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야간관광’이 ‘2021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됐다. 2012년 ‘수원화성’, 2015년 ‘무예 24기’에 이어 세 번째로 선정된 것이다. 한국관광의 별은 국내 관광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제정한 상이다. 한국관광 발전에 이바지한 관광지, 방송 프로그램 등을 선정해 시상하고 있다. 본상과 특별상으로 나뉘어 있는데 수원화성 야간관광은 본상으로 선정됐다. 수원화성 야간관광이 관광의 별 본상으로 뽑힌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동안 수원시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시는 과거 ‘경유형 관광지’에서 ‘체류형 관광지’로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관광객들의 체류 시간이 늘어나야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수원시에 따르면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전 연간 600만 명 가량의 관광객이 방문했다고 한다. 수원화성 축성 220주년을 맞은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엔 역대 최대인 72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수원시에서 하룻밤 이상을 숙박한 관광객 비율은 28.2%밖에 되지 않았다. 관광객 1명당 찾은 관광지도 2.7곳에 불과했고, 화성행궁과 수원화성에 편
-칠레 정치의 고통과 그 반전(反轉) “신자유주의의 출생지를 신자유주의의 무덤으로 만들겠다. 어찌하여 불평등의 부담을 가난한 사람들만 지게 하는가? 이런 현실을 반드시 끝내겠다.” 올해 35세인 젊은 사회주의 정치가 가브리엘 보리치가 칠레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쏟아낸 뜨거운 육성이었다. 칠레 최초의 사회주의 대통령 아옌데 암살 이후 50년 만의 일대 사건이다. 보리치의 당선에 칠레의 청년세대는 열광했고 라틴 아메리카 정치는 새로운 희망을 목격하고 있다. 그건 오래 전 일어났던 비극의 기억이 겹치면서 더더욱 의미심장했기 때문이었다. 1973년 칠레에서 피노체트가 미국의 지원 아래 군사 쿠데타를 있으킨다.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대통령 닉슨에게 라틴 아메리카에 좌파정권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아옌데 정권 전복이 필요하다며 칠레 군부를 통한 군사 쿠데타 기획을 강력히 주문한다. 칠레의 암흑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선거로 당선된 사회주의자 아옌데는 이 과정에서 살해당했고 미국은 칠레를 파시즘과 결합한 신자유주의의 실험장으로 만든다.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공적 통제를 반대한 하이예크의 제자 밀턴 프리드만이 이끈 이른바 “시카고 학파”의 이론은 이렇게…
한 곡의 노래가 200명 가까운 사람을 죽게 했다. 1930년대 헝가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충격적이고 불가해한 사건은 소설로 쓰였고 소설은 영화를 탄생시켰다. 1988년, 독일 작가 닉 바로코프가 쓴 소설도 1999년 롤프 슈벨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도 노래와 제목이 같다.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도대체 어떤 노래이길래 수많은 이들을 자살로 치닫게 했을까. 모두 나 같은 물음표를 달고 영화를 보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 내용보다 노래가 궁금했다. 영화 전반부는 삼각, 아니 사각 관계의 러브 스토리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작은 레스토랑을 무대로 펼쳐지는 숨 막히게 아름다운 여자와 그녀를 둘러싼 네 남자의 소리 없는 난투극. 레스토랑 사장 자보, 그곳에서 피아니스트로 고용된 안드라스, 고객 독일인 한스...... 모두 일생을 걸고 일로나를 사랑한다. 애인 자보를 두고서도 안드라스와 사랑에 빠진 일로나. 두 남자는 일로나의 ‘질투금지, 싫으면 떠나든가’라는 통첩에 ‘당신을 잃느니 당신의 한 조각이라도 갖겠다’며 기이한 삼각관계를 받아들인다. 거기다 더해 일로나에게 청혼했다 차인 독일인 한스가 나중 나치 점령하 부다페스트의 독일군 대령으로 권력
"한국 정부는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경제를 더욱 성장시켜 나갈 것"이라며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위해 '사회적경제 기본법', '사회적 가치법', '사회적경제 판로지원법' 등 사회적경제 3법이 조속히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지난 1일 대통령이 밝힌 바 있다. 사회적경제기본법은 19대 국회에서 최초 발의된 후, 20대까지 5차례 발의됐지만 처리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사회적경제기본법과 함께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천을 촉진하는 사회적 가치 기본법”, “사회적경제 판로개척 및 공공조달지원법” 또한 국회에 계류 중이다. 한국사회적경제연대회의는 “저성장,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역을 근간으로 사람 중심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적경제가 활성화하기 위해선 법 제도 기반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국정과제 중 하나인 사회적경제기본법이 현 국회에서 제정될 수 있도록 집권 여당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라며 촉구에 나서고 있다. 전국 사회연대경제지방정부협의회 회원인 지자체장들 또한 국회 안건조정위원회에 회부어 있는 '사회적 경제 기본법(안)'의 연내 본회의 통과와 함께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의 연내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사회적경제
유년시절부터 정신의 발달과 육체의 쇠퇴가 시작된다. 그건 바로 두 개의 원뿔체를 서로 반대로 세워놓은 것과 같은 것으로, 육체적 힘의 쇠퇴와 정신력의 성장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조화로운 성장은 자연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속에서도 침묵과 고요속에서 이루어진다. 떠들썩한 것은 모두 파괴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야만적이다. 그러나 아직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진정한 정신적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정적과 침묵의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번뇌 속에서 허덕이며 가끔 고독해지면 쓸쓸해질 뿐이다. 인간은 오직 고독과 정적 속에서만 힘찬 생명력과 성장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도 그것을 “네가 기도할 때는 골방으로 들어가라”는 말로 표현했다. 세계는 평화의 실현을 위해 이 침묵 속의 성장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런데 세계를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을 한 온갖 새로운 가르침이 수많은 목소리가 되어 구원을 약속함으로써, 세계의 진정한 정신적 성장이 방해를 받고 있다 우리는 더욱더 침묵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침묵의 목소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알려줄 것이다. (류시 말로리) 정신적 생활을 하는…
시인 정지용의 고향 충북 옥천에는 서울의 주류언론을 압도하는 '옥천신문'이 있다. 옥천은 한겨레신문 초대 사장을 지낸 청암 송건호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12월 21일 옥천우체국에서 옥천FM공동체라디오 개국식이 열렸다. 옥천FM은 송건호기념사업회와 '옥천신문' 그리고 지역주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쏘아 올린 새로운 풀뿌리 미디어다. 공동체라디오란 기초자치단체인 시·군·구를 방송 권역으로 하는 소출력(10W 이하) 비영리 방송이다. 전파 도달범위가 반경 5km 내외인 작은 미디어로 지역의 노인과 청소년, 장애인과 이주민 등 주류미디어에 잘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 누구나 참여하여 ‘우리동네이야기’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국내 공동체라디오는 2004년 시범사업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서울의 관악FM과 마포FM, 대구 성서FM과 광주FM 등 7개사가 운영되고 있다. 최초 허가 이후 전국 각지에 공동체라디오가 속속 등장하여 새로운 ‘지역공동체 미디어’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MB정권 등장이후 최근까지 공동체라디오는 변방의 ‘잊혀진 존재’였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7월 21일, 무려 17년 만에 전국의 20개 지역에
“그 해의 크리스마스는 성스러운 명절이 아니라 차라리 지옥의 명절이었다. 불이 꺼져있는 텅 빈 가게들..” 어느 해변 도시에서 발생한 지독한 전염병과 이에 대응하는 다양한 인간의 행태를 다룬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의 한 대목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소설을 조금 더 들여다보자. “1월 중순쯤에 이르러 시민들이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갖게 된 때부터 실질적으로 페스트의 위력은 사라져 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 사회도 곧 이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하면서 이 글을 쓴다. 희망의 사전적 의미는 ‘앞 일에 대하여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막연하고 단순한 바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 목표를 염두에 두고 의지가 수반될 경우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힘이 된다. 희망을 갖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개별 인간의 행동이 달라진다. 더 나아가 희망이 여러 사람들에게 퍼지면 그 집단, 나아가 사회 전체의 힘으로 이어질 수 있다. 희망이 큰 힘을 발휘해서 기대 이상의 상황으로 반전을 이끈 사례를 우리는 역사에서 많이 목도해왔다. 코로나19가 잇따른 변이종의 출현으로 기세등등하다. 코로나와의 무한정 적대적 대응에 의미가 없다는 판단
발등이 부었다. 통증은 속에 있고 붓기는 밖에 있다. 바깥을 보면서 속을 다독인다. 고장은 발등의 기다란 뼈와 중지발가락이 만나는 관절에서 났다. 손톱만한 관절 하나가 사람을 기울게 한다. 나눠져야 할 무게중심을 왼발 하나가 도맡는다. 발가락의 고장으로 하루가 절뚝거린다. 더딘 걸음을 잰걸음이 부축한다. 길은 멀고 겨울 해는 짧다. 쏟아지는 군중 속에서 ‘나’는 ‘우리’가 되고 만다. 출퇴근길 인파속에서, 난무하는 구호와 외침 속에서, ‘우리’와 무관한 ‘나’로 개별적이긴 힘들다. 모래사장에서 각기 다른 모래 한 톨의 개별을 가리는 것처럼 난해한 일은 없다. 산을 보며 나무를 헤아리기 어렵듯이 숲에 앉아 산을 그리는 것 또한 쉽지 않다. 하물며 역사에 묻힌 개별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개별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는다. 사건사고로 회자되기는 하지만, 개별의 역사는 보편의 역사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개별의 역사는 오늘도 시퍼렇게 눈을 뜨고 엄연하다. 매스컴마다 온갖 개별의 역사로 빼곡하고, 빼곡한 역사마다 찬성과 반대의 각기 다른 댓글이 꼬리를 문다. 무는 꼬리와 상관없이 기억하지 못할 역사들이다. 묘한 일이 아닐 수 없
올 한 해가 일주일여 남았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맞았지만 ‘위드 코로나’가 다시 방역강화로 전환되면서 어느때보다 엄중한 상황이다. 하루에 7000명 안팎의 신규 확진, 1000명대의 위중증 환자, 수십명 이상의 사망자 발생에 밤 9시가 넘으면 거리는 적막이 흐른다. 누적 확진자가 60만명에 이르러 우리나라 총인구(5175만명)를 감안할 때 100명 가운데 한사람 이상(중복 감염 포함)이 코로나에 감염됐다. 생명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경제적‧정서적 고립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속에 신음하고 있다. 예전같은 연말이면 이웃을 살피는 각종 미담과 구세군 자선냄비 종소리가 잠시나마 삶에 지치고 얼었던 마음을 녹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 2년째인 올해는 그마저도 눈과 귀에 잘 와닿지 않는 것 같다. 그만큼 세상을 보려는 우리의 생각이나 삶의 자세가 웅크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든 어두운 곳을 찾아 보듬어야 할 사회지도층의 일그러진 모습과 그들의 세계관은 국민들을 더 절망속에 밀어 넣고 있다. 대선 후보와 가족리스크가 연일 뉴스 전면을 장식하고 그것도 모자라 측근들과 정부 고위 인사들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그 대열에 경쟁적으로 합류한다