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첫 회의에서 이윤영 의원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은 통일된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는 것을 참회하면서 민족의 통일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79년이 지난 오늘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미군정기에 있던 신탁통치론과 다른 것은 제1공화국의 농지개혁이다. 미군정기 3년은 대한민국의 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모색 과정이었다. 연합국은 1945년 2월 ‘얄타회담’과 12월에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결정하였다.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했고 남한에는 미군이 주둔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논의 하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각계의 여러 정파의 지도자들이 찬탁과 반탁으로 나누어져 서로 격론하다가 결국 신탁통치안은 거부되었다. 그 결과 남북은 각자의 정부를 가지게 되었고 한반도의 분단은 고착되었다. 한편 전후 유엔에서 관장하였던 14개국의 신탁통치국가들이 그 뒤 대부분 독립하여 단일한 국가를 유지하였다. 이를 미루어 볼 때, 그 당시 우리 지도자들의 통찰력있는
새해 극장가는 영화 '노량'으로 뜨겁다. 임진왜란을 종결하면서 적탄에 쓰러지는 이순신 장군과 병사들을 본다. 7년 전쟁의 피해는 참혹하다.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금 한반도에는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2023년 12월 노동당중앙위 8기 9차 전원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북남관계는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전쟁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완전히 고착됐다. 더 이상 한국을 '대화와 통일의 상대'로 여기지 않겠다. 종전 ‘우리민족 제일주의’는 ‘우리국가 제일주의’로 대체하고, 핵에는 핵으로 정면대결에는 정면대결로 하겠다"고 하였다.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었다. 그동안 우리의 대북기조는 ‘하나의 민족’ 위에 세워져 왔다. 한민족공동체, 분단체제, 통일은 대박이라는 것이 모두 그러하다. 1991년 9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1991.12.13.)에서도 남북한 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관계’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최근 남한 사회에서도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자는 소리가 고개를 든다. “북한과 헤어질 결심을 해야 평화가 온다”는 것이다. 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