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정권이 하루가 멀다하고 미친 X 널뛰듯 핵무력을 과시하고 있는 가운데, 이에 맞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공포의 균형’으로 일컬어지는 핵무장론이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타부로 여겨져 온 ‘핵사용 전략’을 구체화하고, 선제핵사용 독트린마저 폐기한 북한을 상대로 우리가 취할 궁극의 수단이기도 하다. 더욱이 국제적 핵질서의 조정자역할을 해왔던 NPT(핵확산금지조약) 거버넌스는 핵보유국, 특히 러시아가 비핵국을 상대로 핵위협을 노골화함으로써 균열조짐도 보이고 있다. 그간 우리는 NPT 체제를 최대한 존중하고 핵무기 개발보다 IAEA의 사찰 등을 적극 수용하면서 평화로운 핵이용에 앞장서왔다. 그러나 지난 8월 뉴욕에서 4주간의 토론에도 불구, 최종문서도 도출하지 못하고 끝난 NPT 10차 평가회의는 NPT 존속의 당위성에 의문을 더한다. 여기에다 1995년 25년간 한시적 존재키로 했던 NPT를 영구연장키로 한 ‘NPT 영구연장’은 비핵국과 핵보유국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영구연장 이전에는 핵보유국의 핵비확산 요구와 비핵국의 핵군축 요구가 대체로 균형을 이루었지만, 이후에는 핵비확산 의무가 더욱 강조되었다. 핵보유국은 더 이상 비핵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비핵국에게 강화된 안전조치와 핵안보를 요구했다. 동시에 비핵국이 요구하는 ▲핵군축 의무 이행, ▲강제력 있는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 제공,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확대 등에는 소극적으로 대했다. 북핵문제에 대해 핵보유국과 비핵국의 입장 차가 없이, 한 목소리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촉구,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추진, ▲북한의 NPT와 IAEA 복귀에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점은 작은 결실이다. 한편 북한의 핵위협 강도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음에도 순진한 ‘평화타령’이 고개를 들고 있다. 말로만 평화가 오지 않고 국방력을 갖추지 못한 나라가 얼마나 처참하게 당하고 있는 지를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목도하면서도, 일부 진보세력들은 ‘평화타령’을 외친다. 북한 김 씨 정권이 남한국민들의 전쟁 회피심리와 거짓 평화공세를 이용하여 차근차근 핵고도화를 해왔고, 이제 발등의 불이 되었는데도 ‘시급한 평화의 입구’를 찾아야 한다며 공자같은 말을 뇌까린다. 그러나 우리는 ‘공포 속 평화’를 지켜왔고 이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도 체득하고 있다. 섣부른 평화타령은 금나라와 요나라의 압력에 굴복하여 황금과 비단, 여자를 바치며 ‘굴욕적인 평화’를 갈구한 중국 송나라를 연상케 한다. 그 후 송나라는 항구적 평화를 얻었는가?. 우리의 생존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미국이 지켜주지 않는다. 당장 한미 핵공유 방법을 위한 협상에 나서고, 언제든지 핵무기를 만들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 호주가 영국의 도움으로 핵잠수함을 건조키로 한 것과 폴란드가 미국에게 전술핵 배치를 요구한 것 등은 반면교사가 된다. ‘안보문제의 정치화’는 집권여당도 해선 안 되는 일이지만, 야당 역시 ‘안보문제의 정치화’에 앞장서온 것은 아닌지 곰곰이 되새겨 볼 시점이다.
자본주의 상징인 미국 뉴욕에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OWS)’는 시민 시위가 있은 지도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2011년 9월 ‘고학력 저임금’ 세대가 시작한 일종의 계층 투쟁이었던 OWS는 그 후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SNS를 통해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16년 10월 시작된 광화문 촛불 집회는 누적 참여 인원 1600만을 넘어서면서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 내었다. 세계 최초로 평화 시위에 의한 정권 ㅛ체의 무혈혁명이다. 군사정권의 맥을 이어온 새누리당은 적폐 정당으로서 와해 되었고, 19대 대선 패배를 통해 민주당 정권이 등장했다. 이런 흐름은 21대 총선까지 이어져 민주당의 역대급 국회 의석 확보로 나타나, 사회개혁을 위한 행정부 및 의회 권력을 확보했다. 이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지금도 여전히 1%는 기득권을 이용해 배를 불리고, 코로나19는 양극화를 더욱 심화되었다. 심지어 촛불 시민은 지난 대선에서 쫓아냈던 적폐정당의 재집권마저 목격하게 된다. 적폐 정당에 기반한 검찰 독재정권의 출범이었다. 그동안 힘들게 전국에서 서울로 집결했던 촛불시민들의 열망과 기대는 결과적으로 헛수고가 되었다. OWS 당시, ‘슬라보에 지젝’이 조심하라고 말했던, 맥주나 마시면서 "아! 우리는 젊었지, 그리고 그땐 참 아름다웠지"라는 추억 속에 무기력하게 전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모여 촛불을 들고 있다. ‘촛불행동’이 주체가 되어 시작한 새로운 시민 집회는 시작한 지 1년이 지나면서 이번 주 토요일 첫 전국 집결시위를 예정하고 있다. 광화문 촛불과 서초동 촛불에 이어 또다른 전국 규모의 3차 촛불 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셈이다. 이제 우리는 전 세계로 확산된 OWS와 무혈 정권교체를 이룬 광화문 촛불과 검찰개혁의 서초동 촛불 집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비록 그동안의 촛불시위가 남긴 정신적, 문화적 영향은 분명하지만, 촛불시위에 동참했던 이들 마음 안에 ‘해도 소용없다’는 일종의 자괴감 내지 패배감으로 작동한다. 이제 새로 시작되는 3차 전국 촛불시위가 사회변화의 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실패로 끝난 기존 촛불시위로부터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한다. 당시 시민들은 행동으로 의사표시는 했으나, 구체적 현실 변화는 기존 정치인들에게 맡겼다. 결국 현실이 변하지 않은 것에는, 정치 특권층의 부패나 탐욕의 문제가 아니라, 적폐 세력이 만들어 놓은 기존 체제와 제도라는 구조적 틀을 바꾸지 못했던 것이 크다. 촛불시민들이 새로운 정책이나 제도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정치 주체로 역할하지 못했기에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국민이, 촛불을 든 시민이, 적폐 청산을 통해 현실을 바꾸려면 단지 시위나 집회로 끝날 것이 아니라 정치적 주체로 굳건히 서야 한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대의민주주의는 바람직하지만, 적폐로 물든 사회에서 대의민주주의는 오히려 장애물이다. 광화문과 서초동 촛불의 맥을 잇는 제3차 촛불 집회가 다양한 열린 제도와 체제를 제시할 수 있는 주체적 시민의 모습을 만들어 냄으로서 진정한 사회 변화 가능성과 실천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숙제이자 미래세대에 대한 책무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유랑 가요의 고전은 태평레코드사에서 1940년 10월 발매한 음반으로서 ‘산 팔자 물 팔자’와 뒤를 이은 ‘번지 없는 주막’이란 노래이다. 이 노래는 1940년의 대표곡이요 히트곡으로써 백년설이 불렀다. 이 가요는 해방이 되고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다니던 1960년대까지 불러졌다. 내 기억의 저장고에 기록된 내용의 가사를 보자면, ‘산이라면 넘어주마 물이라면 건너 주마 / 인생의 가는 길이 산길이냐 물길이냐 / 그님도 짝사랑도 풀지 못할 내 운명 / 인심이나 쓰다가자 사는 대로 살아보자’ 이다. 나는 인천에 사는 매형의 회갑 때 이 노래를 불렀다. 많은 사람이 산길인가 물길인가 하면서 지치고 힘들어 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도 그랬다. 산길인지 물길인지, 번지 없는 주막에서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다시 걸어야 했다...
1.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으니 어린 나이라도 자잘한 추억들이 남아 있을 법하다. 그런데도 몇 가지 파편 외에는 이상할 정도로 머리속에 남아있는 게 없다. 그중 하나. D시 달성동 329번지, 한옥 집 대청마루. 어느 봄날의 오전이었을 게다. 동쪽으로 네모난 창에서 비쳐든 햇살이 마루 저쪽까지 길쭉하니 하얀색 꼬리를 빼물고 있었으니. 양철 바케스 안에서 자라 서너 마리가 숨을 들이마시느라 뻐끔대며 물 위로 코를 내밀던 장면이 떠오른다. 한참동안 아팠다가 회복된 나를 위해 자라를 잡았던 모양이다. 어여 마셔라, 크고 하얀 사기 대접에 넘치는 생피의 비릿함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나는 꾸역꾸역 그걸 다 마셨다. 그렇게 해야 어머니가 좋아할 것을 아니까. 가톨릭계 사립인 H초등학교 입학 추첨에서 떨어진 날도 기억이 난다. 바람이 무척 매서운 날이었다. 추위를 피해 성당 건물 한 켠 양지바른 곳에서 손을 잡고 기다리다가 잘못된 ‘은행알’ 골랐다는 최종 발표에 그만 울어버렸다. 그리고 입학한 동네 근처 S초등학교 입학식 날. 왼쪽 가슴에 핀을 꽃아 늘어 맨 손수건이 조금 비뚤어졌던가 보다. 어머니는 군청색 한복 두루마기 자락을 옆으로 젖히더니 무릎 꿇고 앉아 내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는 조용히 웃으며 손수건을 고쳐 매주고는 자꾸자꾸 머리를 쓰다듬었다. 2. 내가 태어날 때만 해도 우리 집은 사업이 잘 나갔다. 한 때는 논산훈련소의 3개 연대에 부식을 모두 제공할 정도로 납품사업 규모가 컸다 한다. 누이들은 회상한다. 그렇게 집안을 일으킨 것은 어머니였다고. 사업이 기울어지고 정처 없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 기점이었다. 아내의 부재가 주는 정신적, 사업적 타격을 극복하고 일어설 방도가 아버지에게는 없었던 게다. 어머니는 다정하고 눈물이 많았다. 한겨울 깡통 두들기는 거지를 기다리게 했다가 굳이 뜨거운 밥을 주곤 했다. 손위 외삼촌과 배다른 손아래 외삼촌 3남매였는데 친정 조카들에게 그렇게 극진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외갓집 사촌들이 나에게 참 잘해주었다. 약국 하는 큰 형, 건설회사 다니던 둘째 형은 물론이었다. 셋째 형이 의사였는데, 사춘기 시절 우리 집이 형편무인지경이 되었을 때 나를 만나면 (당시로는 거금인) 2, 3만 원씩을 용돈으로 주고는 했다. 갓 전문의 딴 상황에서 형에게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을 텐데. 그저 고맙다는 생각뿐이었지 왜 이리 잘해줄까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 그 마음이 짐작이 되었다. D시는 유도가 유명했다. 일제 강점기 도쿄 강도관에서 배운 사범들이 해방 이후 깊고 넓게 무도의 뿌리를 내렸다. 외삼촌은 그 도시 유도의 전설 중 한 명이었다. 고 신도환 신민당 국회의원과 함께 한국 유도협회에서 사후 명예 10단에 추존한 당시까지 둘 뿐인 사람이었으니.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안병근과 김재엽이 대를 건넌 제자였다 한다. 워낙 실력이 출중해서 사범으로 많은 곳에서 초빙을 받았지만 수입은 언제나 변변치 않았다. 그 봉급으로 6남 1녀를 키우고 가르쳐야 했으니 오죽했을까. 그런 사정을 알고 어머니가 외삼촌을 대신해서 외갓집 남매 중 위의 세 형들한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대학 학비와 용돈을 다 대셨다는 게다. 그제야 어머니가 세상 떠나고 난 다음 군대 휴가 온 둘째 형이 자기 집보다 우리 집을 먼저 들러 그렇게 서럽게 울던 모습이 이해가 되었다. 형들에게는 그런 고모의 마음이 사무쳤던 것이다. 3. 어머니가 돌아가신 나이보다 이미 나는 십몇 년을 더 살았다. 어머니 꿈을 꾸지 않은지도 까마득히 오래되었다. D시를 비껴 흐르는 금호강 다리 옆에 집안이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사찰이 있다. 20여 년 전 선산을 정리하고 묘를 이장하면서 큰 시주를 했다. 그곳에 지금까지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8월이 되면 형님 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함께 모시는 제사 지낸 후 절을 찾는다. 설과 추석 명절 때 차례 지내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각지에서 모인 스무 명 넘는 자식과 손주들이 위패 앞에 엎드려 재배를 드린다. 나는 절을 하며 극락왕생을 외운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되풀이하는 말이 있다. 어머니 아버지, 그곳에서는 부디 이생에서 한 시도 놓지 못했던 자식들 걱정 내려놓으시라고. 활짝 피어난 꽃처럼 평온한 휴식만 누리시라고. 10월의 가을 하늘은 뭉게구름을 안고 푸르기만 하다. 마흔일곱의 이른 나이에 가셨으니 어머니는 하늘나라에서도 여전히 고우신 모습을 간직하고 계실 게다. 평생을 노새처럼 짊어졌던 책임감을 훌훌 털어버리고. 아내를 보낸 후 33년 세월을 넋을 잃고 흘러 보낸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경기도의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 불법행위 적발 건수가 전국 최다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원상복구를 강제할 수 있는 근절책 등이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권 그린벨트 훼손은 개발 호재를 기대한 투기 성행에다가 선거로 뽑히는 자치단체장 등 정치인들이 표심 이탈에 대한 우려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약점도 작용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무엇보다도 엉성하기 짝이 없는 관련 법·규정들을 대폭 손질해 단속 강도를 높여야 한다는 여론이다. 2017년 1월~2022년 6월까지 최근 5년여간 전국의 개발제한구역 불법행위 총 적발 건수는 3만631건이다. 이 중 경기도가 1만8348건으로 전체의 59.9%를 차지해 가장 많다. 경기도에서는 2017년 1974건, 2021년 3794건이 각각 적발됐다. 5년 사이에 2배가량 증가한 셈이다. 이 같은 사실은 국회 행정안전..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속삭이듯 들려오는 한 줄 글에 살아갈 힘을 얻는다. 얻고 잃음의 반복이지만, 가을에 부디 아프지 말라고 시가 위로를 건넨다. 점점이 붉어지는 단풍을 보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고, 웃고 있을 사람을 생각한다. 수고로이 얻은 성과를 자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만큼 가을은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다. 10월의 단풍을 아니 보고도 가을을 보냈다 할 수 없다. 쫓기는 원고에 매달려 풍경을 잃어버릴 즘 오랜만에 생각나는 지인에게 살뜰한 전화를 건네면 이미 좋은 곳을 찾아 휴일을 즐기고 있다. 아직 번듯한 명함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면 말이라도 공손할 일이다. 감질 거리는 생각한 줄 쓰려고 무수한 날이 필요하겠지만 잊는 것도 순간이다. 떠나려고 단풍은 저리도 몸서리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여기까지 올 수 있다. 부디 아프..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너의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 장범준이 부른 “멜로가 체질”의 OST 다. 나영석 PD가 “신서유기” 후속으로 새로 기획한 ”뿅뿅 지구 오락실” 이 방송되자마자 화제다. “신서유기”도 튀었지만 이번 출연자는 래퍼 이영지가 2002년생, 아이돌 그룹 바이브의 안유진이 2003년생 등 M세대의 막내 1명과 Z세대의 3명으로 구성되었다. 영지와 나PD 간에 벌어지는 티티카카는 X세대와(나영석) Z세대의 차이를 절로 느끼게 한다. 영지에게 놀림받느라 영석이 형 매우 고달프다. “지금 몇 년 차인데 그래… 옛날 사람이구나” 독일 사회학자 만하임이 말한 존재의 사유 구속성이란 개념이 있다. 인간의 사유방식은 그 사람이 놓여 있는 시공간적 구조, 경제구조 등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말이다. 세대가 다르면 각 세대별 존재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사유도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샴푸는 럭키화학이 1976년 발매한 “유니나”다. 그 이후 나온 허벌 샴푸, 창포 샴푸, 홍삼 리앤 샴푸 등 모두 자연의 향을 담기 바빴다. 그런데 웬걸? 꽃들 속에 너의 샴푸 향이 느껴진대. 베이비부머 세대와 X세대는 자연의 향을 제품에 옮겨오는데 열중하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던 세대다. 시골에서 올라와 도시에 정착한 베이비부머 세대와 달리 Z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도시에서 쾌적하고 편리한 삶을 살았다. 그들이 취하는 가치는 과거처럼 자연이 아니다. 내게 편안한 이 생활패턴이 깨지는 게 싫다. 이런 존재의 사유 구속성으로 말미암아 꽃들 속에서 샴푸 향이 느껴지는 언어의 도치가 일어난 것이다. 물론 기성세대 입장에서 보는 언어의 도치지만. 요즘 프로그램 중에서 장르별로 보면 교양 다큐가 몰락한다. MZ세대의 시청률이 거의 없다. 이 세대는 프로그램이 계도적이고 가르치려 드는 걸 싫어한다. 공감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질은 떨어지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이야기해주는 유튜브를 찾는다. 척박한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경쟁하며 살아온 베이비부머 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제품 나오고 이를 알리기 위해 광고와 다양한 이벤트를 하는 게 일반적 프로세스다. Z세대 소비층을 대상으로 미디어커머스를 하는 블랭크 코퍼레이션이란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우리가 아는 상식과 반대다. 고등학생 간지 대회(고간지)를 개최하고 여기서 10대 패셔니스트를 선발한다. 이들에게 맞는 패션 브랜드를 만들어주고 비즈니스화 한다. 그래도 잘 팔린다. 정말 다르다. 방송 프로그램은 대중문화의 결집체다. 사회상 과시대의 트렌드가 녹아있다. 트렌드는 시청자 개개인의 바람과 욕망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 것이다. 고재열 여행감독은 캠핑 예능, 차박 등의 프로그램을 보면서 “여행 예능이 구현하려는 것은 자연이 주는 감성은 즐기되 도시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망, 그래서 여행 예능의 근간에는 도시 옮기기 게임이 깔려있다.”라고 분석한다. “나는 자연인이다”는 오지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삶을 소개하는데 시청자는 중장년층이다. “바퀴 달린 집”과 같은 캠핑 예능은 오지에서도 도시적 삶을 얼마나 즐길 수 있냐를 보여주며 시청자층은 20-40대가 주를 이룬다. 여실히 세대 간의 사유양식의 차이가 나타난다. 샴푸에서 자연의 향을 맡는 게 아니라 꽃들 속에서 너의 샴푸 향을 느끼는 거다. 이렇게 세상은 변해간다. 프로그램도 변하는 세상을 담아 전달한다. 시청자도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볼 뿐이고.
정부의 ‘여성가족부(여가부) 폐지’ 방침에 대한 반발 민심이 심상치 않다. 전 정부에서 여가부가 정치적 시빗거리로 등장한 일은 뼈아픈 대목이지만, 대선 공약이라는 이유만으로 폐지론에 갇혀서 선택지를 좁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윤 대통령도 “여성·가족·아동·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는 만큼 대선 초반의 최초 공약대로 ‘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하는 쪽으로 선회하여 극심해지는 젠더 갈등을 끝내는 게 현명할 것이다. 행정안전부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관련 기능을 보건복지부 산하 조직으로 이관하는 방안을 뼈대로 하는 정부 조직개편안을 밝히자 야당과 여성단체 등을 필두로 반대 목소리가 거칠게 쏟아져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당론으로 개편안을 반대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민간단체들도 일제히 반기..
‘심심한 사과’라는 말이 한글날 즈음에 논란이 됐다. 사과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것’이다. 심심하면, 당연히 아니 된다. 마음 전해지도록 진해야 하고, 간간해야 한다. 따분하고 맛없으면 되겠는가. (언어) 전문가들도 걱정한다. ‘심심한 사과’는 문해력 결핍의 상징과도 같다는 얘기들이 무성하다. 그런데 이런 걱정을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슬그머니) 내미는 계기로 삼지 말라는 ‘경고성’ 칼럼도 눈에 띄었다. 그 칼럼의 한 대목 ‘한자 없이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하니 (사회 일각에서는) 딴 생각 말라.’는 취지의 주장이 쟁쟁하다. 이런 논의는 이집트상형문자나 갑골문 같은 어원 공부에 관심이 있는 필자에게 좀 불편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한국어의 어휘와 시민의 어휘(능)력을 망가뜨리지 말자는 것이다. 한자교육은 그 다음의 주제다. 그 논설의 ‘한글만으로도 얼마든지’라는 대목을 거푸 읽는다. 이런 생각에 부응하는 연구와 성과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계속된다. 이번 경우, ‘심심하다’에 ‘맥없고 맛없다.’는 뜻 말고도, ‘마음의 드러냄(표현)이 깊고 간절하다.’는 뜻도 있음을 가르쳤어야 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이 대목, 큰 모순 아닌가? ‘어른’들은 아래 세대에게 심심한 사과를 해야 한다. 그 책임은 지성의 절실한 의무다. 허나 놓쳤다. ‘외우라고 강요만 하고는 문해력을 왜 탓하느냐?’는 취지의 글도 있어 주목한다. 글자나 글월(의 원리와 해법)을 가르치지 않고 글눈 어둡다고 탓하면 되는가? 그런데 그 글에도 한자교육 의무화를 경계한다는 말이 들어있다. 한자를 겁내는 것인가? 왜? 한자 없이, 한국어의 (최소한 3천년 쌓인) 개념어와 이미지를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는 방법론을 누가, 어떤 모양으로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 그 필요, 절실하다. 국립국어원은 당연히 그 노하우를 만들어 두었겠지. (한)국어학자들도 의당 가지고 있겠다. 가능하리라. 허나 힘(비용)은 많이 들 것이다. ‘심심한 사과’ 논란이 없었다면 저런 불통이나 뜻 비틀린 소통의 문제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니. 되레 다행이라고 여긴다. 영어 ‘open’ 없이 우리말 ‘오픈’을 설명하는 방법도 있겠지. 한국어 ‘화이팅!’이나 ‘파이팅!’이 ‘fighting’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은 적절하지 못한가? ‘심심하다.’도 비슷하다. 한자(영어) 없는 순혈, 순종의 한국어를 만들고 싶은가? 가능할까? 필요한데 찾아도 없다. 학술어나 전문용어 등 한국어의 개념어를 영어나 한자 같은 한글 이외의 (외래적) 요소 없이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기성세대는 내놓아야 한다. 없다면, 만들어내라. 그게 문해력의 전제 조건일 터다. ‘열린 한국어’를 그려본다.
한국 최고의 프로야구 선수 이대호가 지난 8일 은퇴했다. 매 시즌 타율 3할, 20홈런, 100타점 달성의 목표를 세운 그는 3할3푼1리와 23홈런, 101타점을 기록하며 야구 인생의 마지막 해인 올해를 장식했다. 타격 7관왕으로 롯데 자이언츠의 두 번째 영구 결번의 주인공이 된 그의 은퇴는 남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그가 불우한 어린 시절에 닥친 갖은 역경에도 이를 극복하고 최고의 선수로 성장해 명예롭게 은퇴했기 때문이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머니마저 집을 나가 할머니 손에서 컸다. 인터뷰에서 그는 “야구용품을 살 돈이 없어 할머니 쌍가락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다시 찾아오기를 20번도 넘게 했다. 내가 잘 돼야 할머니의 희생에 보답할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고 회고했다. 할머니는 시장에 나가 된장을 바른 콩잎을 팔아 대호 형제의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출생이 자신의 선택의 결과가 아닌 것처럼 성장기에 겪은 어려움도 개인의 잘못과는 무관하게 사람을 힘들게 한다. 하지만 이런 변수들이 이대호를 빗나가게 하거나 좌절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어린 마음에도 반드시 훌륭한 야구 선수로 커서 할머니의 그 큰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다짐을 마음속에 새겼다. 고교 재학 중 세상을 떠난 할머니에 대한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자 대신 매년 프로야구 정규시즌을 마치면 독거노인들을 위해 연탄도 나르고 목욕 봉사도 하리라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가 해마다 꼬박꼬박 하는 봉사는 올해로 16년째다. 뒤늦었지만 할머니에 대한 진심어린 효도인 셈이다. 그는 프로야구가 창설되던 해에 태어나 20살에 정식 프로선수가 되어 창설 40돌이 되는 올해 40살의 나이로 은퇴했다. 한 시대가 막을 내린 셈이다. 이대호 선수가 대중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6년 타격 3관왕에 오르면서였다. 인생의 황금기를 열 수 있게 만든 힘은 역시 아내의 헌신과 내조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를 마음이 반듯한 프로야구선수로 키운 이가 할머니였다면 조선 최고의 4번 타자로 키운 이는 분명 아내 신혜정 씨이다. 40년 만에 나올까 말까 한 타자 이대호. 은퇴식에 선 그는 신동빈 롯데 그룹 회장을 향해 “후배 선수들이 팀을 떠나지 않게 해달라”며 적극적인 지원을 촉구하는 인상적인 고별사를 남겼다. 전석이 매진된 사직 구장을 메운 팬들을 향해서는 배트 대신 치킨과 맥주를 들고 관중석을 찾겠노라고 역시 롯데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당부하면서 감사 인사를 바쳤다. 그는 겸손하다. 그러면서도 늘 당당하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승엽 형은 못 따라간다. 추신수는 늘 자신보다 위였다”면서 선배와 동료를 추켜세운다. 도열해 있는 동료 후배선수 한사람 한 사람을 안아주면서 일일이 따스한 배려의 말을 남기고 실천한 이대호. 사람이 성장하는 데에는 주변 환경과 가정 형편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고들 하지만 당사자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음과 의지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사례도 있음을 이대호는 온몸으로 입증했다. 선수 맏형으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대는 성공한 삶을 살아 왔다! 더 큰 뜻을 이루기를 팬으로서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