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보건복지부와 중앙사회서비스원이 ’사회서비스 표준모델 공유화 사업‘ 추진을 위해 동부케어 등 ’거점기관‘ 3곳을 선정했다. 동 사업은 ’거점기관‘이 우수한 사회서비스 모델을 개발·표준화하고 이를 공유받고자 하는 기관에 제공하는 사업으로, 각 ’공유기관‘은 일정한 품질의 서비스를 신속하게 제공하는 프랜차이즈 방식의 장점을 살리면서 거점-공유기관 간 상생을 위해 합리적인 가맹비를 정하고 상호 협의체를 통해 민주적 의사결정을 하는 등 가맹사업 방식으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해 가는 구조이다. 전통적인 가족 구성이 무너지고 고령화사회 진입이 가속화되면서 국민들의 ’삶의 질‘과 관련한 이슈들이 지역공동체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커다란 관심사가 되고 있다. 사회서비스 품질 개선을 위한 서비스 통합과 고도화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점증하고 있어 정부와 민간을 아우르는 새로운 사회서비스 모델 개발이 필요한 상황이다. 복지부는 국민들이 전국 어디서나 고품질의 사회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거점기관‘을 확대 지정해 가고 ’거점기관‘을 중심으로 사회서비스 모델을 표준화·공유화함으로써 소규모의 영세한 ’공유기관‘(사회서비스 제공기관)까지도 적정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사회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해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전문기관들이 공통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통합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서비스 영역 간 정보교환이 쉬워지고 복합적인 문제들이 해소될 수 있다. 노인요양보호사, 장애인활동보조사 등 사회서비스 제공인력 자격제도 간의 연계성과 인력 이동성 또한 높여가야 하며 최저임금 수준에 머물고 있는 요양보호사 인건비 또한 현실화되어야 한다. 정부는 사회서비스 제공인력과 제공기관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지원을 위해 ’사회서비스품질관리법‘ 제정이나 ’사회서비스원법‘ 개정을 통해 제도 기반을 마련해 가고 있다. 사회서비스 고도화를 위해 제도 개선은 물론 다양한 정책개발이 필요하다. 많은 중산층 국민이 가입하고 있는 사보험의 보험료 일부만이라도 국민건강보험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한다면 국민 최대 사망원인인 4대 암은 물론 4대 유사암, 여성 4대 암 등 많은 국민들이 보다 높은 보장성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시설요양서비스에 앞서 장기요양 통합재가서비스의 품질 향상을 위한 제도 개선과 정책지원이 시급하다. 요양보호 대상 가족을 시설에 수용하는 방식의 시설요양서비스로는 성공한 사회서비스로 평가받기 어려우며, 효(孝) 사상에 기대어 부모를 모시는 자식들에게 몇 시간 도움을 준다는 정도의 돌봄지원 정책만으로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노인 등 장기요양이 필요한 사람이 시설이 아닌 집에서 요양서비스와 의료서비스를 받게 됨으로써 안정적이고 편안한 노후생활이 가능해진다. 요양 가족들이 일과 가정생활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조성과 정책지원을 통해 장기요양인들이 존엄케어와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마약 사범 폭증이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한 가운데, 초·중·고생 등 청소년 마약범죄가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한번 해보라는 꾐에 넘어가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마약상 역할까지 맡은 범법 청소년까지 등장할 정도로 아이들 마약범죄는 심각하다. 대검찰청 ‘마약류 범죄백서’에 따르면 청소년 마약 사범은 지난해 581명으로 2012년 38명에서 10년 만에 12.6배나 증가했다. 초·중·고등학교의 실효성 있는 ‘마약 예방 교육’ 강화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 한국은 더 이상 마약 청정국이 아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마약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마약에 손을 대고 있다. 특히 어린 10대 마약 사범은 큰 폭으로 늘고 있다. 지난해 검찰에 송치된 10대 마약류 사범은 역대 최대치인 450명을 기록해 드러난 범죄만으로도 10년 전에..
지난달 국가지정문화재의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범위를 500미터에서 200미터로 축소하는 내용의 ‘문화재보호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철회하라는 사단법인 화성연구회(이사장 최호운)와 사단법인 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연합회(회장 오덕만)의 성명서가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법률안은 지난 달 김영진 국회의원(수원시병, 더불어민주)이 대표 발의했다. 현재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의 범위는 원칙적으로 지정문화재의 가치와 주변 환경 등을 고려, 그 외곽경계로부터 500m 안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개정안은 지정문화재가 도시지역 중 주거지역 및 상업지역 안에 위치한 경우에는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의 범위를 지정문화재의 외곽경계로부터 200미터 안으로 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김의원은 제안이유를 통해 “지정문화재가 도시지역에 위치한 경우..
“제2경춘국도 가평고 학습권 침해 총동문이 똘똘 뭉쳐 막아내자!” 가평읍 내에 최근 걸린 현수막이다. 이에 앞서 가평고 교직원과 학생, 학부모, 그리고 입학 예정학생과 예비학부모는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가 심각하게 우려되는 이 도로의 설계를 변경해달라는 탄원서 서명 활동을 시작했다. 가평고 바로 옆을 지나가는 것으로 설계된 현 노선은 공사 중은 물론 공사 후에도 소음 및 분진으로 학습권의 심각한 피해를 만들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평고는 기숙사 운영고인데 도로는 기숙사 바로 옆을 지나는 것으로 설계돼 있다. 학생들의 야간 자기주도학습 및 숙면도 방해받을 것이다. 가평고는 매년 실시되는 대학 수학능력시험장 운영교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 수능시험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수능시험을 볼 때 소음이나 예기치..
단편 소설 '도둑맞은 가난'의 작가 박완서 선생이 살아 있다면 김남국 사태를 보고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자신의 시대에 있었던 특권층의 가난 코스프레는 코스프레로 명명하기조차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1975년에 발표된 소설은 부자들이 많은 걸 갖췄는데도 그것으로 부족해 가난까지 치장 품으로 두려는 세태를 비판한다. 미싱사인 화자는 도금 공장에 다니는 상훈과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동거에 들어간다. 그런데 상훈은 쥐꼬리만큼 월급을 받는 공장 노동자 답지 않다. 씀씀이가 헤픈 것이다. 미싱사는 상훈을 심하게 나무란다. 그러던 상훈은 한동안 잠적했다 나타나 자신을 대학생이자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소개한다. 가난을 경험해보라는 부모의 명에 따라 잠시 공장에 다녔다고 고백한다. 미싱사는 상훈의 말을 듣고 자신의 부모가 가난해지면서 부자에게 휘둘려 가족 네 명이 자살했던 절망보다 더한 절망을 느낀다. 그녀는 소설에서 백미로 꼽히는 혼잣말을 한다.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해 본 일이 없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이런 70년대의 가난 코스프레는 김남국의 명품화한 가난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부잣집 아들이 밑바닥 삶을 경험하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는 것은 애교 수준인 까닭이다. 그런 체험은 한편으로는 장려해야 하는 일인 지도 모른다. 그런데 국회의원 김남국은 아예 자신을 가난한 사람으로 연출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찢어진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가난을 내세워 후원금을 모으는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상 화폐 사건으로 김남국의 가난은 새빨간 거짓으로 밝혀졌다. 수십억 원대, 1백억 원대 자산가가 아니고는 그의 투자 규모를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FIU(금융정보 분석원)이 검찰에 통보했겠는가. 돈세탁 방지 사정 조사 기관인 FIU가 의심이 되어 검찰에 수사의뢰를 하는 경우는 고작 0.18%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는 김남국이 거액의 수상한 돈을 떡 주무르듯 했다는 방증이다. FIU라는 기구가 없었다면 정치인 김남국은 탄탄대로를 밟았을 게 뻔하다. 가난한 정치인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불철주야 불사르는 진보적 정치인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인물의 등장 자체는 금권의 한국 정치사에서 초유의 대사건일 것이다. 뛰어난 현실 정치인이었던 김대중과 노무현을 간단하게 뛰어넘는. 부유층이 진보를 부르짖는 이른바 강남 좌파나 브라만 좌파, 리무진 리버럴과 김남국은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내세우지만 자신들을 가난한 자로 은폐한 적이 없는 반면에 김남국은 아예 자신을 가난한 자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초선인 김남국이 각광받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난을 명품으로 발명한 대가라면 대가인 셈이다. 우리 시대를 탈진실의 시대라고 말한다. 사실과 진실보다는 거짓 프레임, 진영주의가 인간 뇌의 한계인 확증 편향을 노골화해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김남국의 명품 가난은 그 눈부신 성과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탈진실을 녹이는 백신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상비약으로 주머니에 넣고 다닐 일이다. 의심이라는 백신을.
그림을 보며 음악을 떠올릴 때가 있다. 미치도록 좋아하는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1882-1967)의 그림을 보면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Gymnopedies)가 흐른다.(느껴진다) 옛 그리스어로 ‘벌거벗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인 짐노페디는 슬픈가락이나 어둡지 않고 단음 선율인데 불협화음이 느껴진다. ‘고독’만으로 말해질 수 없는 호퍼의 그림을 부연해준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서 ‘브람스 4개의 소품 op.119 중 1번 인터메조 b단조’를 듣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브람스와 호퍼의 저주받은 사랑. 스승의 아내를 평생 짝사랑한 브람스의 사랑 이야기는 모르는 이가 드물지만, 호퍼의 사랑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살았을 때도 슬펐던 사랑이 후세에 더 슬프다. 호퍼가 살던 시대의 미국은 어떤 곳이었나. 19세기 후반의 미국은 거대한 땅덩이, 천혜의 넘쳐나는 자원, 그리고 프론티어 정신으로 거세게 용틀임했다. 유럽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세계 1,2차 대전으로 망가지고 있을 때 대서양 건너편에 있던 미국은 공업국, 산업국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호퍼는 1920년대의 대공황 혼란기에서 급속도로 발전한 미국, 그것도 미국의 심장부 뉴욕에 살며 도시화 과정의 편린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가슴을 친 것은 도시의 발전상이 아니라 그림자들이었다. 그의 그림을 나타내는 단어, 고독, 상실, 소외등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림의 상징으로 따라다녔다. 그의 그림은 ‘도시와 고독’ 두 단어로 설명된다. 지난 주, 뉴욕 휘트니 미술관과 공동 기획으로 전시 중인 서울 시립 미술관의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를 관람했다. 관람객들의 실망의 소리를 미리 듣고 왔다. 호퍼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1942년작/Nighthawks)’이 빠졌다느니, 호퍼 자신이 흑역사라고 한, 호구지책으로 그렸던 삽화 전시가 다수라느니, 하는 투덜거림이었다. 그러나 나는 호퍼의 1914년작, ‘푸른 저녁(Soir Blue)’을 본 것만으로 배가 불렀다. 어둠이 내리는 파리 카페의 한 쪽 귀퉁이 풍경을 그린 것으로 손님 등 7명의 사람이 나오는데 가운데 앉아있는 흰 옷의 피에로가 눈에 확 들어온다. 호퍼, 자신을 그린 것이다. 압권이다. 화장은 이목구비와 표정을 지운 게 아니라 슬픔을 덮었다. 그래서 더 슬프다. 호퍼는 청춘시절, 파리에서 만난 한 여인을 10년 넘게 짝사랑했으나 버림 받았다. 그 후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보는 걸까. 중국영화 ‘패왕별희’에서 평생 시투를 사모했던 두지(장국영분)가 시투의 결혼 후 버림받고 지은 표정이 겹쳐지자 100년 전 그의 감정이 전이돼 심장을 누른다. 브람스는 (앞에 언급한) 음악을 1893년, 클라라 슈만에게 선물하며(그것도 자신의 생일에) 이렇게 말했다던가. ‘각 음표와 각 마디는 마치 리타르단도처럼, 각 음표에서 고독감을 이끌어내는 것처럼 가슴에 와 닿아야 합니다’ 브람스의 사랑을 모르면 '고독'이란 단어는 오독된다. 호퍼 그림을 장악하고 있는 '도시와 고독'도 마찬가지. '푸른 저녁'의 도시와 고독은 호퍼의 사랑을 알아야 읽을 수 있다.
여야 정치권이 교사의 교육권을 박탈하는 무고성 아동학대 신고를 막는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소모적 정쟁에 매몰되어 민생을 등한시 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국회가 모처럼 제 역할을 하고 있다. 향후 입법과정에 대한 기대가 크다.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2001년 개봉된 영화 ‘친구’에서 담임 선생 역을 맡은 김광규의 명대사이다. 5공화국 시절 바닥을 기는 학생 인권, 그리고 체벌을 당연시하는 폭력교사의 모습과 불량 학생들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그 시절 학교생활을 했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거나 목격한 한국 교육현장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어 우리들 뇌리에 각인시켰다. 1987년 6.10민주항쟁 결과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이에 발맞추어 교육현장에서도 무소불위에 가깝던 교권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서 학생인권..
1760년, 충청도 예산의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서녀였다. 여자아이가 공부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시대에, 완숙은 그 악조건에 굴하지 않고, 남자형제들 공부할 때 옆에서 성실하게 귀동냥했다. 훗날 학자들도 놀라게 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그 총명한 딸을 특별히 사랑했다. 용하다고 소문난 점쟁이가 사나운 팔자이니 재취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 하여 부모는 결국 그 점괘를 받아들였다. 이내 향리에서 알아주는 양반집 홍씨네 며느리가 된다. 남편은 어린 아들 하나를 둔 사별한 홀아비였다. 독한 시집살이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에, 양반집 며느리로서, 또 전처소생에게는 계모로서, 완숙의 덕행은 완벽했다. 자신의 딸을 포함하여, 남편을 제외한 4인 가족은 완숙의 헌신과 지혜 덕에 참으로 좋았다. 그는 고품격이었다. 부부 사이는 좋지 않았다. 행복은 짧았다. 모든 것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비극이 들이닥쳤다. 망국적인 파당정치였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 임금도 얼마든지 손을 볼 수 있었다. 노론 벽파가 자파세력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현군(賢君)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인 것이 그 한 사례다. 그와 같이, 당파싸움에 몰두한 패거리들은 정적이나 위협세력은 필요한 경우에 얼마든지 개돼지 잡듯 잡아죽였다. 그들에게 나라와 백성들은 "회쳐먹고 찜쳐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먹는" 먹거리일 뿐이었다. 안전하고 부강하고 덕이 넘치는 나라로 발전시킬 능력도 비전도 없었다. 자존심 팽개친 거지처럼, 또는 시시하고 위선적인 왈패처럼 개인의 영달과 당파의 이익을 탐할 뿐이었다. 천주교가 정치의 뜨거운 재료로 등장했다. 초기에 서학(西學)이라고 불린 데서 알 수 있듯이 서양에서 전래된 신학문으로 여겨졌다. 조정에서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서학은 천주교로 옷을 갈아입는다. 성리학의 세상에 그 대칭의 세계관이 등장한 것이다. 평등주의와 내세관이 핵심사상이었다. 임진ㆍ정유 8년 전쟁에 이어 끝도 없이 지속되는 내우외환의 조선은 "평생 백 가지 질환으로 숨을 헐떡거리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중환자"(임경업 장군 어록)였다. 지배층의 권위가 무너진 상태에서 천주교는 그 마력적인 교리로 기층민초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완숙은 어려서부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스무살이 되기 전에, 비구니 학승들이 사는 절에 들어가 삶의 의미를 멈춤 없이 따지며 깊이 파고 들었다. 1년 후, 만족하지 못한 채 하산했다. 그리고, 결혼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의 전교능력은 탁월했다. 공맹사상에 조예가 깊은 점이 주효했다. 그는 '윤지충 패륜사건'(부모의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태웠음)으로 발발한 신해박해(1791년) 때 감옥에 갔던 교우들에게 음식을 해나르다가 첫번째 옥고를 치른다. 출옥 후 남편과 헤어지고 시어머니와 아들 딸과 함께 서울 회현동으로 이사하여 본격적인 전교활동을 펼친다. 조선은 2천년 천주교 역사를 통틀어 여러 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선교사가 파견되기 전에 교세를 갖추고, 그 교도들이 선교사를 갈급히 요청하여 성사된 나라라는 점이다. 1호 선교사 주문모 신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밀입국한다. 1794년 12월이었다. 신해박해의 여파로 주신부의 선교활동은 살얼음판 행각이었다. 밀고로 통역 최인길, 측근 윤유일과 지황이 끌려가서 신부의 소재에 관한 심문에 함구하다가 장살(杖殺:매맞아 죽음) 당하자 이혼과부 완숙이 신부를 자택에 은닉했다.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물경 6년이었다. 정약용 채제공 등 남인 출신 인재들과 높은 팀웍으로 개혁정치를 펼치던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었다. 그가 죽은 것(1800년)이다. 열살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 순조다. 소년은 정순왕후(영조의 후처)의 컨트롤을 받는 꼭두각시였다. 노인은 "천주교는 사론(邪論)이다. 씨를 말리라"는 어명을 선포한다. 이것이 신유박해다. 그 조치는 다섯 집가운데 한 집에서 천주교도가 나오면 모조리 처벌하는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핵심이었다. 전국을 감시와 밀고의 지옥으로 만든 것이다. 이로써 정약종 이승훈 이가환 이벽 등 선구자들 100여명이 참수되고, 평신도 400여명이 사형당했다. 주신부는 이 위험천만한 시기에 그를 최초의 여신도 회장으로 임명했다. 능지처참 당한 황사영은 백서에 "조선의 카톨릭 역사에서 강완숙의 공을 따를 사람은 없다"고 썼다. 그는 여섯 차례의 주리를 트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의연했다. 형리들은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아들 필주도 같은 고문을 당하면서 배교의 기미를 보이자, 내세를 포기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모자는 함께 참수당했다. 주문모 신부는 국경까지 도피했으나, "네가 지금 어디로 가느냐.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한양으로 돌아가서 "내가 당신들이 찾는 그 신부다"며 자수하고 참수당했다. 이 나라의 종교단체들은 좋게 말하면 상업기관이고, 정확히 말하면 사기집단이다. 물론 소수의 예외는 있을 것이다. 천주교는 그 엄중하고 피빛 찬란한 역사의 연장선에 있는가. 강완숙 골롬바의 크기와 높이, 깊이를 기대한다.
경찰관에게 단골손님은 누가 뭐래도 주취자들이다. 코로나 방역이 완화된 후로는 치안현장에서 주취자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 연일 뉴스를 장식한다. 경기남부경찰청의 경우, 올해 1분기 기준 주취자 관련 112신고는 3만 5000여 건으로 작년과 비교할 때 32% 가량 늘었다. 경제사정이 어려워서, 가정사 때문에 등등 다들 저마다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다. 잠시나마 술기운에 기대 퍽퍽한 삶의 괴로움을 달래려던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렇지만 신고를 받고 현장에 나간 경찰관들은 참을 인(忍) 자를 연신 되새기며 어려움을 참아낸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지”, “한 번 쯤은 그럴 수도 있지”라며 유난히 음주에 관대한 문화 탓일까. 사실 주취자 문제는 어제 오늘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장에서 주취자들과 줄다리기를 하듯 끝없는 실랑이를 하며 소모되..
미래는 알 수 없다. 천억 원을 넘게 들여 만든 슈퍼컴퓨터로 몇 시간 뒤의 날씨 예측하는 것을 자주 틀리고,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몇 분 뒤에 영영 이별하는 일이 생기는 걸 알지 못한다. 한 치 앞을 모르고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 만들어가기 나름이다. 앞날이 정해져 있다면 지금보다 삶의 재미가 덜 할 거다. 몇 초 뒤 일어날 일조차 모르지만, 미래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분야가 존재한다. 바로 ‘인구’다. 작년에 아이가 몇 명 태어났는지는 10년, 20년 뒤 한국의 모습을 정확하게 말해준다. 최근 출생률이 1 아래였으니 당연한 수순으로 미래에는 인구가 줄어든다. 청년 비중이 적고 노인이 인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초고령화 사회 돌입은 필연적이다. 지구상에 이렇게 아이를 적게 낳는 나라는 한국뿐이라 미래 모습을 참고할 나라도 없다. 대치동에서 사교육 시장을 개척했던 메가스터디 손주은 회장은 학령인구 감소로 사교육 시장의 붕괴를 예측했다. 시기는 머지않아 10여 년 뒤쯤이다. 아이가 점차 사라져서 36년 즈음부터는 서울권 대학도 미달이 난다고 말했다. 손주은 회장이 대치동에서 이름을 날렸던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전략적 대입 지원이었다. 당시 서울 명문대 중 어느 대학이 미달 날지를 분석, 예측해서 자신의 학생들에게 전략적으로 원서를 내게 했고, 그게 적중했다. 이번에도 맞출지 궁금할 따름이다. 현재는 대학들이 벚꽃 피는 순서대로 어려움에 부닥치는 중이다. 남부 지역에 있는 대학들부터 학생 정원을 채우지 못하기 시작했다. 전통의 명문대라고 불리던 부산대, 경북대도 학생 급감에 직면했다. 아직 입학 학생이 미달되는 상황은 먼 나라 일이라고 생각하는 수도권 대학들도 머잖아 남부권역 대학들처럼 될 것이 자명하다. 서울권 대학이 학생을 다 채우지 못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대학 입시가 고등학교 입시처럼 바뀔 가능성이 생긴다. 명문이라고 불리는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어린 시절 내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더 많다. 공부를 좀 덜 해도 집 근처 고등학교에 가는 건 무리가 없다. 대학은 다르다. 중하위권 고등학생들에게 인서울 대학에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붙여만 준다면 열심히 다니겠다던 고등학생 친구들을 여러 명 봤다. 그 친구들이 십 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바라는 대로 대학을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초등학생 자녀를 키우는 친구들과 서울권 대학 미달 이야기를 나눴을 때 모두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보고 배운 게 학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 시험을 치는 것뿐이라 다른 걸 생각하기 어렵고, 미래가 불안해서 지금처럼 사교육으로 기본을 열심히 다져놔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아이들이 노는 걸 좋아하지만 마냥 놀리면 바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오늘날 학교 교육이 대학 입시에 맞춰서 돌아가고 있다면 10년 뒤부턴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릴 가능성이 생긴다. 학생들과 학부모의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는 장기 비전을 학교에서 제시할 수 있을까. 사교육 없이 학교에만 보내도 아이가 바보로 크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까. 정해진 미래를 앞두고 백년지대계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