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한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위하여 3년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라. 우리 2천만 형제자매 각자가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뜻을 이어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노라!" 안중근 의사가 순국 직전 민족의 제단에 바친 유언이다. 큰절을 올린다. 조ㆍ중ㆍ러 3국을 포함, 일본의 아시아 지배야욕의 총책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이고 순국한 이 청년은 예수보다 두 살 아래, 서른 한 살이었다. 1910년 3월 26일. 그가 사형선고를 받고 나서 짧은 시간 동안 쓴 '안응칠 역사'와 '동양평화론'은 고품격 인류문화유산이다. 이는 안의사가 총 잘 쏘는 포수만이 아니라, 평화주의 철학의 실천자로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다. 순국 100주년이다. 그 1세기를 요약해보자. 해방후 세대는 대부분, 결혼하자마자, 그리고 취직하자마자, 독립군들은 초개(草芥)처럼 내던졌던 자신과 가정, 쌀을 주는 일터에 인생을 걸며 쪼그라든다. 조국과 민족, 사해동포의 평화세상을 중시하는 가치는 사라졌다. 그 성실과 헌신은 일면 눈물겹다. 그 덕에 먹거리 풍족해지고, 차림새 남루를 벗어났다. 주거는 현대화 되었다. 문제는 식의주(食衣住)
오늘 '노량 - 죽음의 바다'를 두번째 봤다. 전투상황을 좀더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함께 본 이들의 공통된 의견은 '너무 길다', '특히 엔딩이 용두사미 꼴'이라는 견해였다. 나는 '朝日 7년전쟁'과 그 재앙의 중심에서 태양처럼 빛났던 이순신의 아름다움과 향기, 上머저리 선조의 더러움과 추함을 생각했다. 정치의 본질은 400년전 왕조시대나 대명천지 21세기 민주공화정의 시대나 큰 차이가 없다. 풍전등화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을 살려낸 구국의 영웅은 예외 없이 간신들의 모함과 질투의 대상이 되어 죽거나 그에 준하는 탄압을 받는다. 우리 역사에 이순신이라는 초인적인 인물이 실존했다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또한 실로 소중하다. 물신숭배의 정점인 오늘의 세태를 기준으로 한다면, 이 위인전은 당시의 한 뛰어난 글쟁이가 원고료로 찹쌀 스무 가마쯤 받아먹고 심청전 쓰듯 창작한 것이라고 말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신년연휴 이순신을 읽으며, 희노애락의 감정이 그가 싸웠던 바다의 높은 파도처럼 오르내리는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참 좋았다. 여론조사를 하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나라 사람들 70%가 이순신을 꼽는다고 한다.
마침내 2주만에 500만을 돌파했군요. 저는 지난 일요일 이른 아침(早朝)에 봤습니다. 그날 그 시간에 거의 만석이었습니다. 놀라웠습니다. 1000만을 가뿐하게 넘길 것 같은 기세가 느껴졌습니다. 역대 최대 관객을 기록한 영화는 지난 2014년 7월에 개봉했던 '명량'이었더군요. 1700만을 넘겼으니 감독과 투자자들은 엄청난 돈을 벌었을 겁니다. 제가 초장부터 상업성을 들먹이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두환이 저지른 반란과 정권찬탈 과정을 윤석열의 패악(悖惡)정치와 동일시하게 만드는 복선이 강력하게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그 전두환이 이 윤석열과 똑같드라", 면서 친구들에게 구전합니다. 그 관객들이 이 태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법칙성을 갈파합니다. 윤의 머저리 같은 졸개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강력한 움직임을 약화시켜서 왕초의 칭찬을 듣고 싶어할 겁니다. 예를들어 상영관의 숫자를 줄이도록 해서라도, 세무조사 따위로 겁박을 줘서라도 말입니다. 그 허접한 꼼수들이 발각된다면 신기록은 더 짧은 시간 안에 세워질 것입니다. 늘 그렇게 악수를 두는 패거리이니 이번에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20~30대 관객이 60%에
감 참 좋아한다. 특히 홍시(紅柿). 조계사 경내에 있는 까페 ‘나무’의 홍시 쥬스, 일품이다. 지인들과 거기 앉아 한 잔 씩 하면, 소통도 참 잘 된다. 그 높은 값의 평화, 늘 홍시가 가져다준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지난 주 젊은이들에게 '맹자'를 강의했다. 스물 다섯 살 복학생의 그 뜨거웠던 여름방학, 선풍기도 없는 강의실에서 공부했던 맹자원전 강독의 감동은 30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 감동, 앞으로 30년 또한 변함없이 이어지길 빈다. 스물 다섯 전후의 젊은이들과 함께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아버지’ 맹자(孟子)를 읽고 토론한 후, 몇 마디 보탰다. "하늘높이 달려 있는 저 홍시가 仁이다." 따지 않고, 까치의 밥으로 놓아둔 조상들의 그 인자한 가슴은 눈물겹다. 언제나 뭉클하다. 철학적이다. 이 무한 우주의 운행 안에서 그 보다 더한 어진 마음 어디서 또 접한단 말인가. '대지(大地)'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던 故 펄 벅 여사가 방한하여 경주에 갔었다. 천년 古都 여기저기를 돌아댕기다가 높이 달려 있는 홍시를 보고서는 “따기 힘들어서 그냥 둔 거냐?”고 물었다 한다. 1960년이었다. 당시 수행했던 젊은 기자(故 이규태 선생)가 “겨울을 나는
李完用! 우리 민족사에서 참으로 특별한 이름이다. 그는 1858년 지금의 판교 낙생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시시했다. 열살 때, 먼 친척의 양자가 된다. 장대높이뛰기와 다름없는 그의 성공가도에 첫번째 기회는 바로 이 입양이었다. 양부 이호준은 당시 한성판윤 등을 지낸 정계거물. 흥선 대원군의 절친으로, 사돈이기도 했다. 내성적인데다 집안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자랐다. 양부 계보의 큰 지식인들에게 사서삼경을 배웠다. 선생들은 그의 뛰어난 머리와 높은 성취욕을 지적했다. 이 두 가지 장점이 이후 그의 삶을 그렇게 이끌었다. 당시 고종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무능하고 불행하고 측은한 지도자였다. 안으로는 아버지 대원군과 부인 민씨가 각각 설치며 죽기살기로 싸우고, 밖으로는 청나라 러시아 일본과 멀리 미국까지 잡아먹으려고 달려들었다. 풍전등화였다. 국내 국제정치의 본질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이 나라의 운명은 영원히 이 변경불가한 지정학의 종속변수일 수 밖에 없다. 리더십의 수준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최선이 아닐 경우는 우리나라는 피할 수 없이 재앙의 현장이 된다. 위기의식이 하늘을 찌르는 처지의 임금에게 구
1887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나 평양의 일신고보를 졸업했다. 1904년 하와이로 노동이민 갔다가 본토로 옮겨 도산 안창호의 공립협회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에서 도산의 지도를 받으며 활동하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토쿄를 거쳐 귀국했다. 국권회복이 목표였다. 1907년. 스무살이었다. 100년 전, 뜻있는 약관의 청년들은 대개 이와 같았다. 1909년 1월.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황제와 함께 평양에 온다는 정보를 듣고 동료들과 평양역에서 대기하다가 도산 안창호의 '전략적 만류'를 받아들여 연해주로 떠났다. 그 해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그 '동양 제1적'을 쏘아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 목표를 이완용으로 바꿨다. 백범일지 '민족에 내놓은 몸' 편에 보면, 이재명과의 인연이 상세히 나온다. 의사는 미국서 돌아와 오인성이라는 여교사와 결혼했다. 부인은 남편의 계획을 듣고 강하게 반대했다. 이견으로 다투다가 오발이 발생했는데, 집밖에서는 그 총성을 심각하게 여긴 것 같다. 동네 유지가 마침 그 마을에 와서 머물던 백범에게 청년을 데리고 왔다. 백범이 타일러서 총을 챙겼고, 함께 있던 노백린 장군이 "서울에서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두 거인은 얼마 후
이쪽은 노무현 때고, 저쪽은 고이즈미 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일본은 '한국이 독도를 불법점유하고 있다'는 주장을 과하게 하여 모든 언론이 이를 비중있게 보도했다. 그 어느 날, "고이즈미에게 편지나 한 통 써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장은 없었다. 최근 한일관계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80%다. 이는 정부여당에 대한 심정적 탄핵을 뜻한다.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가 결정타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군사협력 관계 등 핵심사안들이 상식과 여망을 지나치게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독도에 대해서도 그간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단호함과 당연함'이 변질될 것 같다는 우려가 나오기 시작했다. 취임 이후, 윤석열 정부의 친일 저자세가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20년 가까이 지난 편지 한통을 꺼내 읽으면서, 등장인물들만 바뀌었을 뿐, 한일간의 정치외교는 단 1센티미터도 발전이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곱절로 악화되고 퇴보하였다. 고이즈미 총리께! 저는 한국의 서울에 사는 40대 중반의 가장입니다. 제가 선생께 편지를 쓰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물론 금지된 일도 아닙니다. 이는
2023년 8월 3일, 광복회가 주관하는 '대한민국 정체성 선포식'이 열렸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이승만 기념관' 프로젝트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 사업은 이승만을 신격화하여 건국대통령으로 몰아가려는 것이다. 그건 '괴물기념관'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처사"라고 말했다. 이어서 "문대통령이 1919년 4월 11일(임시정부 수립일)을 건국일이라고 했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그날 '대한제국'이 끝나고 '대한민국'이란 공화정이 처음으로 헌장에 채택된 것이다. 왕조는 망하고 흥하고 반복되었지만, 나라는 지속되어왔다"고 주장했다. 2023년 6월 28일, '이승만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라는 단체가 출범하였다. 위원장은 이명박 때 국무총리 김황식. 위원들은 대부분 보수인사들로, 이인수 박지만 김현철 김홍업 등 전직 네명의 대통령 아들들이 들어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대미, 대일관계에서 심히 우려되는 행보를 지속하고 있다. 밖에서는 굴욕적이고, 안에서는 불친절하다. 그래서 모욕적이다. 이는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의 12년 독재를 상기시킨다. 기념관 논란에서 이승만의 '나쁜 정치'와 그로 인
100년 전, 일제 치하, 경상도 진주에 국채보상운동, 3.1 만세 운동, 학교설립, 백정 해방운동을 앞장서서 주도했던 젊고 의로운 인물이 있었다. 백촌 강상호(1887년생) 선생이다. 국채보상운동 경남 책임을 맡았을 때, 스물 한 살이었다. 진주공립보통학교(진주초)의 학무위원이 된 건 스물 아홉. 그 무렵, 긴 가뭄과 대홍수가 지역사회를 초토화시켰다. 이웃들은 쌀독이 비어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백촌은 양친과 함께 곳간을 열었다. 그리고 동네의 가가호호에 부과되는 호세ㅡ주민세와 유사한ㅡ10년치를 대신 냈다. 거금이었다. 서른 살이었다. 4-50대 중견인사들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나 할 수 있는 일들을 그 나이에 농부들 벼 베듯 해낸 거다. 훗날 주민들이 백촌의 자당을 기려서 시덕불망비(施德不忘碑)를 세웠다. '베풀어주신 은혜 잊지 않겠다'는 착하고 아름다운 합창이다. "부족한 곳 누추한 마을 복전을 돌보아 농사짓게 해주시고, 천금을 바르게 쓰시어 많은 집이 돈을 얻으니 그 혜택이 산과 바다와 같으매 은덕이 높고 넓음을 돌에 새겨 잊지 않고 백세에 전하리라 1917년 가좌리 주민 일동" *복전(福田:복을 거두는 밭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가난한 사
1760년, 충청도 예산의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서녀였다. 여자아이가 공부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시대에, 완숙은 그 악조건에 굴하지 않고, 남자형제들 공부할 때 옆에서 성실하게 귀동냥했다. 훗날 학자들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 총명한 딸을 특별히 사랑했다. 용하다고 소문난 점쟁이가 사나운 팔자이니 재취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하여 부모는 결국 그 점괘를 받아들였다. 이내 향리에서 알아주는 양반집 홍씨네 며느리가 된다. 남편은 어린 아들 하나를 둔 사별한 홀아비였다. 독한 시집살이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에, 양반집 며느리로서, 또 전처소생에게는 계모로서, 완숙의 덕행은 완벽했다. 자신의 딸을 포함하여, 남편을 제외한 4인 가족은 완숙의 헌신과 지혜 덕에 참으로 좋았다. 그는 고품격이었다.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 행복은 짧았다. 모든 것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비극이 들이닥쳤다. 망국적인 파당정치였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 임금도 얼마든지 손을 볼 수 있었다. 노론 벽파가 자파세력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현군(賢君)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 그 한 사례다. 그와 같이, 당파싸움에 몰두한 패거리들은 정적이나 위협세력은 필요한 경우에 얼마든지 개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