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그렇지만 평론가에게도 쉬운 영화가 있고 어려운 영화가 있다. 장르영화는 쉽다. 장르 안의 규칙을 잘 보면 되니까. 대체로 할리우드 영화가 그렇다. 반면에 오랜 역사의 얘기나 전설, 설화, 민담을 소재로 한 유럽 영화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거기에다 현대와 연결되는 상징, 기호들이 이것저것 붙여져 있기까지 하면, 쉽사리 그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숲과 나무의 경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최근 국내 개봉돼 예상밖에, 비교적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그린 나이트’가 그런 작품에 해당한다. 기대 이상의 인기는 이 영화가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의 1925년 원작 ’가웨인 경과 녹색의 기사’를 원작으로 하고 있어서일까. (톨킨은 이를 14세기에 쓰여진 시에서 영감을 받아 썼다.) 그렇다면 많은 젊은 층 관객들이 이미 이 원작을 섭렵했고, 그것이 영화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무척 궁금해한다는 얘기일까. N차 관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영화가 갖는 깊은 상상력때문인가, 아니면 몇 번을 봐야지만 완벽하게 이해가 갈 만큼 이야기가 복잡해서인가. 실제로 영화는 온갖 상상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학적 기호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영화
인류의 미래가 희망적인지 비관적인지를 놓고 벌인 석학들의 토론(이 무슨 쓰잘 데 없는 짓인가,라고 처음엔 생각하기 쉽다.)을 보면서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됐다. 이 토론은 ‘사피엔스의 미래(전병근 譯, 모던아카이브刊)’라는 책으로 엮여서 시중에 나왔다.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은 스티븐 핑커, 매트 리들리, 알랭 드 보통, 그리고 말콤 글래드웰이다. 이들은 캐나다의 유명 토크 쇼인 ‘멍크 디베이트’에 참가했다. 이 토론회에는 3000명의 관객이 객석을 가득 채우고 캐나다 공영방송 CPAC. 그리고 미국의 C-SPAN을 통해 북미 전역에 방송된다. ‘멍크 디베이트’는 캐나다 금광재벌인 피터 멍크가 만든 세계 석학들의 대담, 토론 프로그램이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우주여행을 개인적으로 할 생각을 하지만 어떤 사람, 특히 멍크 부부 같은 사람들은 인류의 삶을 어떻게 하면 더 낫게 만들까를 고민한다. 이 책의 토론자 넷이 다 어떤 사람들인지 지면 관계상 일일이 소개하지는 않겠다. 어쨌든 지적인 측면에서는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알랭 드 보통은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소설가이자 철학자이다. 하바드 출신이다.(적어도 하바드 출신이라면 이 정도의 깊이
전쟁은 세 단계로 나뉘어진다. 전전(戰前)과 전쟁 중, 그리고 전후(戰後)이다. 어느 단계가 가장 고통스러운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전쟁 중보다는 전후가 그렇다. 사람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통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적에게 자신을 팔아 먹었다면 그 일을 과연 어떻게 잊고 살겠는가. 그에 대한 원한을 어찌 쉽게 떨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보다 더, 더, 더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은 상대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다소 모호할 때이다. 팩트도 불분명한데다 그 배신이 배신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석될 때이다. 살다 보면 진실은 늘,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세 개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모호함이 만들어 내는 불신이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법이다. 회복되지 못하는 관계의 이어짐이 삶을 파국으로 만든다. 전쟁 후에는 대개, 사람들이 그런 감정들로 살아간다. 물질적으로 피폐해진 건 곧 재건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복구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독일 현대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적 아우라의 폭이 가장 넓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의 ‘피닉스’가 바로 그런 얘기다. 주인공 넬리(니
류승완이 이번에는 외곽을 친다. 그런데 그 수법이 꽤나 노련하다. 신작 ‘모가디슈’에서 류승완은 1990년 소말리아의 쿠데타 사건을 다룬다. 소말리아는 이후 내전에 휩싸이고 미국과 다국적군은 군사적으로 개입하지만 오히려 처참하게 실패한 후 군대를 뺀다.(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에 잘 나와 있다) 그 와중에 빌 클린튼은 모니카 르윈스키와 백악관에서 지퍼를 내렸다.(일명 ‘지퍼 게이트’) 영화 ‘모가디슈’는 소말리아 내전의 불길하고 폭력적인 전조(前兆)를 다룬다. 그런데 그게 외곽을 때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소말리아 내전에 휩싸인 사람들의 얘기를 그리는 척, 사실은 그때 당시의 한국 정치 상황, 분단의 현실, 더 나아가 지금에 이르러서도 우리가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어떻게 지향해야 할 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1990년의 소말리아가 아니라 2021년 한반도 문제를 성찰하게 만든다. 그렇게 외곽을 노련하게 때린다. 그런데 그 정치적 시선이 매우 올바르고 따뜻하다. 류승완이 정신적으로, 사회과학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과하고 모자람이 없다. 균형미가 좋다. 극 전체를 이끌어 가는 톤앤매너의 균질감이 뛰어나
방송을 보면서 아나운서들이 제일 짜증이 날 때는 장본인과 주인공을 구분하지 못하고 마구 섞어 쓰거나 아예 장본인이라는 표현밖에 모르는 것 같을 때이다. 장본인은 여러 (나쁜) 일을 일으킨 바로 그 사람이다. 주인공은 여러 (좋은) 일을 만들어 낸 바로 그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네가 이 모든 일을 그르친 그 장본인이냐’가 맞는 말이고, ‘바로 이 분이 이번 대형 화재에서 어린 아이들을 구한 그 주인공 영웅이십니다’가 맞는 표현이다. 그런데 국영/공영 아나운서조차 이걸 구분 못하고 ‘이번에 올림픽 경기를 승리로 이끈 장본인이다’식의 표현을 쓴다. 한심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 선수단을 소개할 때 체르노빌 원전 사진을 내보내고 아이티 선수단을 소개할 때 대통령이 암살된 얘기를 하는 등의 행태는 위와 같은 무식의 소치인가. 그 지경을 넘어선 것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무엇보다 정치적 올바름에 문제가 있다. ‘라떼에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아버지가, 혹은 선생님이 항상 말씀하셨다. ‘걔가 그래도 애는 착해. 그러니까 너무 싫어하지 마. 사람들 앞에서 너무 뭐라 그러고 그러면 안된다 알았지?’등등의 말씀이셨다. 사람의 좋은 면을 먼저 봐야 한다는
일본 오키타 슈이치의 신작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는 중층의 텍스트이다. 여러가지의 얘기가 겹겹이 쌓여 있다. 흥미로운 지점이 많다. 일단 일본의 초고령화 사회에 대한 시선이 남다르다.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여성주의가 겹쳐져 있다. 그것도 일본식으로. 한국의 가족주의와는 철저히 다른 기조를 갖고 있는 일본의 개인주의가 지금 어떤 정점을 찍고 있는 가에 대한 사회적 고찰(考察)도 엿보인다. 그런 등등이 참으로 특이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주인공 모모코(다나카 유코)는 영화 내내 대사가 거의 없다. 일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에 딸이 왔을 때 잠깐 대화를 할 뿐, 일상에서 말을 나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나누는 대화는 거의 전부가 독백이다. 혼자서 마음 속으로 하는 얘기다. 입 밖으로 대사를 하지 않는 캐릭터가 극 전체를 주도하게끔 이야기가 구성돼 있다. 그것 참 별일이다. 모모코는 혼자 사는 늙은 여자다. 75세여서 사실 일본이나 우리의 현 고령화 사회를 생각할 때 아주 늙은 나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아직 젊다. 때문에 모모코를 수식하는 말에서는 ‘혼자 사는’과 ‘여자’에 더 방점이 찍혀져야 한다.
현재 세계 극장가에서 단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는 ‘블랙 위도우’이다. 이 영화는 나름 심오한 정치철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근데 그건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어벤져스’ 시리즈 상당수가 그렇다. 예컨대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이 그랬다.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만든 절대적 인공 지능 울트론이 독단화 되면서 인류에 저항한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이념이나 주의(主義)가 절대화될 때 빚어지는 사회적 참극, 그 현실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어벤져스 : 인피니티워’(2018)와 ‘어벤져스 : 엔드게임’(2019)에 등장하는 타노스(조슈 브롤린)의 존재에서 정점을 찍는다. 타노스는 인류를 살리기 위해 인류의 반을 죽여야 한다는 철학을 지닌 절대 악이다. 그래서 후반으로 가면 꼭 미워할 수만은 없는 존재로도 느껴진다. 이쯤 되면 이 시리즈는 꼭 애들만 보는 마블 영화가 아닌 셈이 된다.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이 그토록 찾고자 평생토록 사유(思惟)에 사유를 거듭했던 질문을 떠오르게 한다. “진실은 무엇인가. 인간은 단 하나의 진실과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가.” 칼 마르크스는 또 이렇게 얘기하기도 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
현재의 한국정치 사회구조, 조금 좁혀서 정치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970년대~1990년대의 미국 민주당의 흐름을 복기하면 조금 도움이 된다. 그 학습을 위해 출판사 모던 아카이브가 출간한 카툰 북 《버니》를 참조했음을 미리 밝힌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하야하기 전 닉슨은 월남전의 여파로 재선이 불투명한 상태였다. 때문에 1972년 그가 재선에 성공한 것은 꽤나 놀랄 만한 일이었는데, 그건 베트남전을 비롯해서 중남미에서 연이어 일어난 좌파 혁명의 성공과 그 분위기로 인해 미국 사회가 오히려 보수화된 결과이기도 했다. 미 국내에서의 지난(至難) 했던 반전 시위가 피로감을 가져온 것도 일부 사실이다. 이때부터 미국 민주당은 급격하게 우클릭한다. 민주당 내 우파 그룹은 처음엔 DNC (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 민주당 전국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이후엔 CDM(Coalition for a Democratic Majority : 민주적 다수를 위한 연합), 혹은 DLC(Democratic Leadership Council : 민주당 지도자회의)라는 이름으로 민주당을 끊임없이, 그리고 줄곧, 우경화된 상태로 밀어 넣는 역할을 한다. 이들의
이번 주 소개 영화는 미안하게도 OTT에 걸려 있는 작품이다. 일본영화 ‘바람의 검심 최종장 : 더 파이널’이다. 제목만으로는 시리즈의 맨 마지막 회 같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짜 최종회는 ‘바람의 검심 최종장 : 더 비기닝’이라고 해서 프리퀄이 하나 남아 있다. 이 시리즈는 총 5회이다. 자 그러니 일각에서는, 앞의 세 편을 다시 다 찾아봐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들린다. 대답은 그래도 되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에피소드는 비교적 독립적인데다 과거의 이야기를 할 경우 그 핵심적인 내용은 플래시 백 기법을 써서 그 연결 지점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번 4편 ‘바람의 검심 최종장 : 더 파이널’도 그 이전의 회차들과 기본 줄거리 면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역날검의 명수이자 최고의 검객 소리를 듣는 주인공 히무라 켄신(사토 타케루)이 도쿄 인근에서 연인 카오루(타케이 에미)가 운영하는 무예도장에 은둔해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켄신에게 악의 세력들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대형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악의 세력들 모두, 흔하게 얘기해서 간단치 않은 무공과 칼 솜씨를 지닌 무사 출신들이다. 일명 밧토우사이(발도제, 抜刀斎 / 발도술, 拔刀
제주도 말로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무엇일까. 제주 해녀의 이야기를 그린 소준문 감독의 ‘빛나는 순간’은 영화 내내 가르쳐 주지 않다가 맨 끝에 가서야 얘기해 준다. 그래서 ‘아하, 이 영화의 러브 스토리는 그리 해피 엔딩이지 않겠구나’하는 예감을 갖게 한다. 그런데 결국은 가르쳐 주긴 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는 제주말로 ‘이녁 소랑햄시다’이다. 완전히 다른 말이다. 제주와 ‘육지것’들은 소통하기 힘든 언어를 지녔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감독의 그런 장치, 곧 당신을 사랑합니다의 서울말과 제주말의 구현에 시간 차를 두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된 기조(基調)이다. 그 점을 알아채는 사람은 비교적 영화의 감이 좋은 사람들이다. 영화를 좀 봤구나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 영화가 너무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간다고 느낄 수 있겠다. 그래서 다소 고답적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빛나는 순간’은 그렇게 기성의 질서에 머무는 작품이 아니다. 무엇보다 제주 해녀의 얘기로 시작해서 찬란한 러브 스토리를 이끌어 낸다. 그것도 아주아주, 좀 더 강조해서 ‘아주아주아주아주’ 파격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래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영화는 70살이 다 된 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