원이 되지 않았을까! 마침내는 나라를 빼앗겼다. 그리고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임진왜란(1592) 때는 선조가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을 쳤고, 병자호란(1636)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내뺐다. 6·25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 각하라는 자는 서울 사람들과 국민들 몰래 자기 혼자 한강을 건너 남으로 줄행랑을 쳤다. 자기 목숨 귀한 줄만 알았던 임금과 대통령의 뻔뻔함을 탓하지
숲속을 산책하는 노시인의 사색하는 모습을 볼 때나 뮤직홀에서 흰 머리카락 휘날리며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게 하는 지휘자를 볼 때면 품격에 따른 멋이 느껴진다. 순간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 삶이었으며 나의 멋스러움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에 젖게 된다.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사람다운 삶의 길에 마음 두고 공부하면서 붓과 펜을 쥐고 살아왔다. 과정에서의 느낌은 문호들은 인간 탐구의 대가였고 많은 문제는 사람다운 삶의 길에 있다는 것이었다. 글에는 그 사람의 체취가 있으며, 에세이는 그 사람이 걸어온 자취라고도 한다. 그러나 음미되지 않는 삶의 글에서는 울림과 아우라가 없다. 글의 생명을 깊이 인식하고 사회적 사명감과 함께 긍정적인 시선으로 따뜻하고 명분 있는 글쓰기를 항시 소망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내가 쓰는 글이 호수 위를 나는 두루미의 날개처럼 너울너울 훨훨 자유롭고 부드럽게 쓰이기를 소원한다. 자연이 색깔로 시간의 흐름을 달리한다면 붓은 먹으로 사람의 마음을 형상화해준다. 그러므로 붓을 잡는다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된다. 지난날의 붓이 오늘의 펜이 된 지 오래다. 바람은 자체에 소리가 없다. 바람이 부딪히는 데 따라서 소리가 곱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