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기사 - 돈키호테가 둘시네아에게 /임채성 미치게 보고 싶소, 뼛속 시린 새벽이면 풍차거인 마주하던 대관령 등마루에서 하나 된 우리의 입술, 그 밤 잊지 못하오 풋잠 깬 공주 눈엔 태백성이 반짝였소 서로의 몸 비비는 양 떼들 울음 뒤로 하늘도 산을 안은 듯 대기가 뜨거웠소 한데 이젠 겨울이오, 인적 끊긴 산정에는 로시난테 갈기 같은 마른 풀만 듬성하오 나는 또 그 말에 올라 북녘으로 길을 잡소 백두대간 어디쯤에 그대 앉아 계실까 폭설이 지운 국도 철조망이 막아서도 숫눈길 달려가겠소, 한라에서 백두까지 ■ 임채성 1968년 경남 남해 출생, 2008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오늘의시조시인상,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등 수상, 시집 『세렝게티를 꿈꾸며』, 『왼바라기』, 시선집 『지 에이 피』 등이 있다.
횡계리2 /김윤배 그녀의 숲이 얼마나 빈 가슴을 지니고 있는지 알겠네 바람은 얼마나 거친지 알겠네 세계의 검은 숲을 안았던 그녀가 왜 횡계리인지 알겠네 그녀의 새벽잠을 깨우는 이슬을 알겠네 투명한 어둠과 촉촉한 입술을 알겠네 준령이 키운 큰 바람을 다스리는 거대한 풍차의 의지를 알겠네 그녀의 꽃무늬 후레야스커트가 큰 어둠을 풍차처럼 돌리는 걸 알겠네 문장 속 흐린 사내를 알겠네 그녀의 의지가 별숲과 달빛강을 대관령으로 끌어들인다는 걸 알겟네 밤마다 큰 트럭을 몰고 대관령 넘는다는 걸 알겠네 동해의 너울을 싣고 넘어와 횡계리에 부리며 슬픈 미소 짓는다는 걸 알겠네 횡계리는 그녀의 말하지 않은 어둠인 걸 알겠네 그녀의 어둠이 숲으로 자라는 걸 알겠네 파란 하늘 가득 고인 그녀의 눈동자를 ■ 김윤배 1950년 충북 청주출생, 고려대, 인하대 박사,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옴, 시집으로 <떠돌이의 노래>, <굴욕은 아름답다>, <바람의 등을 보았다>외 다수, 장시집 <사당 바우덕이>, <시베리아의 침묵>,<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등을 출간했다. 현재 안성에서 <
일탈 /이숙경 사막의 난쟁이처럼 눈부신 빛 마주하면 그 빛 찬란해도 쓸모없다 푸념하며 가려 줄 그림자 찾아 광야를 헤맬 테지 나무들이 이룬 숲에 마침내 다다르면 그늘을 베어 내야 환한 빛이 보인다며 밀림을 토벌해 버릴 듯 눈빛을 견줄 테지 내가 낳은 변덕이 사막과 밀림에서 오만하게 자라나 헝클리는 오랫동안 어둠은 올곧은 빛을 엎드려 섬길 테지 ■ 이숙경 1966년 전북 익산 출생, 200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집 『파두』, 현대시조 100인선『흰 비탈』, 시론집『시스루의 시』,대구시조문학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 지원금 수혜, 시조시학 젊은시인상 수상
노새의 노래 /류미야 세상에 없으면서 있는 것이 있지 오월 장마당은 옛길 너머 사라지고 그을린 농투성이 옷을 바꿔 입었어도 땅은 바로 그 땅 울 엄니 눈물이 밴 그 길 타박이며 하냥 걸어왔다네 목청 다 떼고도 즐거운 나는 노새, 벌거숭이 황톳길 천둥 치듯 닦이고 등꽃 박꽃 칡넝쿨 베어지고 뽑혔어도 길은 기억하지 사라진 것들의 발소리 거친 풀 한 줌이면 푸르르 길을 끌며 근본 없는 목숨이지만 말보다 오래 사는, 세상엔 없으면서도 있는 것이 있다네 ■ 류미야 69년 경남 진주 출생, 2015년 《유심》 시조 등단. 시집 『눈먼 말의 해변』. 제4회 공간시낭독회문학상, 제7회 올해의시조집상 등 수상.
산꿩의 노래 /유헌 숲 그늘 박차고 깃을 치며 나는 산꿩외마디 목청으로 푸른 계곡 뒤흔들며풀어진 능선길 지나 경계를 넘고 있다 초연硝煙의 백마고지 가르던 그 노래 어미의 어미가 부르던 망향가를 철책선 허리 붙들고 내가 따라 부르네 ■ 유헌 1957년 전남 장흥출생, 2011년≪月刊文學》상반기 시조 신인상, ≪한국수필》 수필 신인상, 2012년≪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시조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계간 시조시학·한국동시조 편집위원, 시조집 『노을치마』 『받침 없는 편지』
깍지 /김동원 내 손을 나꿔 챈 그녀에게 아내가 있어 안 된다고 했다. 곁에 벗은 예쁜 속옷은 유채 꽃빛이었다. 등 뒤에서 그녀가 “오늘 밤만이라도 하늘 물속을 헤엄쳐, 저 샛별까지 갈 수 없냐”고 내 허리를 꽉 깍지로 껴안았지만, 나는 두 자식이 있어 진짜, 안 된다고 뿌리쳤다. 돌아보지 말걸, 꿈속 그녀는 알몸으로 초승달 위에 웅크려 울고 있었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 밤부터 꿈만 꾸면, 구름 위로 떠오르는 달에게 올라타는 연습을 한다. 제멋대로 엉켜버린 두 인연이 천년의 허공 속에 헛돌지라도, 미친 듯 미친 듯 그녀를 위해, 나는 밤마다 꿈속에서 달을 타는 연습을 한다. ■ 김동원 62년 경북 영덕 출생. 대구에서 성장. 1994년 『문학세계』로 등단. 시집『구멍』, 『깍지』 외 다수. 시선집 『고흐의 시』 출간. 시 에세이집 『시, 낭송의 옷을 입다』, 평론집 『시에 미치다』 출간. 대담평론집 『저녁의 시』 편저. 2015년 대구예술상 수상. 2017년 매일신춘문예 동시 당선. 2018년 대구문학상 수상. 2018년 고운 최치운 문학상대상 수상. 대구문인협회 시분과위원장. 대구시인협회 부회장. 한국시인협회원. 『텃밭시인학교』 대표.
이 땅에 화로가 되어 /박병두 굶주린 사람, 병든 사람, 외로운 사람도 오늘 그대가 부르는 따뜻한 노래 때문에 추운 땅이 녹듯 해가 떠 빛을 쬐었다. 가파른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오늘이 그대의 땀과 눈물이 모여 경제를 이끌었고, 고뇌와 시름으로 경제만을 걱정하던 날선 바람들이 저 가난한 사람들을 강인하게 일으켜 세워주었다. 칼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동장군처럼 흔들림 없이 그대는 자신보다 그들을, 가족보다 국가를 생각했다. 출구 없는 위기의 경제가 슬프니, 오히려 힘이 되어 된바람이 부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도 그대의 용맹한 정신이 길을 찾는다. 외로운 사람들이 있어, 그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면 천만리 만만리 길을 찾아가야 한다. 어제와 오늘이 다름없는 경제의 선상에서 풍요를 염원하는 그대의 충정한 외침은 더 큰 희망으로 가슴에 남는다. 윤택한 경제를 꿈꾸는 그대의 숭고한 바람이 오늘 이 땅에 화로가 되어 태양처럼 더 크게, 더 넓게, 더 따뜻하게, 웅장하게 일어날 것이다. = 경기 중소기업인 ‘G포럼’에 부쳐, 헌시 ■ 박병두 1964년 전남 해남출생, 한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아주대학원 국문학과, 원광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 KBS
메밀꽃이 피는 밭 /방극률 어머니는 메밀밭에 나가셔서 메밀꽃을 쓱 보시고 예쁘다고만 하셨을까? 알곡들이 잘 여물거라고만 기도하셨을까? 내 생각 어머니 생각이 다르겠지만 전화를 걸어 묻지는 못 할 일 메밀꽃들에게 서운하게 들릴 말씀 하실까봐… 둘러보시기는 하지만 꽃송이 한 번 꺾지를 않으셨으리 주인이 서 계신 개간지 복판 꽃핀 놈이 알곡이겠지 야야, 메밀밭 고것들이 째깨 쓰러져서 속상하다. 그래요, 바람 고것들이 삐뚤어져 불었나 봅니다. 시인의 敍事는 매우 정겹다. 서정시의 기본질서를 가지면서도 긴장된 의미전달에 부여했다. 흔들리며 당신은 꽃이라 했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부서져도 생명력을 신장하는 축은 고귀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누구나 한번은 아파야 하고 이별을 해야 한다. 어머님의 메밀밭 바람은 그 어떤 수사로도 반증할 수 없다. 고단하고 지친일상을 메밀꽃의 인자함을 통해 위로받으셨을까? 우리들의 어머님은 늘 횐 옷이었고, 그 횐 옷은 오늘을 있게 하는 생명력이다. 시간도 흐르고 여름장마가 진행 중이다. 어머님 곁에 부르는 착한노래들이 일렁인다. 시인에게 어머님의 고단한 일상을 풍금소리로 들려주고 싶은 것일까? 사람 사는 마을이 있는 한
쪽동백꽃 지다 /박숙경 온 봄 내 홀딱 벗고도 더 벗을 게 남았는지 산길 경사만큼 목청을 높여가는 검은등뻐꾸기를 나무라는 이름 모를 새의 한 마디 지지배야 지지배야 가산산성 진남문에서 동문 올라가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 척 뒷모습이 더 고운 쪽동백의 하얀 능청 -시집 ‘날아라 캥거루’ 생각만 해도 눈과 마음이 환해지는 5월입니다. 요즘엔 꽃 피는 차례가 뒤죽박죽, 한꺼번에 폭죽처럼 터져 미인 선발대회처럼 법석을 떨지만 5월 숲의 백미는 쪽동백이나 때죽, 또는 산딸나무처럼 신록과 어우러진 흰 꽃나무들의 우아함이 단연 압권이지요. 그런데 그 쪽동백이 능청을 떤답니다. 가산산성에서지요. 가산산성이 있는 줄 처음 알고 인터넷 눈팅을 했지요. 경북 칠곡의 삼중 석성이라는데요. 질곡을 건너온 역사의 산물인 이런 산성이 현대인들에겐 고졸한 운치를 선사한다는 건 아이러니컬합니다. 나도 눈을 감고 그 산성의 5월 숲길에 올랐지요. 홀딱벗고, 홀딱벗고, 검은등뻐꾸기가 청아한 노랫소리를 드높이자 지지배야, 지지배야, 면박을 주는 새들의 수작은 아랑곳없이 하얗게 지는 쪽동백꽃잎의 능청을 떠올립니다. 정작 능청을 떠는 건 시인이겠지만요. 아무래도 한 번 그곳에…
슬픔도 오래되면 울울해진다 /나호열 견디지 못할 슬픔도 있고 삭지 않은 슬픔도 있지만 슬픔도 오래되면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 가지를 뻗는 슬픔 잎을 내는 슬픔 뿌리가 깊어지는 슬픔 이 모든 상형의 못난 한 그루의 나무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된다 울진 소광리의 못난 소나무 600년의 고독을 아직도 푸르게 뻗고 있다 집요한 슬픔이다. 슬픔이 오래 묵으면 “한 그루의 나무가 된다”는 시인의 독백이 가슴을 후빈다. 슬픔이 나무가 되어 가지도 슬픔이고 뿌리도 슬픔이다. 슬픔의 가치화에 집중돼 있는 작품이다.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슬픔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희망이 된”다고 시인은 역설로 풀어내고 있다. 슬픔의 내면을 관류하고 있는 것은 절망이지만 그 절망을 건너뛰면 인식은 새로워지고 우리는 희망이라는 파랑새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울진의 못난 소나무는 그렇게 600년을 아직도 푸르게 살고 있다. 아니 살아내고 있다. 아프지만 아프다는 말을 삼키고 살아가는, 위로가 필요한 이웃들이 많다. 그들을 돌아보는 따뜻한 目이 많은 세상에는 분명 파랑새와 희망이 있는 것이다. /이채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