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시궁창일 때, 생각하는 영화를 보는 것도 일종의 사치일 수 있다. 게다가 특정 집단이 온갖 권력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억압하는 모습이 계속되면 저항의 심리 때문에 급 피곤해진다. 잘못된 권력의 우두머리를 잡아다가 흠씬 두들겨 주고 싶어진다. 그렇게 좀, 마음을 쉬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 그럴 때는 액션이다. 액션 영화가 주는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가 최고다. 영화 ‘SAS 특수부대 : 라이즈 오브 블랙 스완’이 극장보다 OTT 넷플릭스를 택했다는 것은 자신이 킬링타임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근데 이 영화, 다분히 ‘사도마조히즘적 도스토예프스키풍’으로 구성돼 있다. 이 영화에 대해 평론이랍시고 리뷰를 쓰는 이유이다. 영화는 당연히 악당과 그에 맞서는 공정한 정부 병력(그런데 지금 세상에 그런 게 있기나 할까?)간의 전투 얘기를 후자의 시선으로 그린다. 아니 그러는 척한다. 상업 영화는 늘 선(善)이 이기는 해피 엔딩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중간중간 트랩을 심어 놓는다. 그래서 살짝 헷갈리게 만든다. 이제는 용병도 기업이다. 영화 속에서는 블랙 스완이라는 용병 조직이 기업형으로 움직인다. 이들은 얼마 전 러시아 조지아에서
소설 한번 쓰겠다. 이중첩자 얘기다. 무심코 영화 <토탈 리콜>을 다시 보다가 든 생각이다. 다시 본 건, 1990년 폴 버호벤이 만든 희대의 걸작 원판이 아니라 렌 와이즈먼이 2012년에 만든 리메이크 판본이다. 이게 더 영화 속 이중간첩의 행보를 알기 쉽게 풀어냈다. 주인공 더그(콜린 파렐)는 자신이 저항군의 행동대장인 칼 하우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것도 사실은 가짜다. 독재자인 코하겐(브라이언 크랜스턴)이 저항군의 지도자 마티아스(빌 나이히)에게 접근시키기 위해 그를 저항군 편에 서게 한 것처럼 기억을 조작해 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칼 하우저는 애초부터 저항군을 파괴하려는 제5열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저항군에서 암약하면서 여자 멜리나(제시카 비엘)를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자신의 기억이 조작됐다는 것을 모르는 하우저는 진짜로 저항군의 핵심이 됐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마저 다 헝클어진다. 왜냐하면 그는 코하겐에 의해 끌려 와 다시 한번 기억이 조작되기 때문이다. 그는 더그라는 이름의 노동자로 아내 로리(케이트 베킨세일)와 살아가는 평범남이다. 로리는 그를 감시하는 요원이다. 어쨌든 현재의 그는 ‘노바디’다.
9월 2일 현재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평소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겐 몇 가지 지점에서 기이한 영화다. 첫째, 이건 할리우드 영화인가 중국 영화인가. 둘째, 이건 마블 영화인가 중국 무협 영화인가. 셋째 이건 미국과 전 세계 글로벌용 영화인가 아니면 중국어권 아시아에서 인기를 모을 작품인가. 모든 질문에는 앞에 답의 방점이 찍혀 있다. ‘샹치’는 중국 무협 영화를 할리우드식 액션으로 가공해 나온 색다른 작품이다. A+B를 해서 비교적 다른 C가 나왔다. 거칠게 비교하자면 이안의 ‘와호장룡’을 ‘캡틴 아메리칸’ 판 SF 액션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생각보다는 재미있다. 그런데 또 막상 영화를 보고 있으면 진짜 기이한 생각이 든다. 아니 어떻게 주연 샹치(시무 리우)보다 조연인 쑤 웬우(양조위)가 더 멋있을까. 영화는 아들보다 아버지를 더 돋보이게 찍었다. 이건 영화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연출일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런 생각도 든다. 이 영화가 과연 중국에서 상영될 수 있을까, 없을까. 아니나 다를까. ‘샹치’에 대해 중국 정부는 최근 상영금지 조치를 내렸다. 보다 정확하게는 중국 내로 들여오지 않
사람이나 사회나 품격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없는 것이 바로 그 품격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존엄성을 헌신짝처럼 취급한다. 기이한 것은 배운 사람들일수록 그런 행태가 더 하다는 것이다. 서울대를 나왔든 미국 어디서 유학 생활을 했든 그래서 국내에 돌아와 KDI(한국개발연구원)같은 유수의 기관에서 몸을 담았든 오히려 품격 제로의 현상을 보인다. 그저 자기네들이 옳으니 너희들은 따라오기만 해라, 라는 식이다. 안하무인도 이런 안하무인이 없으며 악다구니도 이런 악다구니가 없다. 한국사회를 가로지르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자(勞資) 모순이 아니다. 半봉건적 양반-상놈의 대물림의 신분, 계급의식도 아니다. 오로지 당신이 엘리트냐 그렇지 않으냐(서울대를 나왔느냐, 미국 유학을 다녀왔느냐, 판검사나 의사, 교수, 조중동같은 언론사에 다니느냐) 하는 엘리트주의이다. 그야말로 품격 없는, 천박한 선민의식이다. 이 ‘나 잘난 주의’가 한국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 모든 장점, 모든 미덕을 가로지른다. 열심히 일한 사람들의 공로를 가로챈다. 넷플릭스의 6부작 드라마 ‘더 체어’는 미국 동부에 있는 명문 대학 펨브로크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 전체 8개 아이비리그 중 가장
지난 25일 개봉된 새영화 ‘레미니센스’는 호오가 엇갈린다. 평단에서는 그다지 점수가 높지 않다. 동의하지 않는다. ‘레미니센스’는 이야기 구조와 설정, 무엇보다 그것을 끌어 가는 연출의 솜씨가 만만치 않은 작품이다. 이른바 웰 메이드(well-made) 영화이다. 게다가 러브 스토리다. 이런 영화를 마다할 필요는 없다. 제목 ‘레미니센스’의 정확한 발음은 레머니슨스(reminiscence)이다. 기억보다는 추억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긴 에피소드의 추억이 아니라 메모리급의 단편적인 회상을 말할 때 레머니슨스라고 한다. 원래는 심리학 용어이다. 영화의 남자 주인공 닉(휴 잭맨)은 기억을 재생시켜 주는 사람이다. 일종의 전문 최면술사이자 정신과 의사인 셈이다. 다만 요즘보다 훨씬 업그레이드 된 초 첨단 장비를 이용하는 것이 다르다. 그런 장치가 개발돼 있다. 그러나 장치는 장치일뿐, 사람을 기억으로 인도하는 방식은 지금의 정신과 의사와 비슷하다. 근데 이런 직업의 사람이 주변에 있을까? 있다. 지금은 없지만 가까운 미래세계에는 있다. 이 영화 ‘레미니센스’는 근미래의 생활상을 담은 SF멜로영화이다. 세계는, 할리우드 입장에서 보면 그 세계가 미국이지만, 어쨌든
영화 ‘프리 가이’ 속 주인공 프리 가이는 프리 시티 안에 사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프리 시티’라는 온라인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라는 얘기다. 온라인 게임을 만들거나 그런 회사를 둘러싼 막대한 이권 다툼의 얘기이거나 하는 것만이 아니다. 실제로 온라인 게임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온라인 밖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제 영화의 상상력은 머릿 속과 머리 밖을 연결시킨다. 꽤나 복잡해진다. 그러나,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얘기 하나는 기가 막힌다. 그렇다고 요즘 젊은 ‘애’들 생각과 취향은 정말 남다르군…하지는 말라. ‘아차’하게 된다. 이걸 만든 감독 숀 레비는 1968년생 50대 중반 아저씨다. 영화를 만들고 보는 것, 그리고 세상을 살고 이해하는 것이 결코 나이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나이 먹은 장년층들, 이런 영화 본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나는 컴퓨터 게임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징징댈 필요도 없다. RPG(Role Playing Game) 게임이 뭔지, 그게 어떤 건지 들어 보지도, 해 보지도 않았다고 ‘성질’을 낼 필요도 없다. ‘프리 가이’는 영화를 본 지 한 10분쯤 지나면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그만큼 스토리가 좋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평론가에게도 쉬운 영화가 있고 어려운 영화가 있다. 장르영화는 쉽다. 장르 안의 규칙을 잘 보면 되니까. 대체로 할리우드 영화가 그렇다. 반면에 오랜 역사의 얘기나 전설, 설화, 민담을 소재로 한 유럽 영화들은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거기에다 현대와 연결되는 상징, 기호들이 이것저것 붙여져 있기까지 하면, 쉽사리 그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숲과 나무의 경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진다. 최근 국내 개봉돼 예상밖에, 비교적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그린 나이트’가 그런 작품에 해당한다. 기대 이상의 인기는 이 영화가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의 1925년 원작 ’가웨인 경과 녹색의 기사’를 원작으로 하고 있어서일까. (톨킨은 이를 14세기에 쓰여진 시에서 영감을 받아 썼다.) 그렇다면 많은 젊은 층 관객들이 이미 이 원작을 섭렵했고, 그것이 영화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무척 궁금해한다는 얘기일까. N차 관람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영화가 갖는 깊은 상상력때문인가, 아니면 몇 번을 봐야지만 완벽하게 이해가 갈 만큼 이야기가 복잡해서인가. 실제로 영화는 온갖 상상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학적 기호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영화
인류의 미래가 희망적인지 비관적인지를 놓고 벌인 석학들의 토론(이 무슨 쓰잘 데 없는 짓인가,라고 처음엔 생각하기 쉽다.)을 보면서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됐다. 이 토론은 ‘사피엔스의 미래(전병근 譯, 모던아카이브刊)’라는 책으로 엮여서 시중에 나왔다.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은 스티븐 핑커, 매트 리들리, 알랭 드 보통, 그리고 말콤 글래드웰이다. 이들은 캐나다의 유명 토크 쇼인 ‘멍크 디베이트’에 참가했다. 이 토론회에는 3000명의 관객이 객석을 가득 채우고 캐나다 공영방송 CPAC. 그리고 미국의 C-SPAN을 통해 북미 전역에 방송된다. ‘멍크 디베이트’는 캐나다 금광재벌인 피터 멍크가 만든 세계 석학들의 대담, 토론 프로그램이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우주여행을 개인적으로 할 생각을 하지만 어떤 사람, 특히 멍크 부부 같은 사람들은 인류의 삶을 어떻게 하면 더 낫게 만들까를 고민한다. 이 책의 토론자 넷이 다 어떤 사람들인지 지면 관계상 일일이 소개하지는 않겠다. 어쨌든 지적인 측면에서는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알랭 드 보통은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소설가이자 철학자이다. 하바드 출신이다.(적어도 하바드 출신이라면 이 정도의 깊이
전쟁은 세 단계로 나뉘어진다. 전전(戰前)과 전쟁 중, 그리고 전후(戰後)이다. 어느 단계가 가장 고통스러운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전쟁 중보다는 전후가 그렇다. 사람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고통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적에게 자신을 팔아 먹었다면 그 일을 과연 어떻게 잊고 살겠는가. 그에 대한 원한을 어찌 쉽게 떨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보다 더, 더, 더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은 상대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다소 모호할 때이다. 팩트도 불분명한데다 그 배신이 배신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석될 때이다. 살다 보면 진실은 늘, 하나가 아니라 두 개 세 개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모호함이 만들어 내는 불신이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법이다. 회복되지 못하는 관계의 이어짐이 삶을 파국으로 만든다. 전쟁 후에는 대개, 사람들이 그런 감정들로 살아간다. 물질적으로 피폐해진 건 곧 재건되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복구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독일 현대영화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적 아우라의 폭이 가장 넓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의 ‘피닉스’가 바로 그런 얘기다. 주인공 넬리(니
류승완이 이번에는 외곽을 친다. 그런데 그 수법이 꽤나 노련하다. 신작 ‘모가디슈’에서 류승완은 1990년 소말리아의 쿠데타 사건을 다룬다. 소말리아는 이후 내전에 휩싸이고 미국과 다국적군은 군사적으로 개입하지만 오히려 처참하게 실패한 후 군대를 뺀다.(리들리 스콧의 ‘블랙 호크 다운’에 잘 나와 있다) 그 와중에 빌 클린튼은 모니카 르윈스키와 백악관에서 지퍼를 내렸다.(일명 ‘지퍼 게이트’) 영화 ‘모가디슈’는 소말리아 내전의 불길하고 폭력적인 전조(前兆)를 다룬다. 그런데 그게 외곽을 때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소말리아 내전에 휩싸인 사람들의 얘기를 그리는 척, 사실은 그때 당시의 한국 정치 상황, 분단의 현실, 더 나아가 지금에 이르러서도 우리가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어떻게 지향해야 할 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1990년의 소말리아가 아니라 2021년 한반도 문제를 성찰하게 만든다. 그렇게 외곽을 노련하게 때린다. 그런데 그 정치적 시선이 매우 올바르고 따뜻하다. 류승완이 정신적으로, 사회과학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과하고 모자람이 없다. 균형미가 좋다. 극 전체를 이끌어 가는 톤앤매너의 균질감이 뛰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