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에포크(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대’라는 프랑스 말이다. 문학, 음악, 미술 등이 활짝 핀 19세기를 표현하는 말이다. 이 문화융성기를 주도한 건 단연 문학이었다. 쥘 베른,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보들레르, 모파쌍, 조르주 상드, 발자크, 플로베르, 스탕달. 이 뛰어난 작가들은 화가들, 작곡가들과 함께 모든 예술을 인류사상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이 중 스탕달(Stendhal)은 프랑스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가 쓴 ‘적과 흑’은 바깔로레아(대학입학자격시험)에 자주 등장한다. 이 소설은 사회의 모든 계층을 넘나드는 활기찬 개인주의자 줄리앙 쏘렐(Julien Sorel)을 통해 역사적 과도기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이전의 스탕달은 무명에 본명은 앙리 베일(Henri Beyle)이었다. 그렇담 스탕달이란 이름은 어디서 연유한 걸까. 스탕달은 베일로 살던 1807년과 1808년 프랑스 동부 라인강 하구의 빌헬민 그리에쉐임에 살았다. 여기서 가까운 곳에 독일의 저명한 고고학자이자 예술비평가인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고향인 삭사날(Saxe-Anhalt: 독일어 발음은 작센 안할트)이 있었다. 빙켈만을 존경했던 베일은 이 마을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20세기를 빛낸 찬란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울림이 있는 색상과 심플한 형태로 자기만의 화법을 개척했다. “예술가는 본능과 직감에 의해 이끌려야 한다”는 명제로 예술을 새롭게 창조한 마티스. 그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 북부 카토 캄브레시스의 외할아버지 댁이었다. 하지만 유년기를 보낸 건 외가에서 15킬로 떨어진 보엥 앙 베르망드아의 부모님 집이었다. 부친은 곡물과 그림을 파는 가게를 했고 모친은 아마추어 화가였다. 그가 자란 곳은 베틀을 짜는 직물염색공업이 발달했다. 마티스의 색감은 여기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마티스는 청년기까지 전혀 미술을 공부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법률보조인으로 일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 일에 전혀 흥미가 없었다. 스무 살 되던 해 그는 급성맹장염 수술을 받고 한 동안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 때 어머니는 그에게 화구상자를 주었다. 이는 정녕 신의 한수였다.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마티스는 인생의 재미를 느꼈다. 결국 직장을 접고 미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학창시절 마티스는 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낀 채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아~베`마리~~아(Ave Maria)!~’ 한국어로 번역하면 ‘안녕하세요 마리아님!’이다. 천사 가브리엘이 동정녀 마리아를 찾아와 예수를 수태한 사실을 알리며 건넨 인사라고 한다. 이를 모태로 슈베르트가 ‘아베마리아’를 작곡했고, 카치니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아름답고 손색이 없지만, 아베마리아는 역시 ‘구노의 아베마리아’가 으뜸이다. 이 곡은 천재 작곡가 샤를르 구노(Charles Gounod)가 1853년 바흐의 서곡에 가사를 넣어 만든 것이다.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진정되고 영혼이 맑아진다. 프랑스 그랑 오페라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 구노. 그는 1818년 파리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다섯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피아노 선생을 해 생계를 유지했다. 어린 구노는 어머니께 레슨을 받는 학생들 사이에 끼어 피아노를 배웠다. 그 후 파리음악원에 들어 가 앙뚜안 레이체의 지도를 받으며 화성을 공부했고, 스무 살 때 이미 로마 대상을 받았다. 구노는 초년기 종교음악에 몰두했다. 하지만 세속적 영감으로 눈을 돌렸고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가 첫 오페라 사포(Sapho)를 작곡한 건 1851년. 그로부터 5년 후 걸작 ‘파우스트’를 발표했다. 하지만
‘세상의 근원.’ 여성의 하체를 노골적으로 그린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걸작이다. 너무도 사실적인 이 그림은 오랜동안 초록색 실크 베일 뒤에 숨어 있었다. 세간을 놀라게 한 스캔들의 화가 쿠르베. 그는 19세기 프랑스 화가 중 가장 파워풀했다. 프랑슈 콩테 오르낭(Ornans)의 지주 아들로 태어난 쿠르베. 딸 부잣집의 장남이었던 그는 유년기 아버지의 농장에서 소를 치고 농사를 직접 지었다. 동네에 나가 산사람들과 사냥꾼, 어부, 나무꾼들과 어울려 놀기도 했다. 그가 미술을 시작한 건 초등학교 시절. 이 생활은 브장송 왕립학교에 입학해서도 계속됐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공학도가 되길 원했다. 뜻을 거역하지 못한 그는 공과대학 입학시험을 쳤다. 그러나 낙방했다. 진로를 바꿔 스무 살이 되던 해 법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파리로 상경했다. 그러나 법 공부대신 매일 그림만 그렸다. 자식 앞에 장사 없다던가! 결국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자기 길을 가도록 허락했고, 발 벗고 나서서 지원해 줬다. 너무도 자유분방했던 이 화가는 학교 대신 루브르 박물관을 좋아했다. 매일 거기에 나가 거장들의 그림을 복사해 연습했다. 쿠르베는 스무 살 때부
내 사랑, 내 누이/꿈꾸어보렴 거기서/단 둘이 사는 달콤한 행복을! 한가로이 사랑하며/사랑하며 죽을 것을/너를 닮은 그 나라에서!(...)/ 그곳은 모두가 질서와 아름다움/호사, 고요 그리고 쾌락(...). 잠자던 로망을 불타오르게 하는 시다. 너를 닮은 그곳에서 단 둘이 달콤한 행복을! 깊어가는 가을 몽상 속에 풍덩 빠지게 한다.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여행에의 초대.’ 시인은 애인과 함께 이상의 나라 네덜란드로 떠나 살고파 했다. 감각을 승화시키고 절대적 진실을 찾아 헤맸던 보들레르. 그는 파리 오뜨푀이(Hautefeuille)거리 13번지에서 태어났다. 스물여섯의 처녀 카롤린 뒤파이는 육십이 넘은 조제프-프랑수아와 결혼해 보들레르를 낳았다. 아버지는 그가 겨우 여섯 살 때 돌아가셨다. 어린 보들레르는 어머니와 함께 행복했다. 어머니와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을 함께 나눴고 이는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됐다. 자전적 시, ‘하얀집’에서 그는 여름날 어머니와 함께 보낸 뇌이쉬르센을 회상했다. 그런 어머니는 재혼했고 그때부터 보들레르의 인생은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대학 대신 시인의 길을 걸으면서 의붓아버지와 싸웠고, 결국 보들레르는
노을이 채색된 들판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감자를 캐던 젊은 농부는 모자를 벗어든 채 묵상을 하고, 두건을 쓴 그의 아내는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한다. 한 때 전 세계를 휩쓸었던 그 유명한 그림 ‘밀레의 만종’이다. 이 그림은 농촌의 목가적 풍경을 그린 밀레의 걸작으로 원제는 랑젤뤼스(L'Angélus), 즉 ‘삼종기도’다.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그는 농촌의 전원풍경을 그린 화가이기에 앞서 인간공학의 수호성인이었다. ‘건초 묶는 사람들’, ‘양털 깎기’, ‘양치는 소녀’를 그려 국제적 아이콘이 됐다. 그로 인해 농촌화가의 대명사가 됐지만 그의 진가는 이보다 더 거창하다. 1847년 프랑스는 불황이 덮쳐 집 없는 농부들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이 모습을 밀레는 ‘폭풍우의 피난처’에 담아냈다. 그 후 1년 뒤 파리 살롱전에 ‘키질하는 농부’를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하는 농부를 그림에 등장시킨 건 밀레가 처음이었다. 비평가들은 밀레의 정치적 관점과 농부들을 향한 연민을 감지했다. 밀레는 농민에 대한 그림을 더욱 발전시켰고 자신의 고향을 닮은 바르비종(Barbizon)에서 ‘파종’, ‘만종’, ‘이삭 줍는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프랑스 사르데뉴왕국(현재의 니스)에서 눈을 감았다. 니스 남서쪽 190킬로 지점에 있는 그의 고향 제노바. 지중해의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과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다. 이곳 부두의 하역인부였던 안토니오 파가니니(Antonio Paganini)는 가난한 여인 테레사 보시아르도(Teresa Bocciardo)를 만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를 낳았다. 칠삭둥이였던 파가니니. 병치레가 많고 허약했지만 아버지의 만돌린 소리를 들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니콜로가 다섯 살이 되면서 음악에 큰 재능을 보이자 안토니오는 그에게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아들의 음악교육에 큰 열정을 보였던 아버지는 바이올리니스트 지오반니 세르베토(Giovanni Cervetto)에게 아들을 보내 레슨을 받게 했다. 여덟 살이 되면서 파가니니는 소나타를 작곡했고, 열한 살이 되면서 성당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했다. 파가니니가 대중의 주목을 받은 건 그의 나이 열세 살 때. 1795년 여름 연 콘서트가 성공했다. 여기서 번 돈으로 파가니니의 아버지는 아들을 파르마로 보내 알렉상드로 롤라(Alessandro
프랑스인들의 추앙을 받는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그는 문학의 거성이었다. 짧은 생애 동안 수려한 소설을 100편 넘게 썼고, 주인공이 2000여 명 넘게 등장하는 그의 방대한 ‘인간희극’은 불멸의 전설이 됐다. 하지만 그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갔다. 1799년 파리 남서부 뚜렌(Touraine)에서 태어난 오노레. 그의 아버지는 22사단 식량관리인 베르나르-프랑수아 발싸였고 어머니는 장식끈 제조업자의 딸 안 샤를롯트-로르였다. 샤를롯트-로르는 열여덟 살 때 스물다섯 살 연상인 발싸와 결혼해 오노레를 낳았다. 쉰이 넘어 아버지가 된 발싸이지만 이상하게 아들에게 애정을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오노레는 14살 때 파리로 왔다. 이때 발싸(Balssa)는 파리지엥(파리사람)이 되려고 성을 발자크(Balzac)로 바꿨다. ‘오노레 드 발자크’는 이런 경로로 탄생했다. 발자크는 법무사가 되려고 법과대학에 다녔다. 그러나 졸업 후 작가로 방향을 틀었다. 험난한 길이었다. 희곡을 쓰는 족족 실패했고 빚더미에 빠졌다. 꿋꿋하게 글을 써 내려갔고 쉬지 않고 원고를 다듬었다. 책이 나오기까지 열일곱 번이나 출판사와 원고를 주고받았다. 주옥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선명한 색채로 사람과 동물을 섞어 환상적이며 신비한 그림을 수없이 그렸다. 그의 그림엔 아이와 여인, 꽃을 든 남자와 비둘기, 뛰어 오르는 염소와 아이들, 방긋 웃는 해님이 등장한다. 동심을 부활시키는 이 소재들은 우리의 맘을 녹여주고 꿈꾸게 한다. 20세기 프랑스에 귀화해 성공한 최고의 예술가 샤갈. 그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와 네오 프리미티즘 성격을 띤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동유럽의 유대인 마을 슈테틀과 유대전통, 그리고 러시아 민속학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샤갈은 러시아 비테프스크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식료품 가게를 했고 아버지는 시나고그에서 일했다. 다정한 어머니는 항상 아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며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르쳤다. 그림에 소질이 많은 샤갈은 일찍부터 데생을 공부했고 스무 살 때 생페테르부르크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레옹 박스트(Léon Bakst)가 연 프랑스 인상주의에 눈을 떴고 파리를 사모했다. 러시아의 반유대주의가 극성을 부리자 그는 스물세 살 때 파리로 피난 왔다. 이때 원래 이름인 모이슈 자카로비치 샤갈로프(Moishe Zakharovitch S
불멸의 작가 기 드 모파쌍(Guy de Maupassant). 그 역시 천재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신의 부르심은 너무도 빨랐다. 그가 생을 마감한 건 서른일곱 살 청춘. 하지만 100년을 살다 간 사람을 무색게 할 정도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첫 성공작 ‘비곗덩어리’부터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여자의 일생’, 그리고 파리의 불쌍하고 추잡함을 고발하는 ‘롱돌 자매’ 등 주옥같은 소설을 300편 넘게 썼다. 이 작품들을 통해 그는 다양한 인간군상과 그들의 대화, 시선을 섬세하고 애잔하게 표현했다. 이런 모파쌍의 탄생지는 특이하다. 그는 미로메닐 성(Château de Miromesnil)에서 태어났다. 노르망디 페깡(Fécamp)에 있는 이 성은 18세기 프랑스 법무재상이었던 미로메닐 공작의 소유였다. 백성을 사랑한 미로메닐 공작은 죽으면서 이 성을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했다. 모파쌍의 부모는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페깡시장과 주임신부에게 부탁해 이 성을 빌렸고 거기서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어린 모파쌍은 지극히 평범했다. 말이 없고 페깡의 바다와 항구, 선원들을 무척 좋아했다. 스포츠광에 자유를 만끽한 행복한 아이였다. 그가 페깡을 떠난 건 스무 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